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쯤이면 한국전쟁 관련 서적이 많이 출간되고, 5월이 되면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적이 많이 출판된다. 알라딘 신간 목록을 보며, 5.18 관련 책이 많아진 것을 보고 어느덧 5월이 되었음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 숙연함이 동시에 따라온다. 지난달, 리뷰대회의 열풍을 타고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 상당한 화제의 중심이었다. <피에 젖은 땅>은 우리에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비극을 왜 기억해야 하며,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같은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다. 희생자와 희생자의 가족들이 아직 살아있으며, 아직 5.18을 둘러싼 문제들이 해결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5.18을 기억하고 현재로 불러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5월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던 달이다. 바로 박정희와 육사 출신 생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5.16군사정변이다. 올해가 군사정변이 시작된지 꼭 50년째더라. 박정희 정부는 장장 19년 동안 정권을 유지하며, 한국 사회에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깊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가 죽고, 그 정권이 무너진지 40년도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는 5.18/박정희 시대 관련으로 읽어볼만한 책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 5.18민주화운동

김영택, <5월 18일, 광주>

노영기 <그들의 5.18>

저자 김영택은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80년에 취재차 광주로 갔다가 5.18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이후 그는 5.18운동 연구에만 매진했는데, 5.18 자체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 책은 평생에 걸친 저자의 연구 성과가 담겨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충분할 정도이다. 꼭 읽어볼 책이다.


노영기의 책도 기본적으로 5.18의 전 과정을 담고 있는데, 차이점은 보안사 등 신군부 측 자료들을 방대하게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소설가 황석영이 책임 주필로 참여한 책으로, 당시 광주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5.18운동을 재구성하였다.

이미 85년 초판이 출간되어 지하 베스트셀러로 유명했던 이 책은 이미 고전적 반열에 올라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지만, 직접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꼭 읽어볼 책이다.

김영택의 책에서도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학술적 언어가 아니라 시민의 증언을 복원한 이 책에서는 그때의 모습이 처절할 정도로 가슴 아프게 묘사된다.







강풀, <26년>/한강, <소년이 온다>

5.18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강풀의 <26년>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강풀의 만화는 5.18 자체보다는 그 이후 희생자와 그 가족의 상처와 원한에 더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다. 5.18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주인공들이 전두환(작중에서 '그 사람'이라고만 지칭됨)을 암살하려는 내용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41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 사람'과 현재 상황에 분노하게 된다.


한강의 이 소설은 6개의 서로 다른 6개의 시점을 통해 5.18을 재조명한다. 마지막에는 저자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도 나온다. 사투리까지 구현하며 일종의 증언록과 같은 형식의 이 소설은 5.18의 상황을 그대로 복원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있던 개인의 내면과 목소리에 더 집중한다. 읽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심리묘사를 담고 있지만,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작년에는 회고록이 주로 출판된 느낌이었다면(<호텔리어의 오월노래>, <5.18 푸른눈의 증인>), 

올해는 윤상원 열사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윤상원 열사는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투사회보>라는 소식지를 발행하여 5.18 당시 언론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진압군에 의하여 30살의 나이로 사망한 윤상원 열사의 생애를 조망한 책들이 꽤 출판되었다.



<윤상원 평전>의 저자 김상섭은 5.18 당시 윤상원과 함께 투사회보 제작과 시민군 활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런 저작의 이력을 보면, 이 책은 평전일 뿐 아니라 저자의 회고록이기도 할 것 같다. <윤상원 일기>는 윤상원이 직접 남긴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중요하고, 그의 아버지인 윤석동의 일기 역시 그렇다. 아직 이 책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역시 또 하나의 의미있는 책들이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참고로, <녹두서점의 오월>은 윤상원/김상집 등이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항쟁 방향을 두고 회의하였던 거점인 녹두서점에 대한 증언록이다.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김상윤, 그의 부인 정현애, 김상윤의 남동생 김상집 이 세 가족의 증언이 담겨져 있어 이 책도 함께 읽어볼 책이다. 
















