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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닭
-고창환

모란장터 골목길에선
때도 없이 목쉰 울음에 꺾이는
토종닭의 푸득임과 마주쳐야 한다
중복 지나 말복으로 넘어가는 길목
한 솥 백숙으로 달아오르거나
생닭으로 팔려나가기 위하여
수시로 털 뽑히는 숨가쁜 눈동자와
얼굴을 맞대야 한다

어느 산골 미명의 골짜기를 깨우며
건강한 날개짓으로 활기차기도 하였을
지난날을 그리워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잘려나가는 한 시절
끓는 물에 벗겨진 맨 몸의 기억이
바람결의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이젠 잘못든 길도 내 길 같기만 하고
끌며 끌리며 찍어온 발자욱들이
댕겅 잘린 발목처럼 저 홀로 떠도누나
아직 펄떡이는 그리움이 남았거든
목쉰 울음이라도 핏기가 돌까

살아서 치욕스러운 나날에
목을 비틀어 칼을 들이댄단들
무슨 울음으로 저항할 것인가
허리 숙여 맞아줄 맑은 새벽과
생목들의 그렁그렁한 울림도 없는 세상
철망에 부리를 박고
지나온 내력을 몸 안에 가둔다

더 이상 마음 둘 곳 없는
막다른 길목의 막막함마저
거두어들이는 재빠른 손놀림
잘려진 사연들이 홰를 치며 튀어올라도
저 무심한 결별을 탓하지 않는다
들끓는 세상 기름띠로 뭉칠지라도
푸르렀던 한 시절로 충분하였으니
한 줌 햇살로 다시 태어나리라.

****
어릴 때 시장에 가면, 닭을 튀겨주던 집이 있었다.
지금처럼 무슨 메이커, 무슨 메이커의 닭이 있던 게 아니어서
그렇게 시장 한 복판에 커다란 기름 솥 걸고 노릇하게 튀겨냈는데
한결같이 싱싱한 걸 자랑하려고 그랬는지 바로 곁에 닭장을 설치해 놓고

손님이 이거요 하면 그걸 바로 잡아서 해주었었다.
털을 뽑던 기계에 두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튀긴 닭에 미련을 끊지 못하고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열심히 먹어댔었는데..

다음 생엔 털을 뽑는 사람 손이 되어보실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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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를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
“아참, 잊은 거 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나를 보면서 아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더니 이불 속에서 부시럭거리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뭘 하는 거야?”
“친구에게 편지 써요. 보지 마세요.”
“여자 친구?”
“네.”
“숙제구나?”
“네.”
“이름이 뭔데?”
“에이, 안 돼요.”
“아이, 이름만 보자.”
“그럼, 요기만 보세요.”
이러면서 맨 앞부분만 보여준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여자애 이름이 하나 달랑 있다.
“그애가 어디가 맘에 들어?”
“네, 예쁘구요, 무지 착해요. 공부도 잘 하구요.”
“그래? 그럼 명호는 그 친구한테 어떤 친구인 거 같니?”
“네, 저는요. 애들 준비물 안 가져올 때 잘 빌려줘요.”
나참..겨우 준비물 빌려주는 걸 자랑으로 삼다니..
하긴, 그래서 맘에 드는 아들이다.

내 서랍을 뒤져 제일 예쁜 편지지로 갖다 주었다.
“여기다 다시 써봐.”
“에이, 괜찮아요.”
“아냐, 여자들은 예쁜 거 좋아하거든.”
“그래요? 전 몰랐어요.”
그러면서 애써 도화지에 죽죽 줄 긋고 쓰던 편지를 옮겨 적는다.

이제 여자친구 얘기를 들먹이는 녀석을 보며 다 컸단 생각이 들었다.
친구란 그저 자기와 같이 놀아주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늘 생각한다.
평생을 함께 할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고...

더불어, 나와 함께 내 곁을 지켜준 친구들이 갑자기 보고 싶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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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廢家)에서 보낸 편지
-이창기

지금 나를 엄습하는 것은
너의 잘못 든 꿈이 종종 헤매다 가는
양지바른 고향의 언덕이 아니라
산그늘의 발목을 잡는 메마른 관목의 뿌리와
살을 찌르는 가시덤불 가득한
낮지만 거친 야산의 정적이란다
잘 있었니?

네가 한때 툭하면 걸려 넘어지던
높은 문지방과 눅눅한 부엌바닥에
오늘 낮에는 잠 깬 뱀이
깨진 오지 항아리에서 나와
부러진 숟가락을 비켜 길을 만들더구나
그래 밥은 먹고 사니?

네 짐작대로
집구서의 기둥들이란 것이
비목인 양 반쯤은 허공에 기대
줄지어 있거나
기껏해야 똑같은 방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용마루를 이고 서서
애지중지 잡풀더미나 끼고 산단다
그 잡풀로 이어진 똥간 옆에는
군사 우편이라고 찍힌 편지 몇 통과
하다 만 숙제가 남은 잡기장이
오늘도 자신을 읽고 또 읽는 모양이더라

그러니까
네가 바짝 마른 잎으로 서정시를 외거나
아니면 철 지난 구호를 중얼거리며
털레털레 걸어나온 문도 없는 출입구에서
잠시 되돌아본
그 툇마루의 반질반질한 기억에 엎드려 편지를 쓴다

