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의 북한은 단순한 소련의 위성국가가 결코 아니었으니, 1945~46년에 광범위하게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기반한 연립정권으로부터 1947~48년에는 비교적 소련의 지배를 받는 정권을 거쳐, 그 후 1949년에는 중국과 중요한 연계를 갖는 정권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개 덕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두 공산주의 대국 사이에서 적절한 책략을 쓸 수 있었다. - P319

소련의 정책은 남한에 단독 정부 및 군대를 세우려는 계획을 밀어붙인 미국의 정책보다 임시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 P320

공산당 혹은 노동당은 사실 방대한 농민층에 사회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 당 기구는 출신계급에 상관없이 거의 누구든지 당원이 될 수 있는 개방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김일성의 지배를 따르는 대중을 끌어모았다. 이로 말미암아 빈농 대중이 당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 P320

해방 후 일년 동안은 민족주의자, 기독교도, 토착 천도교도 같은 비공산주의 정당과 단체가 많이 있었다. 김일성의 지도력은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의 ‘청우당’이라는 두 주요 정당에 대해 ‘통일전선’ 정책을 채택했다. (중략) 이 통일전선 정책은 이 정당들에게 어떤 실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 정책은 농민층에 뿌리내린 천도교와 도시, 특히 평양에서의 기독교 세력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이런 정당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명하달식 통제에 예속시켰다. - P322

북한은 곧 비좌익 정치적 반대파 모두를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제거했다. 통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두 비공산계 정당이 여전히 허용되었으나, 권력은 전혀 없었다. 그 의도는 남한 우익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대안적인 권력중심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일을 훨씬 더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조직의 월등한 우세와 반대파의 전반적인 약세 때문이었다. - P325

북한의 보안기구는 하나의 혁명적 사법기구이자 동시에 철저하고 종종 전체주의적인 통제·감시 체제였다. - P326

그들의 직무에는 기본적인 정치적 사유를 신봉하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할 만큼 전체주의적 사상통제 및 감시체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 정권은 대규모 비밀 조직망을 구축하여, 시민들의 충성심을 검사하는 한편 여론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지도부에게 제공할 수단으로서 풍문과 소문을 포함한 정치적 발언들을 보고하도록 했다. - P328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조국을 통일하려는 목표를 지녔다. 이승만과 달리 그는 1950년에 이르러서는 그 과업을 달성할 수단을 확보하였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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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2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케빈 패스모어의 <Fascism>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전면적으로 다시 쓰기로 생각한 것은 초판에서 제시한 파시즘의 정의는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여러 이론을 종합하여 파시즘에 대한 나은 정의를 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파시즘의 다양한 양상을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1‘A이면서 A가 아닌에서는 결국 파시즘을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편의적인 명칭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파시즘을 어떻게 논의하고 어떻게 이에 대항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시 활동가들에게 매우 실제적인 개념이었던 파시즘은 어떻게 해석했고, 그로부터 무엇을 차용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차용한 것들을 다른 사상 및 실천과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2파시즘 이전의 파시즘?’부터는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논의를 전개한다. 2장에서는 파시즘의 사상적 토양이 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상과 정치적 맥락을 볼 수 있다. 그 사상들은, 첫째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설계도에 따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 사상”, 둘째 낭만주의와 그 뒤를 이은 다양한 관념론적 사조와 같은 반이성적 사유 전통, 셋째, 조르주 소렐과 귀스타브 르 봉 유형의 군중심리”, 넷째 프리드리히 니체, 다섯째, 사회다윈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포함된다.

 