- 박정희 시대

전인권, <박정희 평전>

박정희 생애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읽어볼 만한 책이다. 조갑제닷컴, 기파랑 등에서 나오는 박정희 전기는 너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는데,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대한 연구자의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박정희의 생애를 복원한다. 

강정인의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는 박정희 정치 사상을 분석하였다.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저명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서중석이 쓴 한국현대사 책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고, 제목처럼 사진 자료도 많아 어려운 책은 아니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은 이 책을 참고하면 되겠다.










 정광민, <김일성과 박정희 경제전쟁>

 박정희 정부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화두는 단연코 경제성장일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박정희 덕분이었냐, 대중의 힘이었냐 같은 주제보다는 박정희 경제 정책이 어떤 것을 추구했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집중한 책을 소개하겠다.

정광민의 <김일성과 박정희 경제전쟁>이다. 이 책은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발전 정책을 체제/이념 면에서 비교 연구한 책이다.


이 책과 함께 <뉴딜, 세 편의 드라마>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루즈벨트가 어떤 수사를 통해 경제정책을 운용했는지에 집중해서 읽으면, 박정희-김일성과 어떤 공통점이 보인다.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1. 박정희와 그 시대를 넘기 위하여 / 연구 쟁점과 평가
2. 박정희신드롬의 양상과 성격 - 정해구
3. 박정희신드롬의 정치적 기원과 그 실상 - 정상호
4. 유산된 민주화, 경쟁의 부재와 통합의 빈곤 - 정상호
5. 왜곡된 정당정치와 지역균열 - 현재호
6. `반체제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 - 이광일
7. 지역균열의 구조와 행태 - 박상훈
8. 동원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정책 - 전재호
9.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나 - 김용복
10. 기회포착의 정치가와 세계체제의 `국면들` - 김동택
11. 한미관계, 종속과 갈등 - 김창수
12. 한일관계, 왜곡된 밀착 - 김용복


IMF 때 나온 책이라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박정희 시대 그 이후'라는 주제로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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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5-18 05: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Redman 2021-05-18 14: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mini74 2021-05-18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소년들에게 소년이 온다 나 26년은 고마운 책,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것 같아 고마운 책들.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

Redman 2021-05-18 14:26   좋아요 1 | URL
저한테도 되게 고마운 책들이었죠 ㅎㅎ 다른 책들도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광진 2021-12-15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18. 관련 귀한 책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진 2021-12-15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읽고 있는데 <5월 18일, 광주> 책도 구입해서 봐야겠어요 ^^
 


이 책을 통해 필자가 제시하려는 주장은 단순하다. 개화당은 처음부터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려고 한 역모집단 또는 혁명비밀결사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1871년 신미양요를 전후해서 오경석과 유대치가 김옥균을 포섭함으로써 결성되었으며, 그 사상적 기원 또한 의역중인의 철저한 현실 비판과 과격한 사회변혁사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 P7

집권세력에 의해 추진된 문호개방은 기본적으로 당시 국제정세에 순응해서 기존의 권력구조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 반해 개화당의 정치적 목적은 어디까지나 외세를 끌어들여서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양자는 본질적으로 정적의 관계에 있었다. - P11

개화당의 사상적 기원을 북학파의 종장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에게서 구한 기존의 통설은, 일본인의 입장에선 자발적 부역자라고도 할 수 있는 개화당에게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식민사학과 1960년대 이후 조선사회의 주체적/내재적 근대화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을 그 소명으로 삼았던 민족사학의 의도치 않은 합작으로 이루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 P12

개화당과 가장 큰 관계가 있었던 것은 기술직 중인이다...그중에서도 핵심은 의역중인이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또 요샛말로 하면 서로 자제들이 과외교습을 해주면서 기술직을 독점적으로 세습했다...하지만 아무리 많은 재산과 고상한 식견,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의역중인은 조선사회 안에선 출세와 활동이 제한된 한계인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을 벗어나 중국의 명망 높은 문사 및 관리들과 신분 차별 없이 인간적인 교유를 나누는 데서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개화당이 같은 조선인보다 서양인이나 일본인을 더 신뢰해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정체와 음모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한 데는 이러한 중인의 계급적 심성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 P15

