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 읽다보면 역사의 흐름이 트이는 조선 왕조 이야기
유정호 지음 / 믹스커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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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1일 1페이지~어쩌구~” 하는 수많은 장르의 책들이 정말 많다. 이런 책들은 대게 얉고 넓은 지식을 표방하는 교양서라 읽지는 않았다. 내 개인적으론 얉고 넓은 지식보단, 깊고 좁은 지식을 추구하는 책들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예외도 있는법. 이번 신간도소에 『1일 1페이지 조선사365』라는 책이 보였다. 볼까말까 살짝쿵 고민했으나, 아무래도 조선사니까. 음 조선사니까! 대체 어떤 이야기로 1페이지씩 분량을 할당했을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요즘 나오는 조선사 책은 어떤 기조로 서술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책을 읽어본 결과, 각 페이지별 레이아웃 구성도 괜찮았고, 내용구성도 정사와 야사를 적절히 섞어서 서술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정사와 야사를 명확하가 구분해준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나 할까. 특히나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 (국사시험제출빈도 높은) 내용들도 거진 포함되어 있었다. 


책을 서술한 시각도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은 것 같아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과거에 나온 조선사 책들은 대게 조선의 밝은 점을 부각시키고, 어두운점은 축소하거나 생략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내용면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컨데 태종재위기에 쓰여있는 이야기에 ‘이 정책은 조선후기에 이런식으로 변한다’ 라고 기록되어있다면, 조선후기에 넘어왔을 땐 ‘조선 전기에는 이랬던 정책이 이렇게 변했다’ 라는 식의 중복되는 부분이 꽤 있었다는 것. 근데 뭐, 이건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1페이지에 꽉꽉 채워넣다보니 글자 크기가 좀 작다^_T...




조선은 정말 민본의 나라였나?


조선은 ‘위민/민본국가’를 자처했던 나라다. 한마디로 조선이란 나라는 백성을 위한, 백성이 근본인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의 실상을 본다면, 정말 조선이라는 나라가 백성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아니 노력이란걸 하긴 했는가 싶은 의구심이 들곤 한다. 어쩌면 조선이 말하는 백성은 모든 백성이 아닌, ‘양반’에 한정된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양인의 수가 많아질수록 세금과 군인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만큼, 태종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을 시행했다. 당시 양인이 천민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기에 종부법의 실행으로 양인의 수는 많이 증가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세종은 종부법을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으로 환원시켰다. p 029



조선시대는 노비 매매도 문제였지만 주인이 노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주인은 노비를 죽여도 관청에 보고만 하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중종 때 홍언필의 처 송씨는 홍언필이 여종의 손을 잡은 것을 목격하고는, 여종의 손을 잘라버렸다. 홍언필이 또 다른 여종과 잠자리를 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여종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빗으로 얼굴을 긁는 폭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송씨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와 기개를 겸비한 여장부로 평가받았다. p 030



그와중에서도 조선의 노비는 숨을 쉬는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사고파는 재산이었다. 그럼 태어날때부터 노비는 노비였을까? 이에대한 답이 태종 때 종부법과 세종 때 종모법이다. 세종때 종모법은 이후로 조선 사회를 쭉 관통한다.



종부법은 아비의 신분을 따라서, 종모법은 어미의 신분을 따라서 자녀의 신분이 정해진다. 고로 아비가 양반이면 엄마가 노비여도, 자식은 양반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세종이 환원시킨 종모법은 어미가 노비면 아비 신분상관없이, 자녀는 무조건 노비가 된다. 세종이 종모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나, 결국 종부법으로 바뀌었던 신분제를 종모법으로 다시 환원시킨건 세종이라는 이야기다.



