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서정시로 새기다 K-포엣 시리즈
맹사성 외 지음, 고정희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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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읽으려 하는데, 이 책은 다양한 시조를 그것도 영역본과 함께 수록하고 있다. 있어야 할 시조는 웬만큼 있는 것 같으니, 안 읽고 버틸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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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피라미드사회 - 능력주의가 낳은 괴물
하승우 지음 / 이상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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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첫 단계 발췌

 

갓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교회의 목사님께서 대학생활에 관해 여러 가지 조언을 주셨다. 레포트 잘 쓰는 법, 글 잘 쓰는 법에 대해서도 몇 가지 조언해주셨는데, 그분이 첫 번째로 강조한 것이 발췌였다. 글쓰기의 시작은 요약인데, 요약을 잘하기 위해서는 발췌를 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읽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2글쓰기 철칙에서도, “발췌 요약부터 시작하자는 챕터가 있다. 유시민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도 요약/발췌를 잘해서 쓴 글이라고 한다.

 

하승우의 <신분피라미드 사회>는 발췌/요약만 잘해도 충분히 깊이 있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음을 또 한 예를 보여준다. 이 책의 서술 방식은 기본적으로 어떤 주제를 제기하면 그와 연관된 책의 내용을 인용하는 식이다. 몇 가지 예시를 봐보자.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쓴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비례해 보상을 해주는 사회 시스템이다. (43p)

 

권인숙은 <대한민국은 군대다>에서 그 당시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위하여 싸웠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한 권위주의와 위계적 문화가 자리 잡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위계질서나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순응성, 조직에 대한 충성도, 조직에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의 적용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 특징이었고, “단합이나 비합법적인 구조에서 민주적인 토의를 활성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기존의 것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 학번 간의 뚜렷한 위계질서, 공개되지 않는 것의 권위에 대한 순응 등 조직 중심적 사고가 존재했다. (45p)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런 경제발전의 희생자들을 잉여인간’ ‘인간쓰레기라 지칭했다. 농민이었던 도시 빈민, 이등화된 농촌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도시인이 바로 잉여인간에 딱 맞는 이들이다. (115p)

 

사회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에서 신자유주의가 노조의 관료주의를 공격하고 노조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노동자들을 설득해 노동시장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강화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116p)


 

이외에도 간접인용과 직전 인용은 수없이 많지만, 우선은 이 정도만. 이 책은 이런 식으로, 신문 기사, 통계, 도서, 논문 자료 등을 다양하게 발췌 인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킨다. 책의 핵심 주장과 논지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도구로 삼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가 능력주의로 인한 신분 피라미드의 불평등 구조라는 주제 아래에서 여러 책을 묶은 하나의 서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이 전부 발췌와 요약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따옴표가 없는 페이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라 약간 산만하다는 느낌도 받긴 했지만, 몰입에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은, 이게 능력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잘 감이 안 잡히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대충 읽은 탓인지)

 

발췌와 요약도 그냥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책의 중심 주장을 잘 알고 있어야 발췌도, 요약도 가능해진다. 안 그러면 책의 모든 곳에 밑줄을 긋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독서 노트나 자신만의 독서 기록 방법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중심 내용이다 싶은 곳은 따로 정리한다. 이후에 다른 책을 읽다가 이전에 정리한 내용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면, ‘어느 책 몇 페이지라고 미리 정리한 것에 덧붙이면 하나의 지식 창고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한 부분은 나중에 서평을 쓸 때도 유용하고, 다른 글을 쓰다가 인용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쌓이고 쌓여 태산이 되고, 이 태산을 하나의 문제의식과 주제로 잘 엮으면 한 편의 글과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능력주의의 불평등성에 관한 책이 정말 많이 출판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마이클 샌델이 쓴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와이즈베리)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능력주의에 관한 다른 책도 읽어보며,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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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박승찬 지음 / 누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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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누멘, 2010

박승찬의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는 학문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12~13세기에 일어난 스콜라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탐구한다. 라틴 세계에서는 보에티우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일부만 전해지다가, 12세기경부터 차츰 아랍권으로부터 그의 다른 저서들이 번역되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수용은 12~13세기 중세의 학문 세계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바로 이러한 수용에 결과로 탄생한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대작 <신학대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I부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역사’와 제II부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앞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사상이 12~13세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 유입되고 어떤 반향을 냈는지를 탐구했다면, 제II부에서는 그 주요 사례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학문의 체계 정립’과 ‘신앙과 이성의 조화’ 탐구) 다룬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내용은 후자보다는 전자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떠한 사상을 형성했는지보다도, 그가 그런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던 제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의 교류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탄생한다는 내용을 건축가의 시선에서 풀어낸 유현준의 <공간이 만든 공간>도 추천한다)

