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廢家)에서 보낸 편지
-이창기

지금 나를 엄습하는 것은
너의 잘못 든 꿈이 종종 헤매다 가는
양지바른 고향의 언덕이 아니라
산그늘의 발목을 잡는 메마른 관목의 뿌리와
살을 찌르는 가시덤불 가득한
낮지만 거친 야산의 정적이란다
잘 있었니?

네가 한때 툭하면 걸려 넘어지던
높은 문지방과 눅눅한 부엌바닥에
오늘 낮에는 잠 깬 뱀이
깨진 오지 항아리에서 나와
부러진 숟가락을 비켜 길을 만들더구나
그래 밥은 먹고 사니?

네 짐작대로
집구서의 기둥들이란 것이
비목인 양 반쯤은 허공에 기대
줄지어 있거나
기껏해야 똑같은 방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용마루를 이고 서서
애지중지 잡풀더미나 끼고 산단다
그 잡풀로 이어진 똥간 옆에는
군사 우편이라고 찍힌 편지 몇 통과
하다 만 숙제가 남은 잡기장이
오늘도 자신을 읽고 또 읽는 모양이더라

그러니까
네가 바짝 마른 잎으로 서정시를 외거나
아니면 철 지난 구호를 중얼거리며
털레털레 걸어나온 문도 없는 출입구에서
잠시 되돌아본
그 툇마루의 반질반질한 기억에 엎드려 편지를 쓴다

지금 내가 당도하려는 곳은
한밤중에 잠깨어
문지방에 선 채로 지린 오줌을 누고
꺼진 구들을 피해 다시 돌아누울 때
언뜻 바라본 해묵은 달려 그림 같은
졸참나무 가지에 거린
내가 버리고 간 달이며,
그때 너를 화나게 하거나
속상하게 했던 일들이 내뱉는
욕설 같은 새소리

아마 내일 아침이면 나는
네가 구형 전기 밥통을 뒤져
허겁지겁 양푼에 밥 비벼 먹고
서둘러 땡볕에 늘어진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길도 아닌 길에 대해
아니면
몇 번씩 마음을 고쳐먹고 가고 있을 너의 길에 대해
다시금 생각이야 해보겠지만
지금은 이 빈 집과
그 주변에 들꽃처럼 흩어져 살고 있는 무덤들이
먼저 위로받아야 할 시간

그 짬에 기대어
오늘밤 네가 돌아갈
그 먼 집의 불을 미리 드문드문 밝혀둔다
언젠가처럼
지하철에서 선 채로 졸다 무릎이 꺾이게 되거들랑
혹시
그 탄탄한 건물 유리벽에 실수로 머리라도 찧게 되거들랑
모른 체하지 말고
속으로라도
새처럼 울어 나를 부르지 않겠니?

잠시 뒤면
흙에서 되돌아나온 시간이 투덜거리며
얼마 안 남은 나의 체온을 거두어 갈 것이다
내 잊지 않고 너의 울음을 그곳에 새겨두리라

******
조금 길다.
왠지 읽는 동안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이 떠올랐다.
죽은 자가 되어 나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그 섬뜩한 느낌.

수요일은 참 힘이 드는 날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내 육신이 나를 배반해 감기와 합동으로 나를 공격하는 날에는.
등에는 뭔지도 모를 것들이 잔뜩 들어간 배낭이 있고
손 역시 책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전철에 올랐다.
인천행은 역시 더디게 오고
부천부터 인천까지의 거리가 왜 그리도 멀게 느껴지는지
자리는 노약자보호석 밖에 없다.
그래도 지킬건 지킨답시고 그 앞에 서서 전철의 움직임에 맞춰 가볍게 흔들렸다.

언제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 무릎이 꺾이고 만 것은.
누가 봤는지도 모른다. 안 그런 척 하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으니.
집으로 오는 길은 길고 길고 길고..
돌아와서도 할 일은 많고 많고 많고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일을 해 주는 사람은 없고
불을 밝혀 놓았으되, 쓸데없는 곳이라 되려 꺼야 하니..

'잘 있었니?' 에 눈물 한 방울 떨어지고
'그래 밥은 먹고 사니?' 에 또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구불구불하고 샛길도 많은 인생길에
나는 정말 길을 잘 고른 건지 생각한다.
이 길은 맞는 것 같은데 너무 돌아가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돌아가다 결국 가려고 하는 곳에 못 가면 어떡하나 생각한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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