세종의 종모법으로 환원시키며 조선 팔도에는 노비가 기하급증했다. 그 노비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은 조선에서 말하는 백성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들은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 조건으로 사조(증조부, 조부, 부, 외조) 안에 관직이 나간 인물이 있는지를 보았다. 만약 사조 안에 관직에 나간 인물이 없다면 현직 관료의 보증서인 보단자를 첨부토록 했다. 이로써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나누었던 양천제가 신분을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하는 반상제로 변화했고, 결국 조선 중기 이후의 신분제는 폐쇄적 신분제가 되었다. p 041



조선 초기에는 ‘양천제’라고 하여, 사람의 신분은 ‘양인’과 ‘천민(예: 노비)’으로 구분되었다. 해서 ‘양인’이라면 신분고하 막론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능력우선’ 인재채용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양반’는 무엇인가? 과거에 급제에서 문신이 된 사람을 동반, 무과시험에 급제에 무신이 된 사람을 서반이라고 하였고, 이 동반과 서반을 아울러 말하는 명칭이 ‘양반’이었다. 즉 문신, 무신 관리들이 ‘양반’이었다.



하지만 물은 고이면 썩는다고 했던가? 능력으로 채용된 양반들이,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의 신분제도를 변화시킨다. 바로 ‘양천제’다. 기존 ‘양천제’는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했다면, 저놈의 양반들이 만들어낸 신분제도 ‘반상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한다. 가끔 사극에서 나오는 ‘반상의 법도가 지엄한데!’ 라고 외치는건, 그 양반놈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사회를 망가트리며 만든 자기들만의 법도인 것이다.



‘양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던 과거도, 양인이 아니라 ‘양반’만 가능하게끔 바꿔버렸다. 조선 초기에는 개천에서 용 나는게 드물지 않았다면, 어느순간부터 조선에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작금의 대한민국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백성이 신문고를 울리면 의금부 당직청이 사연을 접수해 왕에게 보고토록 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아무나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한양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억울한 사건을 고발해야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사헌부가 문제를 고발하도록 했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비로소 신문고를 울릴 수 있었다. (……) 신문고가 한양에 위치해 있어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사용하기 어려웠으며, 신문고를 울렸다 해도 약자의 처지에서 고발 내용을 제대로 입증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고발할 수 있는 내용도 조상을 위하거나, 남편을 위하는 일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p 045


 


백성의 고충을 듣기 위해 설치했다던 신문고, 그 신문고는 정말 백성의 소리를 들려주었을까? 정답은 ‘아니오’다. 실제로 신문고는 아무나 칠 수 없었다. 우선 신문고는 왕이 사는 궁에 있다. 그 어떤 (양반이 아닌)백성이 궁을 지키는 수문장을 다 물리치고, 궁으로 들어와 신문고를 칠 수 있었을까? 왕이 없는 저 먼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백성들은 신문고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신문고가 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나에게 신문고를 꼭 쳐야할 사연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신문고를 바로 칠 수 없다. 신문고를 치기 전 거치는 단계가 한 두 단계가 아니다. 심지어 그 사연이, 신문고를 쳐도 되는 사연에 해당되는지도 확인해야한다.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사연에 해당되는 것은 ‘유교국가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그 답이 나온다. 나라(왕)을 위하거나/ 부모(조상)을 위하거나/ 남편을 위할때. 만약 신문고를 치고 싶은 사연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그 여성의 사연이 위 세항목에 대한게 아니라면 택도 없다는 이야기다.



과연 누구를 위한 신문고였을까?



이쯤에서 현재 온라인에 존재하는 ‘국민신문고’를 생각해본다. 국민신문고는 정말 신문고 노릇을 하고 있는가? 조선시대의 그 신문고와 다를바가 없는 건 아닐까?



죽은자의 이야기(주자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후기


그나마 조선 초기는 봐줄만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무리 유교국가를 표방한다 한들, 우리가 아는 꽉 막힌 조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초기의 조선은 고려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여성에게도 나름대로의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게 바뀌어, 꽉 막혀버린 조선이 되어버린 시기가 있다. 9대왕 성종, 16대왕 인조다.


