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족분단과 남북대립이 형성된 시련의 시기는 1943~53년 사이였다. 한국의 현대정치는 다음 두 장에서 살펴볼 이 10년간의 사건들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두 개의 한국, 파멸적인 전쟁,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 재편은 여기서 생성되었다. 미국은 이런 사건들에서 주된 역할을, 여러 면에서 열강들 가운데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나 그 시기의 많은 역사책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1950년에 일어난 전쟁 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 P261
8월 8일에 한국에서 일본과 싸우기 시작한 소련이야말로 미국인들이 남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했다. 미국은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을 결성한 망명 민족주의자 집단과 국내의 일부 보수 정치인들을 정치적으로 선호했다. 1948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양쪽 편으로 갈렸고 워싱턴과 모스끄바가 그런 양자택일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은 해방 후 몇 개월만에 사실상 분단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중략) 우리가 냉전에서 연상하는 모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 그런 분단들은 전지구적 냉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일찍 한국에 찾아왔으며, 다른 모든 곳에서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있다. - P262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의 존 머클로이(John J. McCloy)는 딘 러스크와 찰즈 본스틸이라는 두 젊은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한국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이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전선의 전지역에 걸쳐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몰려오고 있던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이었다. 주어진 30분 안에 러스크와 본스틸은 지도를 보고 38도선을 선택했다. 그것은 38도선이 "수도를 미국의 영역 안에 둘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 P263
프랭클린 로우즈벨트 대통령은 적국 보유의 식민지 처리에 고심했으며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식민지로 하여금 자치와 독립을 준비토록 하는 점진적인 신탁통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한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이 전후 한국의 운명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다국적 통치에 참여시킴으로써 일방적인 해결책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조항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P264
이런 혼란의 많은 부분은 토지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었으니, 보수적인 지주들이 자신들의 관료제 권력을 이용해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물론 북한은 이 불만을 이용하려 했지만, 명백한 내부 증거를 보면 거의 모든 반대자들과 유격대들은 남쪽의 정책에 화가 난 남쪽 사람들이었다. - P270
1947년 말에 하지는 그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미국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포착했다. 미국은 장점이라고는 반공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토착좌익들을 반대하는, 불운한 두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들어설 토대가 전혀 없는 자유주의적인 결과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P272
발전하고 있는 남한체제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는 거의 전적으로 좌익의 몫이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의 정책들로 인해서 한국에는 중산층이 극소수였기 때문이었다. 1945~50년 사이 대규모 민중저항을 계기로 농민의 미숙한 항의는 조직된 노조활동과 마침내는 무장 유격대의 저항과 합쳐지게 되었다. - P285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eyer) 장군은 1947년 말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거의 똑같은 징후를 보고했다. 한민당은 "군정의 대다수 행정관리들의 적극적인 당원활동이나 암묵적인 협조"를 받았다고 그는 썼다. 그 당은 남서부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김성수와 그의 뗄 수 없는 동료이자 한민당의 "주도적인 지식인"인 장덕수가 주도한 "지주집단"의 당이었다. (중략) 웨이드마이어는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돌아선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일 협력자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명한 문인인 정인보는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이북의 술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반일애국의 기억 때문에 사람들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 P287
애치슨은 국무장관 대행으로 행한 1947년 초 의회의 비밀중언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미 분할선을 그었으며,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는 ‘트루먼 독트린’의 모델에 따라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주요한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봉쇄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 즉 소련의 주변에 자족적이고 생존가능한 정권을 배치하는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는 두 동강이 난 한국경제가-일본을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페르시아만의 석유와 연결하는-"거대한 초승달"의 일부로서 일본의 복구에 여전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회와 국방부는 한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껴렸다. 그래서 애치슨과 그의 고문들은 한국을 집단안보체제를 통해 재배치하고 봉쇄하려고 그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워싱턴이 마침내 한국 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점령 정부로부터 환수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인 1947년 초였다. - P296
이런 반공체제가 형성된 이래 미국이 그것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거기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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