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전쟁과 기억 그리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전쟁은 두번 치러진다는 발상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은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두 번째로는 기억 속에서 싸운다. - P15

모든 국가와 민족은 내가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라고 이름 붙인 것만 받아들인다. 이러한 윤리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베트남인들은 미국인들보다 여성과 시민을 더 많이 기억하고, 반면에 미국인들은 비교적 자발적으로 적에 대해 더 많인 기억한다. 그리고 양쪽 다 상실, 우울, 쓰라리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베트남인들을 외면하려 한다. - P21

타자를 기억하는 윤리는 더 관습적인 윤리인 자신만 기억하는 윤리가 변화해야 가능하다. 자기편에서만 생각하는 것에서 더 많은 타자를 기억하는 것으로 범위를 확장한다. 그렇게 해서 가깝고 친한 사람과 멀고 두려운 사람의 경계를 허문다. 윤리적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서 끝까지, 즉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에서부터 타인을 기억하는 윤리에 이르기까지를 탐구하면서, 나는 기억 속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병사와 시민, 다수자와 소수자 그리고 승자와 패자, 그리고 양극단과 범주들 사이에 속하는 많은 이들을 한 줄로 늘어세워 보았다. 전쟁은 많은 것을 포괄한다. 전쟁은 한 나라 안에 있는 다양한 지역의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단순히 전투라고만 생각하고 그 주체를 기본적으로 남성 병사들로만 상상하면, 전쟁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전쟁기계의 장점을 활용하기 힘들다. - P22

기억 윤리는 전쟁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2진법 부호이다. 쉽게 세상을 우리 편과 반대편 그리고 선과 악으로 나누어 동맹을 구축하고 적을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 P24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와는 다른 윤리로 타자를 기억한다. 적과 피해자들, 약자와 소외된 이들, 주변인들과 소수자들, 여성과 어린이들, 환경과 동물들, 멀리 있는 이들과 악마로 낙인찍힌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이 책에서 탐색하고 논의하는 것은 복합적인 기억 윤리이며, 자신과 타자를 둘 다 기억하고자 애쓰는 공정한 기억이다. - P25

공정한 기억은 약자와 정복당한 자, 소수자, 적 그리고 잊힌 자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부정적 정체성 정치에 반대한다. 공정한 기억에서 단지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과거에 대한 성찰로 부족하다. 동시에 타자도 윤리적으로 떠올려야만 한다. 양쪽 모두에게 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 P31

기억과 망각의 기본적인 변증법은 우리의 인간성을 기억하고 비인간성을 잊는 것이다. 역으로 상대의 비인간성을 기억하고 인간성을 잊는 것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공정한 기억은 윤리적 기억에서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를 요구한다. 자신의 기억을 상대방의 기억으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비인간성이 어떻게 서식하는지 보고 기억하는 윤리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성을 연구하는 일은 동시에 비인간성을 연구하는 일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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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1-08-1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법 괜찮게 읽은 책입니다.

Redman 2021-08-15 21:07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이죠
 

<탈아론>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우리 일본의 사인(士人)은 국가라는 것을 중히 여기며, 정부란 국가보다 가볍다는 대의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지하여 도쿠가와 구(舊)정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세워, 나라 안의 관민이 따로 없이 합심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취하며, 단지 일본의 구습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 가운데서도 새로이 하나의 축을 세워, 주의주장으로 정할 것은 그저 '탈아' 두 글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에서도 동쪽에 있지만 그 국민의 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한 태도를 벗고 서양 문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웃에 중국이란 나라와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의 인민은 옛날부터 아시아적인 정교풍속에 의해 길러진 점에서는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지만은, 인종적으로 달라서 그런지, 같은 정교풍속 가운데 있으면서도, 유전 및 교육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일본 중국 한국 세 나라를 비교해보면, 닮기는 중국과 한국이 서로 닮았으되, 두 나라가 일본과 닮기는 그보다 훨씬 덜하여서, 이 두나라는 나라의 백성들이나 나라 전체로서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르고, 사람과 사물의 교통이 편리한 세상 가운데 살면서 문명 사물을 보고 들음이 없지 않건만, 그 보고 들음으로써 마음을 움직이지를 못하고, 그저 고풍스런 구습에 연연해하는 마음은, 수천 년 전과 달라진 바없이,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세계의 활약상 앞에서도, 교육이라 하면 그저 유교와 인의예지만을 칭할 뿐, 하나에서 열까지 겉보기에 그럴 듯한 텅 빈 장식만을 둘렀을 뿐, 진리원칙의 식견이 부재한가 하면, 그들이 자랑으로 아는 도덕조차 땅에 떨어지고, 파렴치가 궁극에 달해, 그마저도 오만한 태도로서 일관하며, 자성(自省)의 염(念)이랄 것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하겠다.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보기>, 38~39쪽


