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고전을 읽는 것처럼 약간의 지루함도 넣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신비스러움을 더한

묘한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이하라 마사키는 스물 다섯이 되는 청년으로

나비를 좆아 왕선악을 헤매는 도중 뱀에게 물려

조그만 암자의 주지 엔유에 의해 보살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이한 현상들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여인과

그를 향한 마사키의 간절함으로

이 책은 서글프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아직 깨어나지 않고

이어지는 꿈은 아닐까?'


그렇게 결말도 아주 애매한 잔상을 남기며 끝이 나고

책을 덮는 순간 맨 첫 장에 쓰여진 글귀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팔랑 팔랑 팔랑 날아가는 저기 저것

꿈인가 생시인가, 꼭 그 한가운데

-기타무라 토코쿠-


나는 철학 따위는 잘 모른다

그래서 조목조목 철학을 들먹여 이 책을 소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 책이 철학을 모른다고 해서 읽을 수 없는 일이던가


나는 닮은 꼴 찾기 놀이도 즐기는데

책 속에서 닮은 꼴이나 원형을 찾아낼 때는 더 재미있다

돌아보았기 때문에 점점 더 멀어져가는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나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얼굴을 봐서 벌을 받는 푸쉬케나

돌아보면 그대로 돌이 되어버리는 메두사의 목이나

마사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목욕하던 그 여인의 앞모습이나 모두 닮아있다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무슨 노래 가사 같지만 인생에서 '미련'이란 쓸데없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목 뒤쪽에서 느껴지는 메두사의 서늘한 기운에

감히 돌아보지 못하고 그냥 앞으로 걷고 있는 내게

마사키처럼 한번 쯤은 메두사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변해서

그걸 보고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면 좋겠다

마사키가 부러울 지경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여행이란 건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내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어느 시대로 가고 싶을까?

키브린처럼 중세가 보고 싶을 지도 모른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대를 지나 조금 더 안전한 시간대로.


코니 윌리스는 상당히 상복도 많은 작가인가 보다.

휴고상과 네블러상, 로커스 상을 모두 받았단다.

약 820쪽에 달하는 이 책은 들고 다니기 버거웠는데

오늘 다 읽어버렸다. 아침 11시부터 저녁 5시까지.

밥 하느라고 뺏긴 시간, 밥 먹느라고 뺏긴 시간을 모두 제하면

5시간 정도?


내게 말을 거는 것도,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도 귀찮아서

방문에 출입금지를 붙여놓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전혀 2054년 같지 않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쓴 게 1992년이라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서 읽어줘야 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키브린이 내려간 중세는 5년간의 고증을 거쳐

쓴 거라 그런지 굉장히 사실적인 묘사이다.

중세가 진짜로 이런 모습이라면 정말 가보고 싶지 않다.

게다가 너무 춥다.

더위도 끔찍할 테지만 추위도 겪어낼 것 같지 않다.


키브린이 내려간 중세와 키브린을 내려 보낸 미래사회의

옥스퍼드에서 동시에 발병이 시작된다.

오, 그리고 끔찍한 페스트와 인플루엔자의 공습으로

양쪽 사회 모두 심각한 고통을 겪는 중이다.

하필이면 늦은 점심을 먹을 때 페스트의 발생 징후인

가래톳을 자르는 광경이며 거기서 흐르는 점액질 따위의

문장 때문에 겨우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었다.

밥 먹을 때는 책 읽지 말아야 하는데..


외워서 시험을 봐야했던 세계사며 역사 따위는 굉장히 싫지만

이렇게 이야기 속에 역사가 파고 드는 건 참 매력적이다.

책을 다 덮고 나서 너무나 아쉬웠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작가의 또 다른 작품<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사서 들고 얼른 보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누르고 있다.

서점까지 가기엔 내 몰골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여태껏 세수도 안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책 + 오디오CD 3장)
미치 앨봄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3판 77쇄까지 찍은 걸 보니 많이들 읽었다.