사회 정치적으로는 전문지식인에 대한 질시와 더불어 유대인과 여성의 전문직 진출에 대한 두려움을 거론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맥락은 바로 대중의 약진이었다. 엘리트 지배 사회에서 대중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여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곧 새로운 정치와 사상이 대중 정치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이상의 경향들은 급진적 우파에게서 발견되지만, 이것이 곧장 파시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급진적 우파와 파시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3장과 제4장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예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파시즘의 양상을 살펴본다. 유럽에서 파시즘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연한 사회적 불안과 관련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후 계속된 사회불안이 내셔널리스트들의 분노를 더욱 돋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대중운동을 이용하는 한편 역설적으로 더욱 권위주의적인 구체제 국가를 구축하고자 했다. 권위주의적 국가의 건설은 보수주의자, 이탈리아 내셔널리스트, 그리고 급진주의자 모두 선호했던 것으로, 서로 다른 극단적 정치체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파시즘아래 모였던 것이다. 이는 무솔리니가 총리가 된 이후의 일로, 만약 파시스트당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파시즘이 흥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1차 대전의 참혹함은 이탈리아보다 독일에 더 치명적이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붕괴는 독일 사회의 민주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많은 이들은 1920년대부터 이미 대중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옹호하고 있었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히틀러는 옥중에서 무솔리니의 선례를 연구하여 그의 성공 비결, 즉 선거와 협박의 결합을 간파했다.” 그와 나치는 보수정권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진정한 국민의 대변자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대중주의적 메시지는 한때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요, 더 폭넓은 대중에게 위력을 발휘하였다(히틀러가 탁월한 대중 연설가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그들은 독일의 모든 법치의 근간을 파괴했다. 이러면서 그들의 사상은 전체주의에 더 가까워져서 파시즘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20년대부터 이어졌던 히틀러의 사상은 되짚어볼 만하다. 히틀러는 감옥에 갇히던 중 저술한 <나의 투쟁>에서 “‘유대-볼셰비키러시아로부터 동유럽의 생활권을 쟁취하는 것이 독일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핵심 사상은 반유대주의와 같은 인종주의는 물론, 내셔널리즘, 사회다윈주의, 제국주의 등 19세기의 사상적 지류들이 모두 발견된다. 반유대주의와 생활권 확보라는 히틀러의 망상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관철되었으며, “독일군이 괴멸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점령지 수용소에 인원을 남겨두어 학살이 중단되지 않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부분을 자세히 다룬 책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다.

 

여기서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즘의 공통점을 잠깐 정리하자. 먼저 전 사회적 영역에 걸쳤던 불안을 양분 삼아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일은 경제적 불만이 매우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사상적으로 대중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옹호한 점이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 파시즘이란 대중연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셋째로 독재자의 등장이다. 이는 파시즘이 나오게 된 정치사적 맥락이 대중 정치의 제한임을 상기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이러한 파시즘의 양상을 가장 유사하게 보여주는 정치 집단이 바로 이범석과 족청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참조)

 

이렇게 전간기 파시즘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은 현대의 극우파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6재에서 되살아난 불사조?’에서 애국운동, 국민전선, 뉴라이트 등 현대의 네오-파시즘과 극우 운동을 분석한 결과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극단적 내셔널리즘과 소수 종족에 대한 차별, 반페미니즘, 반사회주의, 대중주의, 기성의 사회적정치적 엘리트 세력에 대한 반감, 반자본주의, 반의회주의등에서 현대의 극우 운동과 전간기 파시즘은 연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극우가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원인에는 세계화와 그로 인한 남서 노동자 실업률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부유층과 전문직 여성에 대한 반감, 반이슬람주의, 자국민우선주의 등으로 나타나며, 이때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도 함께 수반된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도 있다. 현대에는 준군사조직을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전복하기보다는 민주주의에 잠재된 차별의 가능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주류 정치의 장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점도 꼽았으나,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국민전선이 집권한 적이 있어 이는 빼겠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수결이나 인민주권쯤으로 좁게 정의하면, 민주주의는 배제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가들이 민주주의의 차별적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바로 혐오이다. 이것이 경제적 불안과 극단적 내셔널리즘과 자국민우선주의와 결합하면 커다란 시너지를 발휘하여 그때부터는 인종주의적 배제의 정치가 시작된다. 이러한 배제의 정치가 저자가 말한 대로 과거의 파시즘보다 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러 고민이 든다. 과연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정치를 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정치적 주체가 혐오와 배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화의 흐름과 자국민의 이해는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여기서 내 관심은 다시 외국인 노동자, 국제 이주민과 난민 문제로 이어진다. 이들이 실제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과연 이들과 자국민 사이에 조화를 이룰 부분은 없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병권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이 책의 한 단락을 인용해보겠다. “민주주의에서는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심지어 숫자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민주화 투쟁이란 그런 근거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거 없이, 자격이나 조건 없이, 우리와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들과 공동의 삶을 위한 교섭을 벌여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 원어로 민주주의는 근거 없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슨 근거인가? 바로 통치의 근거이다. , 민주주의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위에서 지배하고 군림할 합당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타인을 지배하거나 배제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다스림을 정당화할 자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논의를 확장하면, 결국 국적도, 다수성도, 다른 무엇도 타자를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이때 배제의 정치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세 번째 질문, '혐오와 배제의 문제''이주민 경제와 자국민우선주의 문제'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IVP), 폴 콜리어의 <엑소더스>(21세기북스)를 다시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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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2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유서가 시리즈 나란히 꽂힌 걸 흐뭇하게 보면서도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번역물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늘 치열하게 공부하시는 모습!!!