실은 19세기 전반까지 ‘아시아‘라는 말에 그와 같은 통합성을 시사하는 의미는 없었다. 유럽에서 생긴 이 말이 동아시아에 들어올 당시에는 유럽에서 바라본 동방 전역을 가리키는 잔여 개념으로 쓰였고, 한자 문화권 사람들은 그것이 공허한 개념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 P189

명말기인 1607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곤여만국전도>를 간행함으로써 중국문명권 사람들은 ‘아시아‘라고 하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이 세계지도는 당시의 유럽인이 알고 있었던 지구지리를 유럽과 대서양이 아닌, 중국과 태평양을 중심으로 재배치하여 지명을 한자로 써넣은 것이다. - P201

‘아시아‘는 "남은 수마트라와 루손, 북은 스바르발과 북해, 동은 일본과 대명해, 서는 타나이스강/아조프해/서홍해/소서양으로 이어져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설명은 일체 없다. ‘아시아‘라는 말은, 기독교 유럽의 외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동방에 있는 광대한 지역이라는, 오히려 자연 지리적인 세계 분절로서 중국문명권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 세계지도에 있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의 사용법이다. 여기에는 후세와 같은 ‘동양‘(=orient or The East), ‘서양‘(=Occident or The West)이라는 등식은 없다. 지도를 보면, 일본의 앞 바다에 ‘소동양‘, 멕시코 앞 바다에 ‘대동양‘, 포르투갈의 앞 바다에 ‘대서양‘, 지금의 아라비아해에 ‘소서양‘이라는 문자가 기재되어 있다. 즉 리치는 중국어의 용법에 충실해 동에 있는 대양이라든가, 서에 있는 대양이라는 의미로 동양이나 서양을 쓴 것이다. - P202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에서는 ‘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서 파악하기 시작했는데, 그에 앞서 세계 인식의 틀에 큰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 각국이나 인구 집단을 명확한 기준에 따라 계층적으로 차별하여 인식하는 지적 습관이 도입된 일이다. 그중에 먼저 생긴 것은 각각의 나라가 ‘독립‘되어 있는가 아닌가라는 기준이며, 그 다음이 동시대 유럽을 기준으로 한 ‘문명‘화의 정도였다. 양자 모두 거대한 정치 환경의 변화, 즉 전자는 아편전쟁에 의한 대청의 패배, 후자는 메이지유신의 충격하에 일어난 것이었다. - P209

메이지 신정권이 도쿠가와 막부의 ‘개국‘정책을 계승했을 때, 당초의 관심은 오로지 서양 각국과의 관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대청이란 주변 각국과 관계가 생겨났다. 우선 조선과의 사이에서 국내 개혁의 수단으로서 정한론이 일어났고, 국교 갱신의 실패를 계기로 그것은 외교정책상에서도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됐다. 그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이 분쟁의 해결을 위해 조선의 종주국인 대청과의 국교수립이 시도됐다. 메이지 정권은 서양에 이어, 처음으로 근린과의 외교관계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적인 질서를 상정한 것이 아니었다. - P214

일본인이 얼마나 서양의 눈을 의식하며, 좋은 평판을 받기에 급급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때 그들은 서양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높이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다른 ‘아시아‘ 각국과의 차이를 이야기한 것이다. - P216