개화당은 수백 년 동안 누적되어 화석처럼 단단하고 난마처럼 얽힌 조선사회의 온갖 폐단을 척결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고 몰염치하면서도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는 데는 놀랄 만한 능력과 단결력을 발휘하는 양반들의 폐쇄적 카르텔을 깨뜨리기 위해선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 후기의 수많은 민란과 역모사건 중에서도 개화당의 그것이 단연 이채를 발하는 것은, 그 수단을 임진왜란 이후 누대의 원수인 일본이나 전통적으로 금수로 멸시해 온 서양의 힘에서 구한 사실에 있다. - P376

개화당의 근본 목적은 후쿠자와 유키치류의 문명개화, 즉 서구화나 근대 문물의 수입에 있지 않았다...‘개화‘라는 말은 원래 이 비밀결사가 갖고 있던 고유한 문제의식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갑신정변을 공모한 후쿠자와 및 고토와의 유대를 상징하는 기능을 했을 뿐이다. 후쿠자와가 설파한 ‘개화‘와 개화당이 생각한 ‘개화‘의 의미는 반드시 같지만은 않았으며, 또 같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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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희생은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수백만명의 노동자들, 그들의 가슴속에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그때까지 집단적인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을 고취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성스러운 상징과 존경할 만한 전통이 없었던 한국의 노동계급에 강력한 상징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또한 급속한 수출주도형 산업화과정이 만들어낸 노동문제가 산업영역에서 감추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산업노동자들이 사회적 갈등과 사회변혁의 핵심세력으로서 역사의 장에 들어선 것이다. - P112

청계피복노조의 뒤를 이어 자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서너개의 주요한 투쟁이 1970년대에 발생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런 노조건설 투쟁의 대다수는 여성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시기 잘 알려진 두 가지 사례는 1972년, 원풍모방과 동일방직이라는 두 개의 대규모 방직공장에서 일어났다. - P116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을 떠나서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노조활동가와 교회조직 간의 긴밀한 결합이었다. 거의 예외없이,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진보적인 교회지도자들의 보호 아래 조직된 소그룹활동이나 노동자야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던 사람들이다. (중략) 중소기업에 고용된 여성들이 주도한 1970년대 자주노조운동이 주로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노동지향적 교회활동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P117

고용주는 자주노조를, 특히 외부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받는 노조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자주노조의 설립이나 어용노조의 개혁시도를 막고자 했다. 노조결성을 막지 못했을 때, 회사측의 다음 전략은 독립노조를 어용노조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흔히 사용한 방법은 여성중심의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남성노동자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 P123

회사에 매수당했다는 것 이상의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여성 노조활동가들에게 동정적이었던 한 남성의 고백처럼, 남성들이 여성이 주도하는 노조지도부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남자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여성 노조지도부를 지지하는 몇 명의 남성들은 동료 남성노동자들에 의해서 배척당했고, 노조활동에서 물러나거나 결국은 여성노동자들의 믿음을 배반해야 했다. 분명히 뿌리깊은 성차별 이데올로기가 주된 장애물이었다. - P132

한국 민주노동운동과 노동계급 형성의 기반을 제공한 것은 용감한 여성노동자들의 개척자적인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70년대 남성노동자들의 역할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분신자살을 통해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결국 남성재단사인 전태일이었고, 최초의 자주노조를 조직해서 민주노조운동으로의 길을 열어준 사람들도 전태일의 동료인 평화시장의 남성재단사들이었다. 또한 유동우와 방용석 같은 다른 남성노동자들도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민주노조운동의 횃불을 든 것은 여성노동자들이었다. - P141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한국 노동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준 예외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경공업 여성노동자들과 진보적인 교회조직 간에 형성된 긴밀한 연계에 그에 대한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중략) 만약 교회조직들이 노동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여성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운동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흥미로운 질문이다. 추측컨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 P145