 


(조선 초기) 여성의 재혼도 가능했다. 태종은 배우자를 잃은 남녀가 재혼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며 다시는 이를 문제 삼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혼을 문제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성종은 <경국대전>에 재가하거나 절개를 못 지킨 여인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문과,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재가금지법을 만들었다. 이혼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요구할 수 없었고, 남성만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요구할 수 있었다. 이때 남성이 이혼사유로 내세운 근거는 칠거지악이었다. p 108



(성종 재위기)이 시기, 어우동과 간통한 양반들은 약한 처벌을 받거나 혐의 없음으로 풀려난 것과는 달리 어우동만 처형당한 것은 조선시대의 남녀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중에 상민과 천민에게만 죄를 물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115



조선 초기에는 여성을 천대시하지않았고, 무시하지않았다. 그렇다면 여성을 천대하는 문화는 언제시작되었을까? 바로 9대왕 성종때이다. 성종은 재위기에 여성의 재가금지법을 만들었다. 즉 남성은 재가를 해도 되나, 여성은 안된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성종과 인수대비는 여성의 존재의 가치를 ‘남편을 잘 섬기는 것’, ‘시부모를 공경할 것’, ‘자식을 바르게 키우는 것(과거급제)’에 한정시켰다. 이후부터 조선의 여성은 온갖 차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해방이후)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조선 후기 정계에는 산림지사, 임하지인 등으로 불리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각 당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많은 제자를 둔 스승을 산림이라 불렀는데, 이들 대부분은 국가로부터 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재야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들은 정치를 멀리하며 학문을 익혔으나, 순수한 학자는 아니었다. 산림이 붕당의 영수로 숭상받으며 많은 제자와 관리의 존경을 받는 만큼, 그들의 말 한마디는 정국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산림과 의견이 다르거나 산림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비난을 넘어 최악의 경우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다. (…) 효종은 북벌론을 시행하기 위해 산림 송시열, 송준길, 허목, 윤휴등을 중용하고 이들을 국정운영에 끌여들었다. 효종은 산림 송시열이 북벌론을 지지할 때는 탄력을 받아 전쟁을 준비했으나, 송시열이 반대하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를 알고 있는 숙종은 산림 송시열을 죽이는 강수를 두면서 산림보다 왕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p 218



때는 인조 재위기. 인조는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 머리를 숙였다. 인조와 그 신하들은 청나라에 졌으나, 진게 아니라는 정신승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친명사대주의와 ‘소중화’ 사상이다. 조선은 대(!)명나라를 이은 나라라는 뜻이다. 물론 명나라는 이미 청나라에 잡아먹히고 사라진 뒤다. 즉 조선은 오랑캐라 비웃던 청나라에 머리를 숙인 것에 대한 분노를,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계승한다는 것으로 정신승리로 승화한 것이다. 이 친명사대주의는 조선 후기에 아주 깊숙히 파고들었었다. 



조선 후기에 죽은 위정자들의 비문의 대부분은 ‘유명조선국’이라는 문자로 먼저 시작한다. 그 뜻은 대충 이렇다. ‘명나라의 신하 조선’ 또는 ‘명나라에 속한 조선’. 이미망해버린 명나라를 부르짓다 못해, 지들 무덤에 세우는 비석에까지 저렇게 새겼다. 뿐만 아니다. 숙종은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를 위한 제단 ‘대보단’을 설치했다. 청나라에 들키면 안되기에, 아주 깊고 깊은 곳이 설치했다. 대표적인 산림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제자들도 충북 괴산에 명나라를 위한 제단 ‘만동묘’를 설치했다. 이는 송시열의 유언이기도 했다.



정신승리로 시작한 친명사대주의와 소중화를 부르짖던 서인은 권력다툼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노론이 권력을 틀어쥐며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아우르는 부패하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세도정치가 일었고, 백성들은 무자비한 세금부담에 죽어나갔고, 그렇게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실의 그림자


조선의 위정자들은 안팎으로 조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만약 군주가 멀정했더라면, 조선의 부패가 이정도까지 심해지지는 않았을리라.