일본인은 세계 정치와 아시아 전역의 여러 나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갖기 시작했지만, 메이지 10년쯤이 되면, 아시아 내부의 상호연관에 대한 인식에 부가하여, 서양의 지배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제휴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 P221

일본 내부에서 생긴 ‘아시아‘의 정치적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은, 류큐 처분을 둘러싼 청일 충돌 위기를 계기로 중일관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진흥이란 주장으로 고양됐고, 1880년에는 흥아회라는 운동단체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는 정부와 저널리즘이라는 두 차원에서 중일 간에 강한 상호작용이 생겼고, 1880년대 초기에는 러시아를 공통의 가상적으로 하여, 조선의 개혁을 대청이 지도한다고 하는 정책이 한중일 삼국간에 공유되었다. 이데올로기 차원과 외교정책의 두 차원에서 동아시아에 최초로 정합적인 지역적 틀이 설정된 것이다. - P237

여론의 다수 의견은 연합하여 구미와 겨루기 위해서는 중국과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하지 않으면 유효치 않다 하여, ‘아시아‘를 ‘개화‘로 유도하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개화‘의 가망성이 있다면 아시아 연대는 가치가 있으니, 현지의 지식인들을 적극 원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람에 따라서는 혹은 현지에 깊이 관여한 경우에는 현지인에 의한 개혁의 장래성이 희박해 보이면, 일본인이 현지인을 대신하여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개입하기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거꾸로 현지의 개혁이 절망적이면, ‘아시아‘라는 지역적인 틀을 버리고, 메이지 초기와 같이 일본 단독으로 개화의 길을 돌진해 나아가면 된다고 하는 논리도 세워진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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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만 해도 300페이지에 가까운, 1094항이라는 방대한 헤이그 판결은 ‘위안부‘ 문제의 집대성, 국제법의 새로운 고전, 페미니즘 사상의 결정판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평가를 받는 훌륭한 내용이었다. 이 판결의 특색은, 우선 첫째로 ‘민중법정‘의 사상적 실천적 의의를 명기한 것이다. "민중법정 같은 건, 어차피 강제력은 없지 않나,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냐."라는 비판에 "이것은 하나의 판단을 나타내는 것이며, 형을 집행시키거나 국가에게 보상하게 하는 강제력이 없다고 해서 이 판단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민중의 힘으로 일본 정부에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민중법정의 사상을 확실히 나타냈다. - P245

지금까지 남성 중심이었던 국제법에 여성의 관점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젠더 정의‘ 사상이 판결문에는 명확하게 들어갔다. 재판관 중에서도 특히 크리스틴 친킨은 국제법을 젠더 관점으로 전면적으로 새롭게 개선하자는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이 판결에 확실하게 녹아들어 갔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의 국제 법정에서는, 전시 성폭력이 피해자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극단적인 경우는 적에게 강간당한 딸을 가족의 불명예라고 해서 아버지가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전시 성폭력은 피해자 여성 자신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 P247

민중법정의 사상, 젠더 정의에 이어서 최종 판결의 세 번째 특색은, 이 ‘법정‘이 국가의 틀을 뛰어넘는 글로벌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노예제의 책임을 일본 정부에만 부과한 것은 아니다. 우익 등은 "왜 일본만 책망하는가?"라고 했는데, 헤이그 판결은 일본 정부에 주된 책임은 있지만, 구 연합국의 책임까지 확실하게 밝혔다. ‘위안부‘ 제도의 존재를 미국이든 연합국이든 알고 있었다. 압수한 일본군의 방대한 자료, 포로가 된 일본 병사와 일본군이 도주한 후에 남은 ‘위안부‘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 그들은 ‘위안부‘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재판에서 다루지 않았다. - P248

판결의 네 번째 특색은, 이 ‘법정‘이 도쿄 재판의 연장이라고 명언한 것이다. 우선 도쿄 재판에서는 최고 책임자인 천황을 소추하지 않았다. 이것이 전후 책임 문제에서 얼마만큼 마이너스의 영향을 주었는가. 그 때문에 천황의 명령으로 움직인 군인, 병사들의 전쟁 책임의 소재도 결국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때 늦은 정의‘라는 말이 있듯, 도쿄 재판의 결함을 분명히 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49