Redman 2021-04-30 05:16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ㅋㅋ 저도 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첫 단추 시리즈로 말고도 번역된 게 있는 것 같더군요
 


한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족분단과 남북대립이 형성된 시련의 시기는 1943~53년 사이였다. 한국의 현대정치는 다음 두 장에서 살펴볼 이 10년간의 사건들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두 개의 한국, 파멸적인 전쟁,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 재편은 여기서 생성되었다. 미국은 이런 사건들에서 주된 역할을, 여러 면에서 열강들 가운데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나 그 시기의 많은 역사책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1950년에 일어난 전쟁 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 P261

8월 8일에 한국에서 일본과 싸우기 시작한 소련이야말로 미국인들이 남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했다. 미국은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을 결성한 망명 민족주의자 집단과 국내의 일부 보수 정치인들을 정치적으로 선호했다. 1948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양쪽 편으로 갈렸고 워싱턴과 모스끄바가 그런 양자택일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은 해방 후 몇 개월만에 사실상 분단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중략) 우리가 냉전에서 연상하는 모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 그런 분단들은 전지구적 냉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일찍 한국에 찾아왔으며, 다른 모든 곳에서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있다. - P262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의 존 머클로이(John J. McCloy)는 딘 러스크와 찰즈 본스틸이라는 두 젊은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한국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이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전선의 전지역에 걸쳐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몰려오고 있던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이었다. 주어진 30분 안에 러스크와 본스틸은 지도를 보고 38도선을 선택했다. 그것은 38도선이 "수도를 미국의 영역 안에 둘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 P263

프랭클린 로우즈벨트 대통령은 적국 보유의 식민지 처리에 고심했으며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식민지로 하여금 자치와 독립을 준비토록 하는 점진적인 신탁통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한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이 전후 한국의 운명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다국적 통치에 참여시킴으로써 일방적인 해결책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조항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P264

이런 혼란의 많은 부분은 토지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었으니, 보수적인 지주들이 자신들의 관료제 권력을 이용해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물론 북한은 이 불만을 이용하려 했지만, 명백한 내부 증거를 보면 거의 모든 반대자들과 유격대들은 남쪽의 정책에 화가 난 남쪽 사람들이었다. - P270

1947년 말에 하지는 그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미국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포착했다. 미국은 장점이라고는 반공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토착좌익들을 반대하는, 불운한 두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들어설 토대가 전혀 없는 자유주의적인 결과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P272

발전하고 있는 남한체제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는 거의 전적으로 좌익의 몫이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의 정책들로 인해서 한국에는 중산층이 극소수였기 때문이었다. 1945~50년 사이 대규모 민중저항을 계기로 농민의 미숙한 항의는 조직된 노조활동과 마침내는 무장 유격대의 저항과 합쳐지게 되었다. - P285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eyer) 장군은 1947년 말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거의 똑같은 징후를 보고했다. 한민당은 "군정의 대다수 행정관리들의 적극적인 당원활동이나 암묵적인 협조"를 받았다고 그는 썼다. 그 당은 남서부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김성수와 그의 뗄 수 없는 동료이자 한민당의 "주도적인 지식인"인 장덕수가 주도한 "지주집단"의 당이었다. (중략) 웨이드마이어는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돌아선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일 협력자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명한 문인인 정인보는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이북의 술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반일애국의 기억 때문에 사람들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 P287

애치슨은 국무장관 대행으로 행한 1947년 초 의회의 비밀중언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미 분할선을 그었으며,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는 ‘트루먼 독트린’의 모델에 따라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주요한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봉쇄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 즉 소련의 주변에 자족적이고 생존가능한 정권을 배치하는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는 두 동강이 난 한국경제가-일본을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페르시아만의 석유와 연결하는-"거대한 초승달"의 일부로서 일본의 복구에 여전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회와 국방부는 한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껴렸다. 그래서 애치슨과 그의 고문들은 한국을 집단안보체제를 통해 재배치하고 봉쇄하려고 그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워싱턴이 마침내 한국 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점령 정부로부터 환수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인 1947년 초였다. - P296

이런 반공체제가 형성된 이래 미국이 그것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거기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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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중국과 정식 국교를 맺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설명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오히려 중국이 개별 책봉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책봉국 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 P122