중세 이전 라틴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한계점이 많지만,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일단 전집이 편집된 이후에는, 수사학 수업의 교재로 사용된 논리학 저술들을 중심으로 초기 그리스에서 관심을 가졌고, 오리게네스 등 초기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적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거부한다. 라틴 교부에서 주목할 사례는 아우구스티누스인데, 그에게 아리스토텔레스란 “자신의 사고를 드러내기 위한 입문적인 성격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13세기 이전 서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거의 유일한 원천”인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확신하에 여러 주해서를 저술하였고, 현실태-가능태나 우유, 보편 등의 용어가 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의 사후 더 이상 그만한 “중개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까지 “잊혀져 버렸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도 그의 논리학 작품은 보에티우스를 거쳐 성 안셀무스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에 ‘완전히 잊혔다’라는 표현을 쓸 때는, 유의해야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 서양과 아랍의 접경지역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들어온 필사본을 번역하고, 이를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에 불타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보러 오면서 본격적으로 재발견되었다. 비록 위작까지 번역했다는 점, 번역자의 대부분이 아마추어 수준의 학실을 갖춘 인물들이었다는 점, 번역 자체의 오류, 그리고 널리 유포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이미 12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작품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다. 13세기에는 모에르베케의 윌리엄(1215~1286) 같은 번역가의 영웅적 헌신으로 기존 번역 전체의 수정 작업과 이전에는 번역되지 않은 <정치학>, <시학>, <수사학> 등의 작품이 라틴어로 옮겨졌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핵심 주해서들을 정력적으로 번역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더불어 아베로에스와 그 이전 그리스의 주해서들까지 상당수 번역되어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이 극히 초보적인 단계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리한 텍스트 비판 능력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꽃을 핀 13세기의 탐구 경향을 더 자세히 알아보자. 13세기 전반기에는 세 차례 걸쳐 아리스토텔레스 강의금지령(1215년, 1231년, 1245년)이 내려졌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확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1255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수업에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는 학사 규정이 파리대학에서 발표되었고, 그때부터 더욱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는 중세 학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오캄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의 개념과 이상을 학자들은 수용하였고, 예비적 학문의 성격을 지닌 인문학부는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갖춘 “철학부”로 발전했으며, 자연과학 탐구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중세가 아무런 발전이 없던 암흑 시대였다는 소리는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 소리이다.

13세기, 새로운 사상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과 대립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신학적인 기획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과 해석들을” 받아들였던 혼합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다. 둘째는,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주해자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혹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이다. 마지막 셋째는, 심정적 적대와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양극단을 피하고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종합하려던 비판적 수용의 태도이다. 이 세 번째 유형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대 알베르투스가 있다. 여기서 잠시 알베르투스의 사상을 간단히 추려보자. 그는 ‘의역 주해’라는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인용하면서도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알베르투스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자리 잡은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학문방법론을 통해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난하거나 수용하는 대신, 그의 철학을 “전체적인 면에서 진실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하는 의미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토마스의 노력이 바로 <신학대전>이라는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직접적 배경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앞에서 말한 이상적인 종합을 이룰 수 있던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주요 원전과 주해서들이 충분한 정도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못했음에도 라틴어 번역을 통해서 그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번역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박승찬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때, 단지 외부적인 조건들이 있다고 곧바로 그런 수용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용과정에서는 단순히 어떤 내용들이 들어오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용자가 이 내용들을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2세기 이전부터, 신학자들은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한 문제의식이 밑바탕을 이루는 상태에서 새로이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열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전부터 이어지던 신플라톤주의의 역할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조선 후기, 서양의 사상을 수용할 때는 주로 청과 일본의 번역본을 통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아카넷, 분도출판사, 도서출판 길, 도서출판 숲, 책세상, 이제이북스 등. 해외의 고전과 원전을 원어 직역으로 출판하려는 출판사들이 많아졌다. 최초의 철학서적 번역이 1954년에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당시 제목은 <참회록>)이고, 그마저도 중역에 발췌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플라톤 전집이 번역되고(천병희/정암학당/박종현) <고백록> 라틴어 원전 번역만 5종이 넘으며(박문재, 성염, 선한용, 김기찬, 최민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 완역(이병창 역, 먼빛으로)이 이루어진 것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번역 수준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물론 미진한 부분은 아직 많지만).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번역만 많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우리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텍스트를 받아들일지다. 이제는 읽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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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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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 깊은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따로 독서 노트에 메모하여 독서의 감상을 보존하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들을 문장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들을 음미하며 읽느라 분량에 비해 읽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그만큼 깊은 책이었다.

