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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신형건

 

아주 느릿느릿 지나가는

시간이 여기 있었구나.

내가 까맣게 잊고 있는 사이

뭉기적뭉기적거리던 나의 게으른 시간들이

길어진 발톱 속에 집을 짓고

꾸역꾸역 까만 때로 모여 있었구나.

고린내를 풍기며 고롱고롱

코를 골고 있었구나.

하얀 비누거품에 세수하고도 깨어나지 않던

게으른 녀석들이

-요놈들!

손톱깎이를 갖다 대니, 톡!

화들짝 소스라쳐

달아나는구나.

 

 

***

 

샌들을 신느라고 여름내내 바깥에 나와 있던 발톱들에게

언제나 검은 색 메니큐어를 발라두었더랬다.

워낙 검은 색과 친하기도 하지만

볼품 없는 내 발톱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뜨거운 여름에도 항상 칙칙한 검은 색에 물든 발톱들이 안쓰러워

요 며칠은 핑크로 변신을 시켜주었다.

그렇지만 수전증도 없는 내 손은 메니큐어만 바르려들면

바르르 떨려 직선으로 쭉 내리뻗는 일이 안 되니

항상 비뚤비뚤한 선을 그려 뭉개지기 일쑤!

그래도 뭉개진 선 위로 몇 번을 덧바르면

색이 진해져 삐딱한 선은 겨우 감추고 다녔는데

오늘 다시 보니 여기저기 까지고 벗겨진 게

몇 달을 유랑걸식한 폼새다.

 

아세톤을 듬뿍 묻힌 탈지면으로 깨끗이 지우고보니

참 고생도 많이 했구나. 내 발.

발바닥에 굳은 살도 많이 박히고 높은 신발을 자주 신어

심하지는 않지만 '무지외반증'이 나타나고 있으니

안 보인다고 너무 안 챙겨준 모양이다.

 

때 낀 발톱도 잘라내고

미지근한 물에 동생이 챙겨보내준 무슨 오일도 넣어

(불어라 읽을 수는 없지만 피곤한 발에 그만이라던.^^)

편안히 쉬게 해준 뒤에 물기를 잘 닦고

매끈매끈 윤기를 나게 해준다는 로션도 발라주었다.

 

내 시간들을 다시 돌려서 건강한 발인 상태로 해줄 수는 없지만

항상 발가락이, 발톱이 거기 있다는 걸 기억하마.

또 열심히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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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

오래도록 못 만난 모양이다.

바람과 햇볕이 서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사뿐사뿐 주위를 맴돌며

재회의 춤을 춘다.

바람도 술렁거리고 뜨거운 햇볕도 일렁이는 이런 날엔 빨래가 제격이다.

몸 한 군데가 모래 든 고무신마냥  서걱거려도

끙차..일어나 빨래를 털어 널면 도망갔던 기운도 되돌아오는 듯

잠깐이나마 피돌기가 빨라진다.

팔을 붙잡고 헤어질까 저어하여 바지가랑이를 붙잡은 그들의 손을 

딱 끊어 탈탈 터는 내가 저들은 얼마나 얄미울까?

 

개운한 마음으로 돌아선 내 눈에 들어온  신문 헤드라인 기사

"아무 조건 없습니다" 안철수 깨끗한 양보

참 멋진 사람들이구나.

쭈그리고 앉아 기사를 읽다보니 마음이 언짢다.

 

김기현 한나라당 대변인은 "며칠 간 국민을 혼란시킨 강남 좌파

안철수 파동은 단일화 쇼로 막 내렸다" 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은 "야권통합을 위한 큰 진전" 이라며

안 원장의 양보와 박 변호사의 출마를 반겼다. -한겨레-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서로 상대방이 하는 짓은 다 나쁜 짓이라고 단정짓는 일부터 삼가하면

훨씬 괜찮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자리에 가면 다 똑같아지는 모양이다.

서로 어깨를 쳐주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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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능소화

                      -김명인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生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

어느 책에서였던가.

이마가 말갛고 곱게 양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에 교복을 입은 태가 얌전한,

병색까지 희미하게 비쳐 더욱 신비롭던 그 소녀가 살던 집이

능소화로 뒤덮인 집이라는 표현때문에

정작 꽃은 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능소화는 내게 그 소녀만큼 신비스런 꽃이 되었다.