배제적 국가조합주의 노동통제체제는 노동자들이 공식적인 노조조직 외부에서 출구를 찾도록 강요했다. 그 시점에서 기독교지도자들과 지식인집단들은 국가의 무서운 억압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을 지원하고자 했다. 교회조직들은 1970년대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에 몇가지 뚜렷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진보적인 교회들은 노동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문제와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피난처와 사회적 공간을 제공했다. - P151

우리는 투쟁의 실제 주체가 누구였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회조직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놀랄 만한 연대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잔인한 노동조건과 그들의 노동경험 그리고 공통의 사회적 배경에 바탕을 둔 강한 유대감이었다. 교회지도자와 지식인들의 역할은 구조적으로 결정된 잠재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촉매제 역할이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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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51
존 밀턴 지음, 이창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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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의 <실낙원>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에덴동산, 첫 인간의 타락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 1~3장을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서사시로 엮어낸 작품이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와 같은 선배 서사시인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이는 이 서사시는 서사시의 전통을 따른다. 예를 들면, 서사시는 늘 작품을 시작하면서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그리스의 여신 뮤즈를 초대한다. 또한, 보통 도입부에서는 이 서사시의 대략적인 주제도 같이 밝힌다. 서사시의 전범으로 간주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첫 부분을 봐보자.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리아스, 천병희 역)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오뒷세우스, 천병희 역)


<일리아스>의 줄거리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그의 분노가 해소되면서 마무리된다. 첫 행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명시하여 이 서사시의 방향과 주제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주인공 오뒷세우스가 저승까지 갔다 올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모험담과 귀향 과정이 중심 줄거리이다. 밀턴의 <실낙원>도 호메로스의 시와 비슷하게 시작하며, 고전적인 형식을 답습한다.


“인간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거역하고

금단의 열매 맛봄으로써 세상에

죽음과 온갖 재앙 불러일으키고

에덴까지 잃고 말았으나, 이윽고 한 위대한 분 나타나

우리의 죗값 치르시고 복된 자리 다시 얻게 하셨으니

노래하라, 하늘의 뮤즈여 (...)

더욱이 그대, 성령이여, 어떤 성전보다도 바르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성령이시여, 그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나니, 나를 가르치고 이끌어주시라 (...)

이 높고 위대한 주제에 걸맞게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인류에게 밝히도록 하시라” (1편, 1~26행)


밀턴이 부르는 뮤즈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여신 뮤즈가 아니라 성령을 가리킨다. 그는 성령님을 힘입어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 서사시를 썼다. 실낙원의 주제는 “악에서 선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으로 태초에 인간이 타락하고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이 비극을 선으로, 희극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이것이 밀턴이 <실낙원>에서 일차적으로 다루는 주제이다.


고전 서사시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영웅과 전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서사시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거나 무공이 탁월한 아주 비범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다. 길가메시,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 오뒷세우스 등을 떠올려보자. 당연히 <실낙원>에서도 영웅적 캐릭터가 등장한다. 밀턴의 제9편에서 자신은 “진정 영웅서사시라 부를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밀턴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 부분에서 걸리게 된다. 과연 이 시에서 밀턴이 생각하는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언뜻 봤을 때, <실낙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웅상에 가장 걸맞은 존재는 바로 사탄이다. 1편에서 가장 유명한 사탄의 대사를 봐보자.


“그러니 패한들 어떠랴?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으니, 우리에게는 아직 불굴의

투지와 불타는 복수심과 불멸의 증오심과

항복도 복종도 모르는 용기가 있도다! 지지 않기 위해

또 무엇이 필요하랴? 그의 분노와 힘이 아무리 큰들

결코 내게서 이 영광을 빼앗지 못하리라. 무릎 꿇고

허리 굽혀 자비를 빌며, 조금 전까지

그의 권세를 위태롭게 했던 이 팔로

그의 힘을 숭배하란 말인가? 그러한 비굴은

이 타락보다 못한 불명예요 치욕이다.” (1편)


비관적 상황에서도 보이는 낙관적 인식(혹은 정신승리), 강대한 적(=하나님)에게도 결코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 좌절한 부하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카리스마와 지도력. 그는 분명 절대악의 위치에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고전적 영웅의 면모가 보인다. 지옥을 벗어나 천사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인간을 유혹하겠다는 위험한 계획을 사탄은 자진하여 맡는다. 또한 그는 전투에 능하여 매우 호전적이며, 전략에도 능하여 인간 타락의 계획도 그가 생각한 것이다.