헤이그 판결의 다섯 번째 특색은 미래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전시성폭력의 불처벌을 없애가자.‘는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그것을 더욱 전진시키는 데 공헌했다. - P249

그것은 피해자가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낸 것으로 시작된다. 또 가해국 여성이 그 목소리에 부응하여, 피해국만이 아니라 제3국 여성의 지지까지 얻어 정말 글로벌한 여성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국제법을 국가 중심에서 시민의 손으로, 남성 중심에서 여성으로, 현재 중심에서 과거와 미래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헤이그판결이 역사를 바꾼 큰 발걸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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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고전의세계 리커버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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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이라는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것도 있고, 주변에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읽기는 읽었는데, <인간 실격>은 제정신이 아니라 중간에 관두었고, <마음>도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아 중간까지 읽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작품을 읽을 때는 먼저 작품 해설을 먼저 읽고, 선이해를 얻은 뒤에야 본문에 들어가는 편인데, 당시 읽었던 번역본들(인간 실격은 더클래식, 마음은 문예출판사였다)은 그런 것이 없어 너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 문학과 나는 별 인연이 없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잊고 살다가 우연히 <나의 개인주의 외>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나츠메 소세키의 주요 평문과 강연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런 책이면, 나라도 손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왕에 나츠메 소세키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북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해제에서 소세키의 생애와 그 시대를 읽어보자. 이 부분을 읽고 나츠메가 상당히 일찍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67, 즉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에 태어났다. 구체제에서 살다가 신체제를 맞이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나 나카무라 마사나오 같은 이들과 달리 나츠메 소세키는 태어나면서부터 구체제의 해체 과정을 직접 겪었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 서양 문명을 가장 일선에서 공부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형식상으로는 천황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근대 체제를 확립시켰다. 이 천황은 기독교적 신과 근대적 주권자의 형상이 결합된 존재로, 일본의 인민을 문명화하고 교화할 지도자이다. 그러나 이토가 사망한 뒤, 일본의 헌정 체제는 이토가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흘러갔고, 결국 천황은 문명화의 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정신적 가치를 독점하는 살아있는 신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때로부터 점점 고조되더니, 나츠메 소세키 말년에 이르러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적 열광은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메이지라는 시대 상황에서 [자신의 생애를] 분리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소세키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압도적인 열강의 압력에 항거하며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즉 그는 메이지 일본의 특징인 국가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고 개인주의 도덕의 확립을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는 국가주의가 만연하던 메이지 후기를 살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회의감을 품었고 일본의 미래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개인의 내면까지 국가가 침투하는 국가주의에 저항하여 나츠메 소세키가 강조한 것은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와 의무, 자기본위였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의 개인주의>라는 강연은 나츠메의 문제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츠메 소세키가 말한 개인주의란, 개인의 창조적 자아실현과 능력 및 개성의 발현, 그리고 이를 위한 모든 노력을 가리키며, 개인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이러한 자기본위의 노력을 기울인다. 왜 그것이 행복을 가져오는가. 개인이 지니고 태어난 개성이 거기에 충돌하여 비로소 안정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자신의 개성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타인에게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의 자유를 방해하고, 타인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려 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국가주의적 도덕은 개인적 도덕에 비해 훨씬 등급이낮으며, “개인주의의 기초에서 생각한다면 그 기준이더 높아진다. 따라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국가를 부르짖을 필요가 없고, “국가가 평온할 때에는 역시 덕의심 높은 개인주의에 중점을 두는 편이당연하다. 앞선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나츠메가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일본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점두록>에서는 독일의 군국주의를 낳은 트라이치케의 사상을 비판한다. 트라이치케의 사상은 단적으로 말해 국가를 위해서라면 언제 희생해도 상관없다는 신념이다. 이 국가란, 프로이센이다. , 프로이센의 승리와 번영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청년들을 수단삼아 전투에 내보내 희생시키고, 주변 국가라도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정복한다. 그는 인의박애는 입으로 말할 수는 있어도 정치적으로 행할 사항은 아니라고 믿었다.” 이렇게 독일이 전 세계를 정복한다 하더라도, 과연 인류의 행복, 자유,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 타인과 타국을 정복하여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인가.