청조가 책봉국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가경대청회전>이 편찬된 무렵에 반봉(頒封)한 조선, 월남, 류큐 세 나라에 가까스로 타이를 첨가하여 총 4개국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타이는 다른 3개 책봉국과는 위상이 다른 나라로 보고 있었다. - P127

동아시아 4개국의 국제관계는 전체 책봉국(조선, 월남, 류큐) 혹은 기껏해야 4개국(조선, 월남, 류큐, 타이) 중 2개국(조선, 류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서는 극히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 P127

명조의 류큐에 대한 외교정책은 같은 책봉관계에 있던 조선과는 확연히 다르게 냉담했다는 것이다. 류큐가 일본에게 침략당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명조 사람들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책봉국이 위기존망의 기로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조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 P135

1610년의 경우와 달리 1612년이 되자 명조 당국자들은 류큐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류큐가 2백 년에 걸친 공순한 조공국이자 책봉국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당국자들은 역설적으로 류큐가 ‘평상시의 공순한 뜻이 아닌 면’을 보였기 때문에, 즉 일본에 조정당해 거짓 입공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류큐와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41

왜 명이 류큐의 공물을 거절하지 못했는가 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배후에 있는 일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예부의 제안 가운데, 공물을 거절하면 ‘저쪽에 구실을 주게 된다.’라는 말은 이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P141

입공을 종래같이 회복하지 않으면 자신은 명조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일본에 완전히 붙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공순한 조공국/책봉국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례이며, 명조 측으로부터 국교를 단절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조는 이때에도 이를 꾸짖은 일도, 사신을 돌려보내는 일도 없었고, 공물조차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명조는 조공관계를 끊고 단교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국교조차 성립되어 있지 않은 일본의 움직임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 P146

실제로는 일본의 입공임에도 류큐의 입공이라고 바꾸어 적고,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조공, 우리는 이를 ‘허구의 조공’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 P146

배후에 일본이 있기 때문이야말로 류큐와 조공관계/책봉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지금까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이탈해 있었기’ 때문이야말로 이들 논자들이 말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존속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 중국 측은 사실을 계속 모르는 척하든지, 그 사실을 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 P147

일본과 중국이 외교적으로 두절 관계에 있으면서 류큐를 매개로 구조상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조선-류큐 관계에도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양국의 외교가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류큐가 1609년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 조선과 류큐는 명조로부터 함께 책봉을 받는 나라로서 서로 자문을 교환하는 관계였다. - P147

조선 측은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놓인 것을 알았지만, 류큐와는 이전과 전혀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명조가 류큐와 절교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선 측도 류큐가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 되었던 것이다. - P148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기 조선이 류큐에 자문을 보낼 수 없었던 이유는 배후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명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1698년(강희 37)에 류큐가 조선 표류민을 복주-북경을 경유해 송환해주기 전까지, 류큐-사쓰마-나가사키-쓰시마-조선 동래부라는 일본 경로를 송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선은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4

일본과 류큐가 같은 명조의 책봉국이었을 때에는 양국을 함께 교린국이라 규정하고 통신관계를 맺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609년 이후, 류큐는 일본에 합병되어버렸다. 더욱이 1636년까지는 일본과 정식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도 명과 마찬가지로 류큐의 실정을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1636년에 일본과 통신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처럼 국제구조가 변해버렸을 때,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면서 류큐와도 통신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 P157

청대에 들어 조선과 류큐가 북경에서 자문 교환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청조의 문제, 즉 만주족이 통치하는 국가였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이 당시 동아시아 4국의 국제구조에서, 그것을 성립시키는 데 불가결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계속 두절했던 데 반해, 조선은 일본과 통신관계라고 하는 국교를 회복했다. 이에 양국의 대류큐 외교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고, 조선과 류큐와의 국교도 두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161

중국의 외교관이나 고증학자들이 류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것을 공언하거나 그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중국 청조 황제는 순치제 이후 지금까지 류큐는 일본에 신속해 있지 않은 것으로 조공을 받아왔고 책봉해왔으며, 건륭제는 류큐를 중국의 하나의 성으로 동일하게 간주하며 지방지까지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공언하는 것은 황제의 얼굴에 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둘째, 중국·일본·류큐·조선의 4개국은 각각 외교적으로 책봉, 통신, 그리고 두절이라는 다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안정된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의 공언은 조금의 이익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불경심을 드러내고 질서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 P167

