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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29초-스릴러 소설 추천
2017년 할리우드는 거물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으로 떠들석했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하여 30여 년 전부터 여자들에게 성폭력을 행사하였다. 많은 이들은 하비 와인스틴을 비호해 준 사람들을 비난했으며,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성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이 사건은 할리우드 미투 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스릴러 소설 <29초>는 하비 와인스틴 같은 자가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겁박하고 희롱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그에 앞서 이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최근 읽은 스릴러 소설 중에서 이 소설을 1위로 꼽을 정도로 이 소설은 흥미롭고 긴박하고 사람을 압도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이 소설은 너무나 완벽한 구조에, 완벽한 스릴러라서 T. M. 로건이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리얼 라이즈>도 찾아 읽고 싶을 정도이다.
처음 <29초>를 펼쳤을 때는 '악마와의 거래'라는 첫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나서 정교수를 지망하는 여자인 교수 세라가 뛰어난 인맥, 능력, 인지도를 가진 '앨런 러브록'에게 희롱을 당할 때에는 나도 모르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게 되었다. 그만큼 '앨런 러브록'이 세라를 어떻게 해 보기 위해 추근덕거리는 상황이 실감났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참 뜨거웠던 '미투 운동'도 함께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소설도 최근 유행하는 '심리 스릴러'류인가 하고 실망했다. 핫한 장르이긴 하지만 내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은 심리 스릴러는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라는 앨런 러브록의 검은 손길을 피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대학 학장, 교직원, 언론 등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의 추근덕거림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동료와 그의 성폭행을 피하기 위해 작전을 짜도 세라는 그의 손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심지어 과거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으며 앨런 러브록을 고발하기 위해 싸웠던 여성이 대학은 물론 학계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작은 투지는 불타올랐다가도 거센 물길에 금방 꺼져버리고 만다. '피하고 순응하자. 딱 이 순간만 참으면 지나갈 것이다.'를 되뇌이며 앨런 러브록의 성희롱을 소심하게 피할 뿐이다. 앨런 러브록은 정말 화가 날 정도로 세라를 손쉽게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습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와 소름이 끼쳤다. 위력관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가 어떤 수순을 밟는지, 그들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29초>는 직접적으로 사회고발을 하는 계몽소설이 아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작품성'과 '소설만이 가진 힘'으로 피해자들의 상황을 그려내었다.
<29초>는 스릴러 소설로서도 정말 훌륭하다. 심리 스릴러일지도 모르겠다는 이 실망감을 '세라'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돌발적인 상황'으로 순식간에 뒤바꾼다. 세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딸 또래의 아이가 납치를 당할 뻔한 것을 구해준 것이다. 그 아이는 바로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이 분명한 러시아인 볼고프의 딸이었다. 볼고프는 세라에게 자신의 딸을 구해준 보답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바로 세라가 말하는 "인생에서 삭제하고 싶은 이름 하나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삭제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세라는 그 자리에서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만, 볼코프는 그녀에게 일회용 전화기를 준다. 과연 세라는 볼코프를 이용하여 '앨런 러브록'을 그녀의 세계에서 퇴출시킬 것인가? 볼코프는 정말 세라를 위해 앨런 러브록을 사라지게 해 줄 수 있을까? 앨런 러브록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세라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을 기대하든, <29초>는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재미있는 시간을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