한편,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처럼 곧게, 만물의 왕으로서 가치 있는 모습”을 보이고, “거룩한 얼굴엔 영광스런 창조주의 모습”이 빛나고 있었다. 이들은 “만물의 왕”이요 “순결한 신성”을 지닌 반신(半神)적인 존재로서 “참된 자유의지”에서 “참된 권위”를 가진다. 역자 이창배에 따르면, 이는 “고전적·르네상스적 영웅상”이 반영된 것이라 한다. 사탄이 반그리스도적 영웅이라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영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탄과 인간은 이 작품에서 절대로 영웅이 될 수 없다. 사탄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천상 반란과 인류 유혹을 정당화하지만, 그 행위 동기는 “신에 대한,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며 교만과 지배욕에 불타오르는 것이 사탄의 중요한 성격적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질투를 부르는 자, 하늘의 새로운 총아, 흙덩이에서 생긴 인간, 우리의 화를 돋우기 위해 그가 먼지에서 만든 이 한스러운 인간을 겨냥하여 내리치면 족하리라.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것이 상책이로다.”이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는 것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하와가 혼자 있는 틈을 노린 그는 “고귀한 여왕” “세상에 둘도 없는 경” “지식의 어머니”라고 치켜세우고는 “인간에서 신이” 될 것이라고 하여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한다. 결국 하와는 넘어갔고, 하와는 다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다. 자신이 죽은 뒤 아담만 행복을 누리는 것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 아담은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는 명령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그대 없는 이 세상 나 혼자 어찌 살리요”라며 하나님보다 하와에 대한 사랑을 더 우선시하여 선악과를 먹는다. 하와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사탄의 거짓말에 의해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은 이것이 어떤 적의 소행임은 알았지만 하와를 더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선악과를 먹었다. 밀턴의 관점에서 하와의 타락은 ‘이성의 부족’이라면 아담의 타락은 ‘자유의지의 남용’의 결과이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신적인 영광이 사라지고, 낙원에서도 추방된다.


전통적인 영웅상을 반영한 사탄과 아담과 하와의 반영웅성을 보면서, 우리는 밀턴이 전통적인, 그리고 당대의 영웅상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턴은 9편 도입부에서 “지금까지 영웅시의 유일한 주제였던 전쟁”이 아니라 “한층 차원 높은 주제, 진정 영웅서사시라 부를 주제”를 노래한다. 그것은 “훌륭한 인내와 불굴의 정신과 영웅적 순교”이다.


9편 도입부를 한 단락 더 봐보자. 9권의 내용은 사탄의 하와 유혹과 인류의 타락이다. 이 때문에 이제 시인은 “이 노래를 슬픈 곡조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과거 어떤 영웅의 영웅적 행위보다도 “더 영웅적이다.” 이창배의 주석은 이 모순적 구절을 이해할 단서를 제공한다. “신의 심판과 분노는 아킬레우스 등의 분노와 달리 은총의 계기를 포함하므로 ‘영웅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악에서 선이 태어난다’는 것이 밀턴이 <실낙원>을 통해 말하려던 주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은총’이다.