조선 북학파 지식인들은 류큐의 국제적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모두 알고 있었다. 류큐는 1609년 일본에 의한 ‘합병’ 이후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그럼에도 이를 중국과 조선에 숨겨오면서 공순한 조공국인 것처럼 행동하며 북경에 사절을 계속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 엄숙이 보인 류큐에 대한 철저한 멸시는 결코 그만의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 P195

그들의 멸시나 신랄함은 류큐가 일본의 속국이면서 이를 속이고 계속해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명료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 - P196

이맹휴나 홍대용처럼 최고 수준의 조선 지식인들도 현재 조선과 류큐 사이에 국교가 없는 이유를 해석하지 못했다. 또는 일찍이 류큐 왕자를 제주도에서 살해했다는 전설을 유일한 해답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원뿐만 아니라 홍대용, 이맹휴도 이 전설을 의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들 모두 이것을 대신할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 P196

이 전설은 조선과 류큐 사이에 국교가 없어진 원인이 일본이라는 존재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류큐 왕자 살해사건이라는 전설은 어떤 원한도 없는 양국이 어째서 국교를 단절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 P197

중국은 조선 그리고 일본에 대해, 일본은 중국에 대해 4개국이 각각 ‘모르는 일’이라고 암묵적으로 은폐함으로써 동아시아 4개국 사이의 국제질서는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199

청조는 조공을 기반으로 국제관계를 맺는 것을 여전히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중국에 입각해서 본다면, 확실히 거기에는 이른바 조공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어지고 있었고, (중략) 중국과 국교를 맺지 않은 일본이라는 존재를 포함한 새로운 국제질서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조선과 류큐와의 사이에 국교가 없는 이유를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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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까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 P108

시간체제에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담론뿐 아니라 장기적인 역사인식의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식민지 체제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국사 속에 식민지의 역사를 포함시켜 변형시킨다. 또한 국가권력에 의한 시간적 주기에 대한 특별한 의미부여로서의 기념일 제도가 포함된다. - P110

시간관념의 근대화에는 력의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봉건시대에 력은 하늘이나 신을 대신하여 세속적인 최고권력이 사람들에게 우주의 운행원리를 알려주는 것, 조선시대에도 력은 왕실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지배질서의 정당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 P112

조선총독부는 력을 독점관리하고 통제했다. 이에 대응하여 상해 임정에서는 발족과 더불어 독자적인 민력을 작성하여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배부하였고, 일제 영사관이나 경찰은 이를 철저히 단속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상해임정은 ‘대한민국 4년중 음력세차 임술년 월표 급 절후표’를 단도에 배포하였고, 일본의 간도총영사는 이를 단속하여 외무성에 보고하였다. - P112

력의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양력과 음력의 문제였다. - P112

설이 이중과세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추석은 민족의 명절로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민족을 지켜가는 의례적 장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략) 단오는 민속적인 행사를 했지만, 점차 각 지역에서 근대적 의미의 운동회를 개최함으로써 봄 운동회날로 그 의미가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어떤 경우에는 6월 10일 시의 기념일과 단오가 겹치기도 하였다. - P115

국가의 근대적 시간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가 표준시의 문제이다. 조선에서 표준시의 문제는 한두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 1912년 도쿄를 지나는 선을 표준으로 한 이래 일제 지배 기간 내내 그대로 관철되었고, 1950년대에 서울을 지나는 선으로 바뀌었다가, 1960년대에 다시 환원되었다. - P116

일제하에서 이루어진 시간관념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시의 기념일’ 제도가 존재한다. 일제하에서 매년 6월 10일은 ‘시의 기념일’로 조선총독부와 지방관청은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시간에 관한 계몽사업을 1921년부터 실시하였다. - P117

‘시의 기념일’은 시계의 기계적 원리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시계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시계는 점차 근대인의 중요한 필수품이 되었고, 장식된 시계는 의례의 중요한 예물이 되었다. 또한 시계는 자본주의적 시장개척의 현상 선물로 자주 이용되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일본의 시계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 P118

시의 기념일의 핵심적인 구호는 ‘시간존중’과 ‘정시여행’이었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지키자’, ‘시계를 바르게 맞추어라’ 등이 시의 기념일의 세 가지 축을 나타내는 대중적 표어였다. 이는 곧 식민지 국가권력에 의한 근대적 시간 캠페인을 주도하고 시계산업에 종사한 상인들에 의해 뒷받침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계 상인들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 P119