초판이 인쇄되던 1998년 6월 10일에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벌써 5년이나 지났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알량하고, 웃기지도 않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읽기가 늦춰진 것이다.

'베스트 셀러는 흥이야'

해리포터가 그랬고, 개미가 그랬다.

뒷북치기의 여왕인 셈이다.


난 너무 늦게 모리 교수를 만났다.

루게릭병을 앓아 움직이도 못하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서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것처럼

너무도 환하게 웃던 그 얼굴.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내 삶이 5년 동안 허비되는 걸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바쳐라.

자신을 둘러싼 지역 사회에 자신을 바쳐라.

그리고 자기에게 목적과 의미를 주는 일을 창조하는데

자신을 바쳐라.'


나를 바치는 일이라니..

오체투지의 절을 할 때를 빼곤 나를 바쳐 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나를 위해서도 나를 온전히 바쳐 보지 못했다.

말로는 내가 하는 일이 좋다, 사랑한다. 행복한다 하면서도

막상 나를 온전히 던져보지 않은 것이다.

돈 따위는 끼여들 틈이 없을 거라던 그 교수님의 말씀이

지금 일을 하고 받는 돈이 적다고 투덜대는 내 입술에 꽂힌다.

나는 과연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진정으로 그리워할 스승이 있었는지?

당신을 있는 그대로 귀한 존재로, 닦으면 자랑스럽게 빛날 보석으로 봐준 그런 스승이 있었는지?'

모리교수에게 마지막 강의를 들은 미치는 이렇게 묻는다.


얼른 떠오르는 얼굴 하나. 고등학교 다닐 때 내 국어 선생님이다.

1학년 때 처음 만나 졸업을 할 때까지 나의 되지도 않는 글을

읽어주시고 답장을 쓰고는 교무실에 와서 찾아가라시던

귀여운 선생님. 그리운 최영란 선생님.

뵌 지 한참이 지났다. 건강하실까?

내 얼굴을, 내 목소리를, 나 자체를 기억이나 하시려나

아니, 기억하실 것이다.

겨울이 깊어지면 한 번 찾아뵈야지. 그때는 이런 말씀을 드려야겠다.

"선생님, 곰팡이 냄새 나는 감옥에서 보낸 그 편지 기억나세요?"라고.. 그러면 선생님은 이러실 거다.

"그래. 네가 보낸 그 편지를 받고 가슴이 두근거렸었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끔찍이도 좋아해서 너도 거기 있는 거라고

그랬잖아."


아, 그 시절이 참 그립다.

꿈 꾸던 시절이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처음 만나는 듯한 이 단어 '미사고'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사고'는 myth 神話 + imago, 心象의 합성어로

이상화된 신화 속 등장 인물의 이미지를 뜻한다.


미사고의 숲의 간단한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니 가슴이 아프다.

주인공 스티븐은 2차 세계 대전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데

어릴 때 지냈던 라이호프 숲 떡갈나무 집에서 형을 만난다.

같은 숲에서 아버지가 실종되고, 아버지와 비슷해져가는 형

크리스찬을 보면서 숲이 당기는 힘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형도 어느날 아버지처럼 숲으로 가버리고

숲이 미치는 힘으로 인해 스티븐에게도 미사고들이 생겨나고,

누구의 미사고인지 모르는 귀네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마저 숲으로돌아가고 만다.

사랑하는 귀네스를 찾아, 자꾸만 밀어내기만 하고

중심부로 들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 숲으로 들어가려고

갖은 노력을 하던 중에 비행사 키튼을 만나 함께

숲을 탐험하게 된다.


라이호프 숲에는 미사고들이 가득 했다. 아버지가 만들어 낸

미사고와 형이 만들어낸 미사고들, 그리고 스티븐이 만든 미사고들..등등의 미사고들.

