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라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 말은 항상 마음에 든다.
'소매를 걷고' 처럼 뭔가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 상태를 몸으로 나타낸 듯하기 때문인데,
오늘 드디어 나는 머리를 질끈 묶을 수 있었다.
무슨 긴박한 일이 생겨서 내 마음을 다잡아 해야 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전혀 상관 없이
어제 감은 머리가 제 멋대로 뻗치고 뭉쳐서 다시 감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봐줄 상황이었는데
나름대로 일요일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머리는 귀찮게 하지 말자 주의여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흉측해도
그럭저럭 안 보면 그만이다 싶어서 뒹굴거리던 참에 일이 생겼다.
조카 녀석이 근 열흘간 감기가 원인이 된 폐렴을 앓느라 병원 신세를 지더니 지난 주 토요일에 퇴원했는데
그걸 기념으로 다들 모여서 저녁이나 한 끼 먹자는 통보였다.
"언니, 와 봐야 김치하고 삼겹살밖에 없어."
나도 감기로 기운이 축이 난 참이라 (희한하게 몸은 결코 변하지 않은 채) 그러마 대답하고 보니
아무리 아줌마라지만 이런 꼴로 다른 동네까지 간다는 게 참 못 봐 줄 일이었다.
대충 찍어바르고 보니 그럭저럭 얼굴이야 감출 수 있지만 머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뒤진 끝에 머리를 묶을 수 있는 핀을 하나 찾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일자로 된 베이지색 핀은 뒷머리를 모아 하나로 묶기엔 최적이었는데
문제는 그러고 나니 너무나 아줌마스러워서 나 스스로 보기에도 민망하단 것!
결국 밤색 베레모를 뒤집어 쓰고 길을 나섰는데 왜 이리 기분이 좋던지.
목 덜미에 살짝살짝 스치는 머리꼬랑지가 맨날 짧기만 한 내 머리가 변했음을,
드디어 머리 기르기에 성공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 하여 발걸음도 가볍게 모임에 다녀왔다.
비록, 그저 먹을 일 하나로 머리 질끈 묶고 다녀왔지만 묶을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자랐다는 게 참 좋다.
이번 봄에는 머리카락 바람에 휘날리면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