근대적 시계가 들어오고 시간관념이 형성될 때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의 그림이나 상징이 12시간, 또는 24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의 공간적 도형에 접합되었다. 자정이나 정오, 오전과 오후라는 용어는 모두 쥐나 말과 같은 12간지의 동물로부터 연원하였는데, 이 용어의 기원이 언제 어디서부터 사용되었는지 불분명하다. - P122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38년부터는 시의 기념일에 경성부에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황궁요배 및 ‘무운장구’를 비는 1분간의 묵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능률증진이 시의 기념일의 구호에 덧붙여지기 시작하였고, 근로봉사라는 이름의 동원이 강화되고 있었으며, 양력실행운동을 강화하였다. - P122

조선민족이나 구황실의 기념일이 아니라 일본의 천황제와 관련된 경축일이 조선에서 그대로 시행되었다. (중략) 1927년 3월, 조선총독부는 칙령 25호로 ‘제일 및 축일,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국가경축일과 공휴일이 명백히 연관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념일의 의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명치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가 ‘절’로 전환되었다. 육군기념일, 해군기념일 등이 경축일에 추가되거나 기존의 경축일을 일부 대체하였다. 육군기념일에는 조선군이 용산 일대에서 퍼레이드를 대대적으로 펼침으로써 시간으로서의 기념일을 공간적으로 가시화하였다. - P124

일제 지배하에서 중요한 기념일은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 등 일본의 왕실과 결부된 것이 많았다. (중략) 일제하 기념일에서 특이한 것은 군사 관련 기념일, 즉 육군기념일과 해군기념일이 매우 중요한 기념일로 지켜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125

군사 관련 기념일 외에 조선총독부는 매 5년마다 ‘시정기념일’ 행사를 성대하게 하여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종종 공진회나 박람회를 동반하여 자신들의 지배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작용하였다. 특히 30주년 기념행사는 동원체제와 맞물려 큰 규모로 행하였다. - P127

한편으로는 공식적 기념일과는 다른 대안적 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일종의 기억투쟁이 존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갖가지 형태의 습속적 저항이 존재하였다. - P127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사건 발발일은 일제의 명치절이었지만, 조선 학생들로 볼 때는 음력으로 개천절이었다. 양력과 음력, 일본 국가의 기념일과 조선 민족의 기념일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했던 것이다. - P128

식민지 권력이 부과하는 기념일에 대한 또 하나의 저항은 전통적 시간감각에 기초한 민중들의 습속이다. 습속적 저항은 주로 세시적 축일을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민족의 세시풍속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은 설과 단오, 추석이었는데, 단오와 추석이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진 반면 설은 끊임없이 식민지 권력 및 지식인 집단의 프로젝트가 민중적 습속에 부딪치는 장이었다. - P129

한국에서 ‘일상생활’은 1920년대에 역사적으로 성립한 개념이다. 1920년대 ‘생활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이 ‘표준’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고가 자리잡았고, 이것은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을 형성시켰다. 여기에는 ‘표준’을 내세워 계급적 양극화를 절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 P129

각종 계몽의 담론이 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였다면, 시간체제는 보다 심층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포괄한다. 근대적 시간체제의 식민화는 한편으로는 1910년대 초반의 국가 경축일의 일본화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 1920~30년대의 시의 기념일 제도를 통한 시간사용의 합리화 캠페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 P130

총동원 시간체제는 일주일 단위의 동원이 자주 발생하고 또한 의례의 정교화를 통한 행동적 정신적 동원을 강화한다. 이는 민중적 생활세계뿐 아니라 가장 자유가 널리 허용된 대학사회에서도 관철된다. 총동원체제는 노동을 늘리고 소비를 억제하면서 일상의 시간적 재조직화를 시도했지만, 동원에 필요한 각종 기념일과 의례의 강화를 낳으면서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 후의 식민지적 유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즉, 이 시기의 캠페인성 프로젝트들이 1960~70년대의 국가주도형 경제성장에서 재생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식민권력에 의해 조선민중에게 부과된 시간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민중들에게 의례를 통한 동원에의 익숙함과 반의례적 정서를 동시에 물려준 듯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생활양식이나 시간체제의 식민화 속에 대안적인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시간적 관념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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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15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부분부분, 유용해서 원작 클릭하니 품절이네요^^ 늘 공부하시고 나눠주시는 모습 보기도 좋고 감사드립니다

Redman 2021-04-15 17: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네 품절 도서인데 내용이 좋은 것들은 같이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ㅎㅎ 그래도 이전에 올린 <개발 없는 개발>은 아직 판매중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