중종반정은 백성과 국가를 위한 반정은 아니었다. 연산군의 폭정에 위정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반정에 불과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개국공신이 55명이었던 것에 반해 중종반정에서 정국공신에 오른 사람은 117명이었다. 이외에도 3천 명 이상이 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 중에는 연산군에게 미녀를 바치며 나쁜짓을 일삼다가, 반정을 논의하는 자리에 술과 안주를 바쳤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된 구수영 등도 있었다. 그리하여 관직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공신에 책봉되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등 많은 재물을 하사받고 품계가 올랐다. 공신의 숫자가 많아진 만큼 백성들은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졌고 세금은 늘어났다. 결국 백성들은 연산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려운 삶을 계속 이어갔다. p 139


계유정난의 세조, 중종반정의 중종, 인조반정의 인조. 모두 전 왕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자들이다. 이들이 전 왕을 끌어내린 이유는 하나다. 바로 ‘권력’. 세조가 끌어내린 왕은 어린 조카 단종이었고, 중종이 끌어내린 왕은 폭군 연산군이었으며, 인조가 끌어내린 왕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끈 광해군이다. 어린 단종을 끌어내린 세조는 신권(이때는 훈구)에 휘둘리는 ‘첫’ 조선 왕실을 만든사람이며, 삼촌인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는 폐륜아 아비를 왕으로 추존하고(원종), 그릇된 권력욕으로 자기 아들을 죽였으며, 그릇된 판단으로 자기 백성들을 청나라 말발굽 아래에 떨어뜨렸고, 망해버린 명나라를 조선의 조상으로 만들어버린 사람이다.



물론 연산군은 그냥 폭군도 아닌, 자신의 향락을 위해 백성들의 터전까지 짖밟은 왕이므로 왕에서 쫒겨나야하는 사람이 맞다. 하지만 그런 연산군을 끌어내린 중종은 처음부터 힘이 없었고(심지어 신하들 손에 이끌려 왕이되었고), 수많은 반정공신에게 하사품을 주기 위해 연산군때와 다름없이 백성들을 피고름을 빨았다. 더군다나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는 권력욕과 함께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그들은 조선을 밝게 하는게 아닌, 더욱 어두운 길로 향하게 하였다.



정여립의 역모과 관련된 구체적 증언이나 물증 없이 3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자, 정여립이 진짜 역모를 꾀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당시 사전을 맡았던 정철이 선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옥사를 확대했다는 주장, 서얼 출신인 서인 송익필이 양반의 신분을 갖기 위해 정철을 조종했다는 주장, 선조가 붕당의 갈등을 중재하며 왕관을 강화하려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p 185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나라를 버린 자신과 달리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며 백성들에게 조선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자신의 과오를 감추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이 되어야 했다. 그 해결책으로 명나라 군대를 치켜세우고 조선의 관군과 의병을 평가절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p 202



‘조’가 ‘종’보다 좋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광해군 때였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조선시대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이었다. 더욱이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에서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광해군 자신도 서자로서 왕위에 올라 정통성이 약했던 만큼, 아버지 선조의 묘호를 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선종이라 붙여질 묘호를 선조로 바꾸었다. p 155



선조는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뭐부터 써야할지 난감한 왕이다. 분명 하성군 시절에는 나름대로 총명했던 것 같은데, 최초의 ‘방계 출신’이라는 신분 콤플렉스가 조선을 전란에 빠트릴정도로, 인재를 보는 눈을 가릴 정도로 컸던 것인가. 음.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포스팅에서 조미료 곁들이듯 썼던게 워낙 많아서 그냥 패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오백년이나 버틴 이유는...


세종은 결혼과 출산에 관한 복지제도도 마련해 운영했다. 가난해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은 친족이 돕도록 하고, 이마저도 어려운 사람에게는 관청에서 곡식을 지급해 결혼할 수 있게 했다. 출산에 있어서도 관청의 여종이 임신하면 출산 한 달 전부터 일을 쉬게 하고,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었다.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 산모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 여성이 세쌍둥이를 낳으면 1년 치에 해당하는 쌀과 콩을 지급하며 출산을 장려했다. p 075



이렇게 가뭄에 콩나듯 백성을 위하는 군주가 나왔기 때문에, 혹은 대동법 같은 백성을 위한 정책이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들이 위하는 백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정말 온전히 백성을 위한 정책인지는 차치하고. 너무 긍정적인 생각인가..? (개인적으로는 부패할대로 부패한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해선 나라가 계속 이어져야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딱 너무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하게 조선을 끌고 나간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생각? 그나마도 조선 말기까지 가면 그 적당히조차 못한 부패관리들로 인해 나라가 아예 사라졌지만) 



여튼, 간만에 괜찮은 조선사 책을 읽었다. 만족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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