기독교는 공동체의 종교이다. 공동체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아래 하나가 된다. 이 책은 그러한 기독교의 공동체 생활이란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는 책으로, 목회자 본회퍼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개인의 경건 생활은 물론 공동체 영성 함양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성 수양이라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사막교부의 금언집도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 >과 같은 유익을 준다. 그러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경우, 중세 수도사적 한계가 뚜렷한 편이고, 사막 교부들로부터는 신독의 가치를 배울 수는 있지만, 공동체의 가치와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의 이 책은 이들의 한계를 보완하여 개인의 영성 생활과 더불어 공동체 영성도 계발할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1장은 성도의 교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을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몸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것은 신자들에게는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됩니다.” 성도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임을, 따라서 공동체 안에 개개인이 아니라 그에게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교회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뇌리에 깊게 박혔다.

2장 '함께하는 날'은 아침 경건 시간의 중요성과 그때의 공동 말씀 읽기, 공동 기도, 공동 찬송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본회퍼는 특히 시편 기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사람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편의 진정한 화자는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다. 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시편의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는 인간적 소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근거”한 기도가 되고, 응답의 약속도 받는다. 이외에도 공동 성경 읽기는 연독의 방식으로 읽을 것, 각 구성원이 교대로 읽을 것, 찬송을 부를 때는 단성 찬송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는 등의 구체적인 조언들이 뒤따른다.

3장은 홀로 있음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공동체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오히려 공동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도의 교제 안에 있어야 하지만, 침묵하며 홀로 있을 수도 있어야 한다.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을 받은 후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매일의 성경 묵상과 중보기도와 개인적 기도를 위해서도 이 침묵은 꼭 필요하다.

4장은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자기 정당화에서 나오는 폭력 행사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서로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없고, 낮은 자리에서 지체를 섬기려는 모습만 남는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 남을 도와주는 것, 서로의 짐을 지어주는 섬김이 열거된다.

5장은 공동체에서 죄 고백의 중요성과 성만찬의 의미를 다룬다. 죄인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경건한 공동체”와 달리, 성도의 공동체는 죄인의 공동체다. 죄 고백과 용서 속에서 진정한 교제로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다. 죄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화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기를” 원하고, 이것이 성찬이다. “거룩한 성찬의 교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완성 그 자체”이다. 성찬을 통해 성도들은 영원히 서로 함께 거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성도의 공동체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시키며, 성찬의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코로나로 인하여 2020년 대한민국의 성도들은 얼굴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은 모일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리고 나아가 코로나 이외에도 여러 이유로 숨어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지체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코로나는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차 다시 올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새번역). 지금 다른 지체들은 떨어져 있어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이 전염병이 수그라들 그날에는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신앙생활과 내가 속한 교회 생활을 돌아보았고 남의 티눈은 보면서 내 눈에 들보는 못 보았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또 다른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도 있다. 결론만 말하면,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 교회의 성도분들께 더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불만 가득한 교만한 마음도 내려놓으며 더 겸손해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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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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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왜 누군가는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도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인데, 그가 제시한 문제 제기는 종래의 마르크스를 포함한 다른 이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과도한 노동을 문제시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프롤레타리아가 겪는 비참함은 모두 다 노동에 대한 열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우선 라파르그가 파악한 당시 노동 상황의 실태를 살펴보자. 인간이 노동할 수 있음은 신성한 권리라며 공장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도 노동자가 되어 12시간이나 14시간 동안이나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이상적인 교정 시설로 잡았다. 하루에 14시간 노동이면,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면 바로 잠을 자야 겨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죽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식사만 섭취하고, 필요한 만큼만 잠을 잔다. 여가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그들의 기쁨과 분노를 억압하고, 그들에게 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하는 종속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게으를 권리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노동의 권리에 반발하여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노동할 때가 아니라 노동하지 않을 때에 있음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다르게 말하면, 게으를 권리란 주체적 삶의 동의어나 다름없다.

