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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ㅣ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8
허먼 멜빌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9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뷰]허먼 멜빌 모비딕-세계명작소설 축역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듯이 책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 어떤 책들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꾸 손에 들어온다. 마치 나와 만날 약속을 정해놓고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눈에 자꾸 띄기는 한데 이상할만큼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모비딕>이 나에겐 그런 작품이었다. 여기저기 짤막하게 줄거리나 의미심장한 문구, 책의 일부분을 볼 기회는 많았는데 책 자체를 읽은 적은 없었다. 언젠가 꼭 읽어보겠다고 마음 먹은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살림 출판사에서 '생각하는 힘 세계문학컬렉션'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작들의 축약본을 일리아스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출간하고 있는데 이번에 38번째 책으로 <모비딕>이 나왔다.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계획이라고 한다. 처음엔 축역본이 무슨 말인지 몰라 사전도 찾아보고 검색도 해 봤는데,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영어 의미와 뉴스에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축약한 번역본이되 최대한 그 의미와 중요한 부분을 살린 것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축역본을 읽는 게 더 좋은지 아니면 완역본을 읽는 게 더 좋은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지만, 읽지 않는 것보다는 축역본을 통해 작품들을 알아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모비딕>은 워낙 유명하여 검색만 하면 줄거리는 금방 나오고 갖가지 2차, 3차 창작물이 많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각들 말고 처음부터 읽는 모비딕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우선 모비딕을 지은 작가 허먼 멜빌의 일생이 정말 흥미로웠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의 행동과 대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작가 본인이 항해 생활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오는 고래 '모비딕'도 실제 모델이 있다고 한다. 모비딕이라는 소설이 나온 이후 향유고래가 잡혔는데, 소설에 나오는 고래와 유사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의 서술자인 이슈마엘이 낯선 항에서 절친한 친우를 사귀는 과정도 신기하다. '고래의 물기둥'이라는 여인숙에서 싼 숙소를 찾다가 주인장의 권유로 어느 작살잡이와 같은 방을 쓰게 된다. 그는 박제한 뉴질랜드 원주민 머리를 여러 개 사와 사람들에게 팔고 다니는 기괴한 사람이었다. 이슈마엘은 처음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의 이상한 문신과 생김새에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슈마엘은 겉이 번지르르한 기독교인보다 이 작살잡이 식인종이 더 정칙하고 착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퀴퀘그는 거짓을 일삼지 않는 의리있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순식간에 형제의 연을 맺는다. 이 외에 나오는 캐릭터들 또한 모두 인상깊다. 스타벅스가 이름을 따온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쉽게 흥분하지 않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는 용기는 무모하게 위험한 상황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에이해브는 고래 모비딕을 향한 불굴의 집념을 가진 선장으로, 고래를 잡아 수익을 올리는 것보다 모비딕을 잡아야 한다는 인생목표가 우선이다. 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비록 그를 죽음으로 내몰지라도, 그는 끝까지 고래를 쫓는다.
이 외에도 갖가지 특성을 가진 선원들이 등장한다. 이들 모두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단상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에이해브처럼 잡히지 않는 목표를 향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고, 어떤 이는 스타벅처럼 상황을 판단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슈마엘처럼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난다. 모비딕은 바다 위라는 공간에서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을 취하는지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명작으로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