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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한 상자 ㅣ 랜덤 시선 17
성미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아이들에게 일기쓰기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글감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는 것이다.
밥먹고 잠자고 꿈꾸고 똥싸고 싸우고 말하고 공부하고 노는 모든 일들이
내 일기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가장 먼저 이야기해주는데
성미정의 시집을 보는동안 내가 느낀 건 감동보다도 먼저
시인이 쓴 일기를 보고 있다는 거였다.
물론 많은 시인들이 일상을 노래하지만 일상이 아닌 척 덮어두는 일에 능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들 재경이 육아일기, 남편관찰 일기, 거울속에 비친 시인 일기 등이
따뜻하고 잔잔하게, 혹은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양이처럼 털을 몽땅 세운 듯
불안하고 날카롭다.
게다가 대부분의 시들에서 의도적인 행바꾸기로 의미전달이 모호해진 것도
몰입을 방해한다.
한 차례 쯤은 훌떡 재주를 넘어 쓰고 있는 탈을 벗었으면 좋겠는데
끝까지 고뇌만 하는 시인을 보는 건 차라리 고역이었다.
'나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김치 같은 시를 쓰다 싶다'(그래서 김치는 맛있다)거나
'제대로 된 문장 한 줄을 모아본 적 없는 자의 끝없는 참회와 피로를'(문장을 읽기 전에는)
느끼거나 '아직 어설프기 그지없는 미로이고 생성 중에 있기 때문에 언젠가 성미정과 나는
발견되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알아보기 쉬운 쓰레기 상태로'(허무 명랑한 시인의 미로)
머물러 있다.
내가 가진 병의 증상만으로도 힘이 드는 터에,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어려움.
증세가 호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거나, 신약을 만들었다는 즐거운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이 동병상련보다 더 커서 나는 이 시집을 사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