 

라파르그는 현시대가 과잉노동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14시간이라는 과잉노동은 노동자, 부르주아, 사회 중 어디에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해악만 끼칠 뿐이라며 그는 과잉노동의 문제점을 차례차례로 지적한다. 이때 과잉노동의 문제점과 그 부작용에 관한 그의 통찰이 빛을 발한다. 과잉노동은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과잉생산이라는 부작용이 초래하는 혼란을 겪는다. 이를 다른 이름으로 말하면 산업공황이다. “낮이 찾아오면 밤이 찾아오듯 과도한 노동의 시기가 지나 산업공황이 도래하여 해고와 빈곤이 끝없이 계속되면 필연적으로 파산이 따라온다. 신용으로 자금을 끌어 쓸 수 있는 한 제조업자들은 일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을 준다. 그들은 자금을 거듭 차입해서 노동자들에게 원자재를 사다 주고, 시장에 상품이 넘쳐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생산을 계속한다. 상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음 만기일은 찾아온다. 자금이 고갈된 제조업자는 사색이 되어 은행가를 찾아가서 가문과 명예를 팔아가며 그의 바지춤에 매달린다.”

 

한편,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은 자본가에게도 이득 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12시간과 14시간 노동 속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자의 역할은 담당하지만, 소비자의 역할은 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살 사람은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비생산자이자 과소비자라는 이중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자신들의 소박했던 취향을 저버리고사치와 과소비의 늪에 스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그들은 어떻게든 돈을 써야만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라파르그는 자본가계급이 스스로에게 부도덕이라는 의무를 부과했다는 재미난 표현으로, 부르주아의 과소비 성향을 조롱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과잉노동의 문제점으로, 생산 기술 발전의 저하를 든다.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할 사람이 차고 넘쳤기에 자본가는 장비 생산으로의 인센티브가 떨어진다. 반대로, “인건비가 상승하면 자본가는 저렴한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결국, 과잉노동은 노동자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 심지어는 가장 수혜를 보는 것 같았던 부르주아에게도 비합리적인 바보짓에 불과하다.

 

<게으를 권리>4새로운 가락에는 새로운 노랫말을은 전체 결론이자 그의 해결책이 나온다. 그는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자의 소비력 증진을 주장한다. 이때 소비력 증진이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얘기한 것이리라. 최소한의 노동만 하며, 자기가 번 돈으로 노동만 하는 기계적 삶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게으른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할 권리에 불과한 '인간의 권리'나 비참해질 권리에 불과한 '일할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누구에게도 13시간 이상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면 지구는 이 오래된 지구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는 개벽의 기쁨으로 몸을 떨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노동에 대한 폴 라파르그의 이러한 통찰은, 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일대의 변화를 바라볼 수도 있는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아카넷, 2020)에서 김재희는 스티글레르 등을 인용하며 포스트 노동 사회로 나아갈 것은 주장한다. 스티글레르는 고용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을 노동에 예속되고 진정한 ’(노동이 아니다)의 가치가 사라졌다고 비판하며, 고용을 폐지하여 인간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기본소득 논의와 연결하면, 스티글레르는 노동생산물이 아닌 을 중심으로 부를 분배하는 기여 소득을 주장하였는데, 결론적으로 포스트노동 사회란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개발하여 일을 하고, 만큼 소득을 받는다. 폴 라파르그는 인간이 억압적 노동에서 해방되어 최소한의 일만 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정말 앞에서 말한 포스트 노동 사회가 다가온다면, 이는 라파르그의 이상이 현실화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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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11-1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민우 2020-11-18 17: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현재에도 적용되는 중요한 통찰들이죠

NamGiKim 2020-11-18 18:07   좋아요 0 | URL
그런 차원에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게임도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김민우 2020-11-19 0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게임 내용과 설정이 매우 흥미롭네요 ㅎㅎ

NamGiKim 2020-11-19 01:04   좋아요 1 | URL
그 게임 하면서 많은걸 느꼈습니다.

han22598 2020-11-19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게으르면 굶어죽는다고 어른들이 웃으시면서 충고하시잖아요. 그런데....이제보니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김민우 2020-11-19 01:1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희는 더더욱 게을러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