11편과 12편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기 전, 천사 미가엘이 앞으로 벌어질 구원사를 예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이는 구약의 내용을 시인이 요약한 것이다. 어떤 구약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는 창세기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와의 후손에게서 원수를 무너뜨릴 인물이 나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사의 완성이자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절정이다. 그리스도가 있기에 죽음과 죄가 지배하게 된 인류의 역사에 희망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력한 무력으로 사탄과 죽음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바로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대(아담)의 죄와 그 죄에서 나오는 그대 자손들이 받아야 할 형벌인 죽음의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가 이 땅에 온 이유가 완성된다. 그는 순종해야 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을 대속, 즉 순교해야 한다. 죽음의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순종’, ‘인내’, ‘순교’. 이것은 사탄과 아담과 이브에게 없었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로써 악을 선으로 바꾼다.


밀턴에게서 영웅은 전투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내와 같은 내면적 덕을 통해 영웅이 된다. 당대 ‘인내’란 “역경에 처했을 때에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었다. 밀턴이 가족과 시력을 잃고, 공화정의 꿈도 무너져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인내는 더욱 그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는 ‘인내의 덕’을 체현한 영웅을 구상했다. 이 덕은 처음에는 죄를 지었다가 회개한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덕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밀턴이 생각하는 진정한 영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실낙원>의 속편격인 <복낙원>은 바로 그러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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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5-11 0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구약성경의 역대상을 읽는 중인데요 신에 대해 엄청 회의가 든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신의 잘못인가, 신이 선하다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읗 하고 있어요. 자기 백성 아니면 다 죽이는 신이 저는 너무 신같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 리뷰를 읽고나니 어서 신약으로 넘어가고 싶어지네요. 밀턴이 생각하는 진정한 영웅은 어쩌면 제가 기대한 바로 그 신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Redman 2021-05-11 14:47   좋아요 1 | URL
관심 가지고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 완독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실 역대기는 열왕기와 내용이 상당히 겹쳐서 읽기 지난하실 텐데(물론 세부적으로는 다릅니다,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도 한 재미죠), 지혜서와 예언서를 넘어 복음서까지 무사히 갈 수 있기를 ㅎㅎ
구약의 역사서들은 지금 보면, 과연 이게 한 종교의 경전인가 싶을 만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서 더 읽기 힘드실 겁니다. 지금 역대기를 읽고 있으니, 사무엘서 열왕기 여호수아 출애굽기 등에서 더더욱 그러셨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여호와는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시편과 이사야서/예레미야/에스겔서 등에서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그는 단 한번도 열방의 회복에 대한 기대와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증거죠. 유대인이라는 민족적/인종적 경계를 넘어 전 세계를 회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실을 맺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어떤 집단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이 아니라서기보다는 이웃사랑과 공의를 실천하지 않고 약자를 억압하였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왜 굳이 죽였여야 했었나? 제가 공부가 부족하여 여기서 조리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네요.. 대신 책 두 권 소개하자면 폴 코판의 <구약윤리학>과 입니다. 구약에서 일어나는 여러 윤리적 쟁점들을 다룬 변증서입니다. 김근주의 <복음의 공공성>도 관련해서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좋은 독서 되시길

초란공 2021-05-11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여 정리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사탄‘을 무엇으로 치환해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딱 ‘제 모습‘ 같아서 놀랐습니다... ‘질투와 시기의 화신‘^^ 그러고보면 성경을 쓴 사람들은 이교도의 전통과 캐릭터의 발명과 같은 작업을 천재적으로 해낸 사람 같단 생각마져 드는데요~

Redman 2021-05-11 14:49   좋아요 1 | URL
네 밀턴이 특히 이교도적 상징을 자신의 종교시에 끌어와서 새롭게 융합시키는 데 탁월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질투의 화신은 저 역시 ㅎㅎ

scott 2021-06-04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우님의 명품 실낙원 리뷰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Redman 2021-06-05 08:11   좋아요 1 | URL
매번 감사드립니다 Scott님^^ scott님도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1-06-04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축하드립니다^^

Redman 2021-06-05 08: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초딩 2021-06-04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우님~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Redman 2021-06-05 08:12   좋아요 1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ㅎㅎ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숲은 고요하지 않다 - 식물, 동물, 그리고 미생물 경이로운 생명의 노래
마들렌 치게 지음, 배명자 옮김, 최재천 감수 / 흐름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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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보다 생명답게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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