 

이러한 나츠메 소세키의 문제의식과 사상이 어떻게 그의 문학에 반영되었을지는 이제 다음 독서의 과제이다. 평가 좋은 번역본을 골라 읽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참고가 될 수 있으니, 나츠메의 작품 몇 개의 연보도 함께 실어본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905

<도련님><풀배개> 1906

<태풍> 1907

<그 후> 1910

<> 1911

<마음> 1914

<명암>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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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6-02 2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츠메 소세키를 읽기 전에 읽으면 좋을것 같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소세키를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처음 읽은 책이 딱히 끌리지 않아 어쩔까 했는데요. 이 책을 읽어보면 확실히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

Redman 2021-06-05 16:30   좋아요 1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scott 2021-07-07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민우님 이달의 당선 축하합니다
오늘 소세키의 책 들고 출근 했는데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ㅅ^

Redman 2021-07-07 23: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님!! 저는 이번에 소세키 소설을 구입해야겠습니다 ㅎㅎ

서니데이 2021-07-07 16: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Redman 2021-07-07 23:40   좋아요 1 | URL
매번 감사드립니다 서니데이님^^

그레이스 2021-07-07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변역을 지나는 지하철안에서 격하게 축하합니다.

Redman 2021-07-07 23:40   좋아요 1 | URL
선풍기 바람 부는 제 방 안에서 격하게 감사드립니다 😊

초딩 2021-07-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민우님
축하드려요~

Redman 2021-07-08 01: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초딩님도 축하드립니다
 


 "영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위화감을 느낀 소세키는 자신의 문학관을 배양한 동양과 서양은 문학에 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두 서양이 표준이라면 동양의 문학은 부정되고 오로지 서양인의 흉내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다." (220~221쪽, 해제)


"나는 비로소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나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타인본위로 뿌리 없는 개구리밥처럼 그 근처를 아무렇게나 방황하고 있었으니 모두 허사였다는 사실을 겨우 알았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타인본위라는 것은 자신의 술을 타인에게 마시게 하여 품평을 듣고는 이치에 맞건 안 맞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남 흉내 내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57쪽, 나의 개인주의)

자신의 생애를 메이지라는 시대 상황에서 분리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소세키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압도적인 열강의 압력에 항거하며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즉 그는 메이지 일본의 특징인 ‘국가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고 개인주의 도덕의 확립을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 P217

자기본위를 설명하고 개인주의 입장을 공언한 소세키가 자유를 수반한 의무와 타인의 개성과 자유의 존중을 강조한 것은 개인주의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고려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청중인 학습원의 학생들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 개인주의는 악이라고 비난받았지만 권력자의 횡포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국가주의가 찬미되었었다. - P232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자기 개성의 발전을 완수하고자 생각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지만 이것은 자기 권력을 사용하는 자는 그에 수반하는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국의 폭력을 경계하고 상호 상대국의 주권과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 표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독일이나 일본의 무법적인 형태를 비판하는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 P234

<점두록>에서는 전쟁의 비참함과 무의미함과 군국주의를 논하며 독일의 군국주의를 낳은 트라이치케의 사상을 해부, 정치와 사상, 문학에 대해 조명했다. 이 연재 에세이는 소세키가 최후에 남기고 싶었던 평화의 메시지였으며 - P234

언제나 상대를 제압하려 하는 군국주의는 내셔널리즘의 자연적 귀결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서운 희생과 파멸, 문명의 황폐를 야기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계속 추구하던 소세키는 인류에게 파멸을 초래한 군국주의의 행방을 주시, 그것을 헤쳐나가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38

지금까지 소세키론의 상당수는 이 소세키의 사회성과 전투성을 간과하고 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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