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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정선임 외 지음 / 해냄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는 중앙신인문학상, 민음사 신인상,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함께 모여 쓴 단편 소설집이다. 네 명의 작가 정선임, 김봄, 김의경, 최정나 씨가 뭉쳐 새로운 꽃다발을 엮어낸 소설집으로 '나와 이방'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묶여 있다.
소설의 배경은 포르투갈 리스본, 인도 벵갈루루, 태국 방콕, 사이판 등 모두 해외의 여행지이다. 우리에게 낯선 곳도 있고 상대적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여행지도 섞여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이 낯선 곳을 방문해 어떻게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가는지 지켜볼 수 있다. 동시에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았던 곳이 가깝게 느껴지며, 낯선 이국 땅의 정취를 한가득 느낄 수 있다.
첫 번재 소설은 정선임 작가의 <해저로월>이다. '해저로월'이란 海底捞月 한자성어로 말 그대로 풀면 '바다에서 달 건지기'이다. 되지도 않을 일을 헛수고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는 마작에서 플레이어가 마지막에 들어온 패로 조합이 완성되어 승리했을 때를 뜻하는데 그만큼 희박한 확률의 기적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 수정은 어쩌다 보니 스페인에 눌러 앉아 꽃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실연과 실직을 겪고 훌쩍 외국으로 떠나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극적인 변신에 성공하거나 잃어버리는 자아를 찾았다. 그러나 수정은 기대와 달리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친구들의 삶을 SNS로 기웃거리다 초조해할 뿐이다. 조금도 달라진 것은 없고 현실이 코 앞으로 다가온 느낌, 어쩜 이렇게 현실 30대의 삶과 마음을 잘 표현했는지 소설 속 이야기가 신기하게 다가온다.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백수인 신세, 며칠이라도 일을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가 보지 못했던 스페인 근교를 여행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갈팡질팡 하던 차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수정의 엄마도 아니고 아빠였다.
"고모랑 같이 오렴."
뜬금없는 고모 타령에 수정은 당황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정의 고모는 서른이 되던 해, 40일 동안 여행을 가겠다고 집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는 가족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왔다고 한다. 고모를 만난 것은 딱 한번, 할머니의 임종 후 발인이 끝나고서야 도착했다. 삼우제까지 함께 지내다가 다시 떠난 고모는 소문으로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5년 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당시 유행병때문에 유해를 운구해 오지 못했다.
"귀국할 때 들러서 오렴. 여비는 따로 보내주마."
귀국하기 전에 포르투갈 어딘가 고모가 묻힌 곳에 들러서, 이장할 때 가족 대표로 참석해 고모의 유골함과 함께 돌아오라는 이야기였다. 이걸 심부름값을 줄 테니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로 소주 한 병 사오라고 할 때처럼 말하는 아빠, 그러나 수정은 한 푼이 아쉬웠던 차였기 때문에 '여비'라는 말이 반가워 수락했다. 그리고 아무 계획 없이 고모의 유골함을 찾아 떠나게 된 여행. 수정은 거의 알지도 못하는 고모를 찾아 도착한 곳에서 그의 삶이 남긴 흔적과 조우한다.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는 김봄 작가의 소설로 장폴 사르트르의 『말』로 시작된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자는 포르투갈에서의 여운을 마무리하고 다시 인도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방콕의 송끄란 축제로, 다시 사이판 해안가로 아름다운 세계의 여행지로 주인공들과 함께 떠나 '나와 타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각자의 섬세한 문체로, 현대의 작가들이 열심히 힘내준 덕분에 우리가 또는 우리 주변인들이 직접 겪은 것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