 

한참을 지난 뒤에야 붙잡을 무언가만 있으면 기를 쓰고 올라가 짐을 부려놓듯

툭툭 던지는 그 주황빛 꽃이 능소화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능소화=신비'라는 공식이 굳어져 꽃이 곧 소녀요, 이야기 자체가 되었을 무렵이니

괜히 첫사랑을 보듯 아련한 눈빛으로 가볍게 한 번씩 목례를 하고 지나다닐밖에.

 

윗부분에 집중적으로 꽃이 피는 까닭에

다리보다 얼굴쪽이 무거운 능소화는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일사불란한 아름다움이란 언젠가는 질리게 된다는 걸 얘는 어쩌면 이렇게 일찍도 알았을까?

지기 시작한 그 꽃들마저 농염하게 유혹을 해대니

산만한 능소화에게 정신이 팔려 어제는 길을 가다 한참동안 붙들려있었다.

능소화야, 다음 여름에 다시 만나 또 사랑을 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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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연못 

                           - 정복여

 

나무들은 제 그늘만큼의 연못을 품고 있다

스스로 빠져서 깊어지는,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잎의 파문들,

저 물결 속으로 뿌리들 자란다

 

동쪽에서 뜨던 해가

서쪽으로 가다 나무 정수리에 올라

그늘이 곧 너의 연못이라고 전한다

그 마음을 받아 못 속을 가는 나무

미처 잘못 떨어진 낮별도 가라앉아

나무는 더욱 깊어지는 바닥을 간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휙 쓸린다

나뭇잎 몇몇이 지워지고

그 그림자 받아 안은 바닥의 한 부분이

뿌리의 안쪽에 닿아 있는 것이 보인다

나무들은 저렇듯 뿌리깊어

제 몸을 출렁이는 것이다

 

 

***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은 걷기 딱 좋았다.

새들도 묵언수행을 하는지 되바라진 놈들만 이따금 존재를 드러낼 뿐

온 사위가 고요하고 부드러운 빛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안 가져온 걸 탓하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걸어도

걷는다는 게 그저 좋아 신발을 뚫고 바닥에 닿으려는 내 발가락들의 힘을 받아

사람들이며 가게 구경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눈동자 덕분에 몸주인인 내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게 주인이 주방장에게 아침부터 싫은 소리를 늘어놓았는지

음식은 전체적으로 조금 짰지만 데코레이션만은 아주 훌륭했던

코스 요리. 배 두드리며 달콤한 후식까지 다 먹고나자

삼청동은 그제야 숨어 있던 소리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쾌활하고 에너지 넘치는 바람이 닿는 것들과 모두 하이파이브를 하며

지나는 소리였다.

 

나뭇잎들아, 안녕!

기와조각들아, 안녕!

예쁜 언니 머리카락도 안녕!

이 천은 뭐야, 부드럽군 그래!

오호, 뜨거워. 차 지붕도 안녕!

이야, 넌 거기 숨어 있었구나. 돌멩이!

먼지 좀 닦아달라고 해, 간판!

 

이렇게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 속에서도 특히

나무가 출렁이며 만들어내는 연못 속에 푹 빠져있던 세 시간

어느 가을날의 삼청동은 사진 없이도 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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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 

 

                    - 김소연

 

 

 마음에도 두 개의 귀가 있다. 듣

는 귀와 거부하는 귀. 이 두 개의 귀

로 겨우 소음을 견디고 살아간다.

지구가 돌아가는 광폭한 소음은 듣

지 못하면서도 한밤중 냉장고가 돌

아가는 소음은 예민하게 듣는 몸의

귀처럼, 고막이 터지지 않을 정도의

소리들에만 반응하는 귀. 칭찬은 받

아들이고, 비난은 거부하는 귀.

물스러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

음의 귀. 고운 것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의 귀. 호오惡를

각각 구별하는 귀 때문에 나는 나를

호위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나는

나를 안전하게 가둔다.

 

 

**

숨을 쉬고 피를 돌게 하고 근육을 움직이고

신경을 건드리는 온갖 자극에 반응해야 하는 내 몸이

가끔 게으름을 부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내게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이명(耳鳴).

 

청하지 않은 객이니 언제 오더라도 좋을 리가 없다.

오늘 불쑥 내게 찾아오셨길래 물었다.

"언제까지 찾아오실겁니까?"

"위이이이이이이잉."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이오?"

"지이이이이이이잉."

"그건 또 무슨 말이신지?"

"도오오오오오오옹."

"똥?"

 

나도 분명히 호오惡를 구별할 수 있거늘

싫은 소리들은 그냥 내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만한 공력을 쌓아야 하는 것일까.

공중부양은 못 해도 부디 그 정도는 가르쳐줄

도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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