신화 속에서 헤매는 것같은 독특한 분위기

그속에 어느새 스티븐도 신화의 한 부분이 되어버리고

숲의 약탈자인 크리스찬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스티븐과

숲을 위해 그런 스티븐을 돕는 미사고들.


중세시대, 신석기, 구석기를 마구 넘나드는 공간

사랑하는 귀네스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스티븐과 키튼

결국 키튼은 자신이 전쟁 중에 목격했던 도시를 찾아 떠나고

스티븐은 홀로 남아 뜻하지 않게 자신의 형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죽은 채로 돌아온 귀네스

시간의 장벽을 넘어간 스티븐은 또다른 전설이 되고..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인지 선도 분명하지 않다.

숲이 떡갈나무산장을 침범해 숲의 일부를 만들어버린 것처럼

신화도 사실도 모두 하나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3년전 일이었는데

그땐 뭐가 그리 급했는지 페이지 넘기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두 번 읽게 되면 느긋함이 생기는 모양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미사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으니 다음에 한 번 더 읽으면 인간의 머릿속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가져간다는 것도 좋은 일 같다


이번에 임용고시를 치른 친구와 얘길 하다가 그런 얘기가 나왔다.

하도 답답해서 성당을 다니는 그 친구가 무당을 찾아갔다고 했다.

'언니, 시험 보고 왔지?"

그러더란다. 

그 얘기 끝에 서정범 교수가 나와서 해던 말들을 들려주었는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무당(점술가라고 해야하나?)

들이 맞히지만 자신도 모르는 것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지갑 속에 얼마가 들었는지 자신이 알고 있으면 그걸 맞힐 수

있지만, 아내가 지갑 속을 채워주었을 경우는 맞히지 못하는)

결코 모르더라는..

그럼 결국 독심술을 하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인데.


이런 미사고들이 생성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신화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숲의 힘을 빌어

슬금슬금 모습을 나타내는 것

숲은 위대한 무당과 같은 거다.


스티븐이 귀네스를 만나 행복해졌으면 싶었다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는 그곳에서 스티븐은

다시 귀네스가 돌아올 것으로 믿고 기다리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척 좋아하는 나로서는

둘이 다시 재회하지 못한 것이 무척 슬펐다.


이걸 읽으면서 만약 내가 (우연의 음악 덕분에 '만약에' 병이 걸린

모양이다) 

신화속 인물을 불러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봤는데

생각나는 신화 속 인물들이 죄다 서양인물 뿐이었다

어릴 때 많이 접해본 것도 그쪽 신화였고 커서도 그 영향으로

계속 우리와 다른 그들이 편안하게 다가왔으므로..

귀네스도 그 신화가 존재했던 시대의 말을 썼기 때문에

처음에 스티븐과의 대화가 어려웠는데 만약 내가 그런 이들을

불러낸다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쉽다. 

우리도 근사한 신화가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하고 싶었던 작업인데 간단한 신화에 살을 좀 두툼하게 붙여서

울룩불룩 볼 것 많은 신화를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사랑'을 참 좋아하지만

그리고 책도 무척 좋아하지만 이렇게 제목에서부터

드러내놓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은 잘 보지 않는다.

같이 드러낸 것들이지만 영화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조금 독특하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앨리스(이 이름 때문에 상당히 거북했다. 자꾸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연상이 되어서 이미지가 고정되는 느낌 때문에) 라는

여자가 사랑을 얻고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인데

그냥 소설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

무슨 다큐멘터리를 보는듯 소설 내에 작가의 나레이션이

그대로 들린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의 이런 행동은 이렇고 저런 행동은 저렇고

이렇게 분석을 해대는 느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기는 했다.

남자들의 행동이나 여자들의 행동이나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각자가 지닌 '성'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사랑이라는 건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 같은 건 없는 걸까?

없는데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착각이 끝나는 순간 그렇게 쉽게 헤어지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