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 또 봄

          -김명인

 

저도 한 무늬라고

봄 바다가 펼쳐놓은 화판 위로

황사 바람 며칠째 객토를 싣고 들이닥치는데

이 욕설 어디다 부릴까, 육지 쪽으로

거품 물고 몰려가는 파랑 좇아

나 또한 버릴 生이 있다는 듯

멀건 낮달로나 간다. 봄은, 추억의 하역에만

몇 개 섬들이 생겨나리라.

저 수위 휘젓다 못해 구차한 흙덩이

황해 온통 이녕으로 끓이는데, 착시 탓인지

갈매기 몇 마리 경적 높이에서 사라진다. 또 봄!

출렁거리는 멀미 진흙에 섞으면

어떤 무늬 수평 저쪽까지

너울대며 번져갈까.

 

********

봐주는 것처럼, 내 건강을 챙겨주는 척 하며

슬쩍 마스크 뒤집어 씌우려는 봄.

별 수 없잖아. 불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막겠어.

싫어. 화장 지워지잖아. 그냥 내 폐 속에 먼지 좀 넣어주고 말지.

그래. 지금 나무를 열심히 심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하루에 10년치 씩 자라는 것도 아니고

국경에 유리막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일 테니

그저 내가 오는 한 징후로 느긋하게 받아들이던가.

아주 징그러울 정도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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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 신경림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

그닥 잘 하는 놀이는 아니지만

가끔 포켓볼을 치러 당구장에 가게 되면,

음침한 가운데 보라색, 재색, 파란색, 빨간색, 녹색을 두른

당구대 위에 전등 세 개가 흔들리면서 색을 더욱 묘하게 만들어

평소보다 훨씬 근사한 빛깔로 내 시선을 붙잡는데,

기분 좋게 보라색이나 빨간색을 골라서 가보면

멀리서 봤을 때 느꼈던 그 빛깔을 절대 만날 수 없다.

멋으로 당구대 위에 담배를 올려놨다가

재가 떨어지면서 생긴 시커먼 구멍들과

당구알들이 굴러다니면서 이리저리 쓸어

본디 색깔이 나오려는 빛바랜 천들이

좋았던 기분을 급속도로 떨어지게 만든다.

숨어 있을 때 아름다운 색이었던 것을 내가 잊은 탓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부분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요즘 너무 드러내면서 살았다.

특히 아무 것도 채워진 게 없으면서 드러내는 것은

빈 소리 요란한 깡통이다.

경박하다.

얼룩이 드러나지 않도록,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어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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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아코디언 문학과지성 시인선 26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황사 또 봄

          -김명인

 

저도 한 무늬라고

봄 바다가 펼쳐놓은 화판 위로

황사 바람 며칠째 객토를 싣고 들이닥치는데

이 욕설 어디다 부릴까, 육지 쪽으로

거품 물고 몰려가는 파랑 좇아

나 또한 버릴 生이 있다는 듯

멀건 낮달로나 간다. 봄은, 추억의 하역에만

몇 개 섬들이 생겨나리라.

저 수위 휘젓다 못해 구차한 흙덩이

황해 온통 이녕으로 끓이는데, 착시 탓인지

갈매기 몇 마리 경적 높이에서 사라진다. 또 봄!

출렁거리는 멀미 진흙에 섞으면

어떤 무늬 수평 저쪽까지

너울대며 번져갈까.

 

********

봐주는 것처럼, 내 건강을 챙겨주는 척 하며 슬쩍 마스크 뒤집어 씌우려는 봄.

별 수 없잖아. 불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막겠어.

싫어. 화장 지워지잖아. 그냥 내 폐 속에 먼지 좀 넣어주고 말지.

그래. 지금 나무를 열심히 심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하루에 10년치 씩 자라는 것도 아니고

국경에 유리막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일 테니

그저 내가 오는 한 징후로 느긋하게 받아들이던가.

아주 징그러울 정도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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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미친' '미친다' '미쳐' 같은 말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라고 손가락질 받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를,

이 세상에서 안 미친 사람(= 정상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산다는 일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떠올렸다.

동시에 별로 호감 가지 않았던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결국 이들도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날이 선 생각들이 조금씩 무뎌졌고

그들이 쓴 책, 혹은 그들을 평가한 책들에 호기심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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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준다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기에도 아까워서 책을 펼쳐 가운데를 꾸욱 누르는 짓도,

감히 책장을 접어 읽었던 곳까지 표시를 하는 짓도,

더구나 연필로 밑줄을 쫘악 긋는 일 따위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거의 신봉에 가까운 책사랑 때문이었는데

그런 것들도 머리카락 새에 흰 색이 끼어들면서 조금씩 누그러져

친한 사람들에게는 더러 내 책을 대여해주기도 하는 걸 보면서

나 스스로는 굉장히 관대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착각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 착각이 깨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렇다.

이 작은 방은 오로지 나의 서재인 양 아들 녀석이 들어와 잠깐씩 컴퓨터를 할 때나

남편이 메일을 확인해야 한다고 간청을 해야만 마지못해 컴퓨터 암호를 풀어주고 있는데

매일 바꾸는 암호를 어제는 깜빡 잊고 그저께 암호를 유지했더니만 사단은 벌어졌다.

자판에 비닐을 덮은 채 사용하고 있는 게 다행이지..

그 비닐 위에 김치 국물이 무려 네 군데나 떨어져있는가 아닌가!

밤늦게 라면 먹기를 즐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하필 여기서 그러냔 말이지..쩝.

정말 화가 난다. 관대함이고 뭐고 다시 암호를 알려주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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