지금 내가 당도하려는 곳은
한밤중에 잠깨어
문지방에 선 채로 지린 오줌을 누고
꺼진 구들을 피해 다시 돌아누울 때
언뜻 바라본 해묵은 달려 그림 같은
졸참나무 가지에 거린
내가 버리고 간 달이며,
그때 너를 화나게 하거나
속상하게 했던 일들이 내뱉는
욕설 같은 새소리

아마 내일 아침이면 나는
네가 구형 전기 밥통을 뒤져
허겁지겁 양푼에 밥 비벼 먹고
서둘러 땡볕에 늘어진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길도 아닌 길에 대해
아니면
몇 번씩 마음을 고쳐먹고 가고 있을 너의 길에 대해
다시금 생각이야 해보겠지만
지금은 이 빈 집과
그 주변에 들꽃처럼 흩어져 살고 있는 무덤들이
먼저 위로받아야 할 시간

그 짬에 기대어
오늘밤 네가 돌아갈
그 먼 집의 불을 미리 드문드문 밝혀둔다
언젠가처럼
지하철에서 선 채로 졸다 무릎이 꺾이게 되거들랑
혹시
그 탄탄한 건물 유리벽에 실수로 머리라도 찧게 되거들랑
모른 체하지 말고
속으로라도
새처럼 울어 나를 부르지 않겠니?

잠시 뒤면
흙에서 되돌아나온 시간이 투덜거리며
얼마 안 남은 나의 체온을 거두어 갈 것이다
내 잊지 않고 너의 울음을 그곳에 새겨두리라

******
조금 길다.
왠지 읽는 동안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이 떠올랐다.
죽은 자가 되어 나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그 섬뜩한 느낌.

수요일은 참 힘이 드는 날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내 육신이 나를 배반해 감기와 합동으로 나를 공격하는 날에는.
등에는 뭔지도 모를 것들이 잔뜩 들어간 배낭이 있고
손 역시 책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전철에 올랐다.
인천행은 역시 더디게 오고
부천부터 인천까지의 거리가 왜 그리도 멀게 느껴지는지
자리는 노약자보호석 밖에 없다.
그래도 지킬건 지킨답시고 그 앞에 서서 전철의 움직임에 맞춰 가볍게 흔들렸다.

언제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 무릎이 꺾이고 만 것은.
누가 봤는지도 모른다. 안 그런 척 하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으니.
집으로 오는 길은 길고 길고 길고..
돌아와서도 할 일은 많고 많고 많고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일을 해 주는 사람은 없고
불을 밝혀 놓았으되, 쓸데없는 곳이라 되려 꺼야 하니..

'잘 있었니?' 에 눈물 한 방울 떨어지고
'그래 밥은 먹고 사니?' 에 또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구불구불하고 샛길도 많은 인생길에
나는 정말 길을 잘 고른 건지 생각한다.
이 길은 맞는 것 같은데 너무 돌아가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돌아가다 결국 가려고 하는 곳에 못 가면 어떡하나 생각한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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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최승호

붉은 토마토를 먹은 내 몸뚱이가 거대한 토마토로
변신하지 않는 것은 토마토가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토마토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
하루종일 먹어댔다.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먹는 일에만 탐닉한 하루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의 과음을 핑계삼아 주스를 한 병 들이켜고
새로 밥 지어 시어터진 열무김치와 더불어 한 그릇을 비우고
커피 마시고 녹차 마시고 또 물 마시고
"야, 어디 갈래?"
동생에게 전화 걸어 괜히 들쑤셔 놓은 뒤
우린 모두 함께 오이도로 출발했다
내일이 휴일이라 그런지 도로 위엔 온통 차들..
꽉 막혀 가는 길이 참으로 더뎠다.
기껏해야 40분 거리를..

배고파 배고파 밥줘를 연발하는 아이들 입에 새우깡으로 막음을 하고
식당에 엉덩이를 걸치기가 무섭게 칼국수를 주문하고
조개구이도 大자를 시켰다.
세수대야만큼 많이 나오는 칼국수를 다 먹고
조개구이에 소주도 두 병이나 마시고 그래도 모자라 다시 小자로 주문.
그것마저 다 먹고
더 이상 들어갈 구석 없다고 배 두드리며 나오다가
"엄마? 산에 다녀오셨다구요? 저녁 하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엄마, 아빠까지 차에 싣고(?) 이번에는 버섯샤브샤브를 먹으러 갔다
배불러서 안 먹을 것 같던 사람들이 메뉴가 바뀌자
먹었던 기억도 사라지는지 잘도 먹는다.
배불러서 못 먹는다니까 하면서 사이다도 한 컵 마시고
커피 들어갈 데 없어 하면서도 커피 한 사발도 들이켰다.

아직도 소화가 덜 되었다.
이대로 자면 내일 아침 볼만 할 터이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고 내가 음식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음식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내가 그들을 먹은 탓이다. 음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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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냐고
-이성복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
서점에 가는 일은 참말로 행복한 일이다.
서가에 줄지어 꽂혀 있는 책이 다 내 책은 아니로되,
보고 있는 동안은 모두 내 책이 될 수 있음이니.

문학과 지성사의 시편들은 모두 한결같다.
캐리커쳐를 사용하는 것하며 겉표지의 모양까지
그래서 더 정겨운 지도 모른다.
시집을 산 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지
괜히 마음 찔려하며 이것저것 눈으로 훑어보는데
어김없이 아는 책에만, 아는 작가에만 눈이 가는 것이다.
반가운 이름들에 한 번씩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275번.. <아, 입이 없는 것들>을 꺼냈다.
첫 장을 열면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라는 시인의 말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여기서 무릎 한 번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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