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중국과 정식 국교를 맺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설명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오히려 중국이 개별 책봉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책봉국 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 P122
청조가 책봉국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가경대청회전>이 편찬된 무렵에 반봉(頒封)한 조선, 월남, 류큐 세 나라에 가까스로 타이를 첨가하여 총 4개국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타이는 다른 3개 책봉국과는 위상이 다른 나라로 보고 있었다. - P127
동아시아 4개국의 국제관계는 전체 책봉국(조선, 월남, 류큐) 혹은 기껏해야 4개국(조선, 월남, 류큐, 타이) 중 2개국(조선, 류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서는 극히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 P127
명조의 류큐에 대한 외교정책은 같은 책봉관계에 있던 조선과는 확연히 다르게 냉담했다는 것이다. 류큐가 일본에게 침략당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명조 사람들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책봉국이 위기존망의 기로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조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 P135
1610년의 경우와 달리 1612년이 되자 명조 당국자들은 류큐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류큐가 2백 년에 걸친 공순한 조공국이자 책봉국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당국자들은 역설적으로 류큐가 ‘평상시의 공순한 뜻이 아닌 면’을 보였기 때문에, 즉 일본에 조정당해 거짓 입공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류큐와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41
왜 명이 류큐의 공물을 거절하지 못했는가 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배후에 있는 일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예부의 제안 가운데, 공물을 거절하면 ‘저쪽에 구실을 주게 된다.’라는 말은 이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P141
입공을 종래같이 회복하지 않으면 자신은 명조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일본에 완전히 붙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공순한 조공국/책봉국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례이며, 명조 측으로부터 국교를 단절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조는 이때에도 이를 꾸짖은 일도, 사신을 돌려보내는 일도 없었고, 공물조차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명조는 조공관계를 끊고 단교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국교조차 성립되어 있지 않은 일본의 움직임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 P146
실제로는 일본의 입공임에도 류큐의 입공이라고 바꾸어 적고,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조공, 우리는 이를 ‘허구의 조공’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 P146
배후에 일본이 있기 때문이야말로 류큐와 조공관계/책봉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지금까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이탈해 있었기’ 때문이야말로 이들 논자들이 말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존속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 중국 측은 사실을 계속 모르는 척하든지, 그 사실을 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 P147
일본과 중국이 외교적으로 두절 관계에 있으면서 류큐를 매개로 구조상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조선-류큐 관계에도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양국의 외교가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류큐가 1609년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 조선과 류큐는 명조로부터 함께 책봉을 받는 나라로서 서로 자문을 교환하는 관계였다. - P147
조선 측은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놓인 것을 알았지만, 류큐와는 이전과 전혀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명조가 류큐와 절교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선 측도 류큐가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 되었던 것이다. - P148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기 조선이 류큐에 자문을 보낼 수 없었던 이유는 배후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명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1698년(강희 37)에 류큐가 조선 표류민을 복주-북경을 경유해 송환해주기 전까지, 류큐-사쓰마-나가사키-쓰시마-조선 동래부라는 일본 경로를 송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선은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4
일본과 류큐가 같은 명조의 책봉국이었을 때에는 양국을 함께 교린국이라 규정하고 통신관계를 맺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609년 이후, 류큐는 일본에 합병되어버렸다. 더욱이 1636년까지는 일본과 정식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도 명과 마찬가지로 류큐의 실정을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1636년에 일본과 통신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처럼 국제구조가 변해버렸을 때,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면서 류큐와도 통신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 P157
청대에 들어 조선과 류큐가 북경에서 자문 교환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청조의 문제, 즉 만주족이 통치하는 국가였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이 당시 동아시아 4국의 국제구조에서, 그것을 성립시키는 데 불가결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계속 두절했던 데 반해, 조선은 일본과 통신관계라고 하는 국교를 회복했다. 이에 양국의 대류큐 외교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고, 조선과 류큐와의 국교도 두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161
중국의 외교관이나 고증학자들이 류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것을 공언하거나 그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중국 청조 황제는 순치제 이후 지금까지 류큐는 일본에 신속해 있지 않은 것으로 조공을 받아왔고 책봉해왔으며, 건륭제는 류큐를 중국의 하나의 성으로 동일하게 간주하며 지방지까지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공언하는 것은 황제의 얼굴에 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둘째, 중국·일본·류큐·조선의 4개국은 각각 외교적으로 책봉, 통신, 그리고 두절이라는 다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안정된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의 공언은 조금의 이익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불경심을 드러내고 질서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 P167
조선 북학파 지식인들은 류큐의 국제적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모두 알고 있었다. 류큐는 1609년 일본에 의한 ‘합병’ 이후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그럼에도 이를 중국과 조선에 숨겨오면서 공순한 조공국인 것처럼 행동하며 북경에 사절을 계속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 엄숙이 보인 류큐에 대한 철저한 멸시는 결코 그만의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 P195
그들의 멸시나 신랄함은 류큐가 일본의 속국이면서 이를 속이고 계속해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명료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 - P196
이맹휴나 홍대용처럼 최고 수준의 조선 지식인들도 현재 조선과 류큐 사이에 국교가 없는 이유를 해석하지 못했다. 또는 일찍이 류큐 왕자를 제주도에서 살해했다는 전설을 유일한 해답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원뿐만 아니라 홍대용, 이맹휴도 이 전설을 의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들 모두 이것을 대신할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 P196
이 전설은 조선과 류큐 사이에 국교가 없어진 원인이 일본이라는 존재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류큐 왕자 살해사건이라는 전설은 어떤 원한도 없는 양국이 어째서 국교를 단절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 P197
중국은 조선 그리고 일본에 대해, 일본은 중국에 대해 4개국이 각각 ‘모르는 일’이라고 암묵적으로 은폐함으로써 동아시아 4개국 사이의 국제질서는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199
청조는 조공을 기반으로 국제관계를 맺는 것을 여전히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중국에 입각해서 본다면, 확실히 거기에는 이른바 조공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어지고 있었고, (중략) 중국과 국교를 맺지 않은 일본이라는 존재를 포함한 새로운 국제질서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조선과 류큐와의 사이에 국교가 없는 이유를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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