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리뷰]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사전을 만드는 사람들
나는 단어를 사랑한다.
아름다운 표현을 좋아하고, 투박한 느낌이 담긴 사투리를 일부러 알아두기도 하며, 입에 돌돌 굴러가는 예쁜 발음의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어릴 때 뒹굴거리다 시간이 남으면 책장에 꽂힌 국어사전을 정독하며 내가 모르는 예쁘고 특이한 단어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게 일이었다. 이런 습관 덕분에 수능 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단어를 많이 아는 덕을 좀 보았다. 어느 시대의 시나 소설을 보아도 어지간한 뜻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엔가는 외국의 유명 소설가가 책을 쓰기 위해 단어카드를 만든다는 다큐를 보고는 나만의 단어카드를 만드려고 시도했으며, 커서 돈이 넉넉해지자 고어사전, 우리말 사전, 유래 등 갖가지 단어 사전들을 모았다. 물론 적당한 크기의 한국어대사전 가죽판도 꽂혀있다. 덕분에 내 방에는 다른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전이 여러 버전으로 여러 개 꽂혀 있다.
이런 내가 사전을 만드는 책에 대한 정보를 봤을 때, 귀가 쫑긋 서는 것은 당연지사. 20년째 언어와 연애 중이며 단어를 체에 거르고, 분류하고, 기술하고 배열한다는 저자의 책은 반드시 봐야할 책 목록이었다. 단어를 사랑하지만서도 사전 편찬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나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단어를 사랑했던 저자는 단어와 더 가까워지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사전을 편찬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책을 꽤 읽은 후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자는 말 그대로 단어 중독자에 단어성애자인 반면에 나는 단어도 사랑하지만 그런 단어가 아름다운 유기체를 만들어 낸 것, 즉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의대 예과를 다니다가 유기 화학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된 저자가 고른 강의는 아이슬란드 계도 소설과 라틴어, 고대 노르웨이어, 중세 영어 등등. 이 심정을 백분 이해하는데,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세속적인 사람들이 별로 흥미가 없지만 의사나 공무원, 교사와 같은 안정적인 전공을 갖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면서 자신의 미래를 정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어쨌든 유기 화학의 뜨거운 맛을 보고 돌아가게 된 곳은 저자가 사랑해 마지 않는 단어들이 있는 곳이었다. 저자가 언급한 중세 영어와 라틴어, 아이슬란드어로 된 이런 저런 단어와 관계성, 유래 등은 최근에 봤던 HOLY SHIT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Nice에 음탕하다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나 STEW가 한때 매음굴을 뜻했다는 점은 정말 뜻밖이었고, 미국 최초의 사전을 편찬한 메리엄 웹스터 사옥의 풍경은 더더욱 뜻밖이었다.
힘써 단어의 어원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조사하는 일로 항상 바쁘며 척박한 땅에서 따분한 일을 계속하는 무해한 노역자
-새뮤얼 존슨의 '사전 편찬자'의 정의-
우리나라는 몰라도 서양의 사전편찬 출판사는 해리 포터나 중세 영화에 나오는 멋들어진 곳이라 생각했는데 뒤쪽에는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는 2층짜리 벽돌 건물에 단조로운 사무실이었다니.(혹시 영국 등 유럽의 사전 편찬 출판사는 다르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또한 해당 언어를 전공한 사람들이 주로 고용되는 줄 알았는데, 다양한 전공자가 고용된다는 것도 의외였다. (이 부분은 다양한 전문적인 단어까지 사전에 들어간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수긍이 되었다.) 그래도 단어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일 거라 상상한 것은 상당부분 맞았다. 매일 단어를 거르고 분류하고, 새로운 의미를 넣어야하는지 고민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중국집 메뉴판 crispy-pried rice를 보고도 어떻게 해석해야 맞는 건지 단어 도깨비가 머리를 두드리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사전을 편찬하는 흥미진진한 경험담을 듣는 것 외에도 온갖 단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을 얘기다하 보니 다양한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책 1 권에 들어가는 단어의 종류보다 훨씬 많은 단어들을(체감 상 3-4배는 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세어 보지는 않았다.) 볼 수 있다. 다의어지만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고 쓰는 단어들이나 영어 원서에서 봤지만 대충 의미를 추측하고 넘어간 teeny의 뜻이라든가 등의 영단어 뜻을 알게 되었으며, 국문법 뿐 아니라 영문법 또한 얼마나 골치아픈 일인지 알게 된다. 품사 구분은 아마 전 세계적으로 골칫거리가 아닌가 추측한다. 참고로 국문법은 품사와 함께 띄어쓰기와 발음법이 엄청난 문제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take를 손보는 데 한 달 가량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조용히 말하고 미소 지었다.
"저는 'run'을 수정했지요.
아홉 달이 걸렸습니다."
-본문 중에서-
사전 편찬은, 편집실에서 일하는 사람 전부와 인사하는 데 1달이 걸릴 만큼 소리 없는 사무실에서 일어나지만 그 안에서는 매우 치열한 싸움이 일어난다. 정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머리를 싸매고 나면 그 다음엔 예문을 무엇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거대한 일거리가 떨어진다. 사전을 애용하는 사람으로서 예문을 꼼꼼히 보는 편인데, 왜 어떤 예문은 완전하지 않고 잘려 있으며 왜 어떤 예문은 문학작품을 이용하고 어떤 예문은 그렇지 않은지 등등의 잡다한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참고로 작가들이 쓴 재미있는 이야기는 예문으로서 최악이라고 한다.)
사전 찾아보기 또는 사전 정독하기가 취미이고, 단어를 사랑하며, 이 단어의 정의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하다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통해 이 치열한 싸움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