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례적으로 매우 많은 책을 읽었던 해였네요. 

서평 이벤트로 읽은 책도 있고, 구매하고 먼지만 쌓였던 책도 있고,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직접 구매해서 7월부터는 대략 다달이 10권 정도 읽은 엄청난 독서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전에도 독서를 좋아하긴 했는데, 그래도 한 달에 2~3권이 고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동안 얼마나 제가 게을렀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올해 가장 큰 행운은 강유원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책은 <역사고전강의>만 읽은 정도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함과 정독법, 무엇보다 서평가로서의 모습이 저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서평 작성에 대한 동기 부여는 확실히 준 책입니다. 물론, 아직 글쓰기/책 읽기 능력은 한참 모자르지만. 

어쨋든, 작년까지는 읽은 권 수가 몇 권 되지 않아 뽑기 어려웠던 TOP 10을, 한해의 독서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전에 한 번 읽었던 것을 다시 읽은 책은 제외하였고, 당연한 거지만 발췌독한 책도 제외하였습니다. 순서는 그냥 저자 이름순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1. 권성욱, <중국군벌전쟁>

 

이 책은 청나라 말기부터 중일전쟁 이전까지의 시기, 흔히 군벌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를 전면적으로 다룬 역사교양서입니다. 전쟁사 블로그를 오랫동안 운영한 저자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생소한 주제이지만 빠져들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총하여 군벌사에 대한 배움의 기쁨과 함께 혼돈의 시대 속 권력자들의 흥망성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읽어볼 책은 이전에 따로 페이퍼를 작성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2.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저자 김시덕 선생은 동아시아사를 관심있게 연구합니다. 이분이 쓴 책의 특징이라면, 일국사적 관점을 넘어 포괄적이고 입체적인 역사 서술을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동아시아라는 무대에서 한중일 더 나아가 러시아 등의 주요 플레이어들이 지정학적 요인에 따라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단순히 '조선은 그랬다' 식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 지정학적으로 역사를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역시 여러 나라와 이익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과 일본, 청이 어떻게 전통적 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지를 입체적으로 그린 책이니,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3.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얼마전에 서평도 썼는데, 참 공동체성과 신앙생활에 대해 구체적이고 유익한 조언이 많이 담겨져 있는 책입니다. 

성경 읽기, 찬송, 기도, 중보 기도, QT 등에 실제로 적용해도 될 만합니다. 기독교 신자분들에게는 주저하지 않고 추천하는 책입니다. 


*구름책방이라는 유투브 채널에, 이 책을 한 챕터씩 뜯어 읽고 감상을 얘기하는 영상들이 있으니 그곳도 같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4.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제 기준, 올해 베스트 오브 베스트. 물론 올해 나온 책은 아니지만. 

정체성, 차별과 배제, 폭력의 문제에 대해 깊은 기독교적 통찰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동안 답답했던 문제였는데, 이 책을 통해 저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 <베풂과 용서>(복있는사람)와 <기억의 종말>(IVP)은 이 책의 주제를 좀 더 대중적으로 쓴 책이라 하니, 이 책들을 먼저 읽고 <배제와 포용>을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5.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대의민주주의, 선거만이 민주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18세기 이전까지 선거는 귀족정/엘리트주의적 정치와 연결되었고, 오히려 우리가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추첨제가 민주주의와 연결된 방식이었습니다. 

이 책은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부터 고대 로마의 공화정, 미국 독립 이후로 시작된 대의정의 기원과 그 특징을 상세히 밝힙니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를 이해할 때 유용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읽었던 고병권 선생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도 추천합니다. 남을 배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괜찮은 책입니다. 

유재원 선생의 <데모크라티아>(한겨레출판사)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정 발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니, 이쪽도 같이 보면 더욱 풍부한 독서가 될 것입니다. 


<선거는 민주적인가>를 읽고 같이 보며 좋은 정치사상 고전 텍스트들









6. 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기도 한 스티븐 툴민이 근대 서양 철학과 사상의 역사를 돌아보며 쓴 책입니다. 근대 철학에 대해 가지는 어떤 장밋빛 이미지와 달리 툴민은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근대의 시작점은 전쟁과 재해 등으로 굉장히 불확실성의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서양의 철학은 더욱더 확실성을 추구했고, 이것이 근대 서양 철학을 관통하는 흐름이라고 지적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본은 절판되었습니다. 저는 운좋게 중고로 싸게 구할 수 있었지만, 원서로는 아직 구할 수 있는 듯합니다.


7.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새물결플러스, 2020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유투브와 블로그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옥성득 선생이 미국에서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한 것은 다시 한국어로 번역/보완하여 출간한 책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이, '기독교를 강제로 주입하는 미국 선교사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조선인 신도'의 패러다임이 아님을 이 책은 여러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며 밝힙니다. 비단 한국 개신교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기독교의 토착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동저자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나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내용도 중복된 것들이 좀 있는데, 이 책들이 조금 더 평이하게 서술된 것 같습니다. 



8. 조경달, 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

 일본의 재일조선인 사학자 조경달 선생이 쓴 동학농민운동사 통사입니다. 배항섭 선생에 의하면, 이 책이 출간된 후에 한국에서 다시금 동학농민운동 연구가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민중의 자율성 복권이라는 관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한 이 책은 그 정도로 혁신적이었고 탁월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올해 초에 이 책을 읽고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에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책도 품절되어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좋은 책은 어디서든 꼭 다시 출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박맹수 선생도 한국에서 동학농민운동 관련 권위자 중 한 명이십니다. 조경달의 주장이 이분에 의해서 일부 반박당한 것이 있는데, 따라서 박맹수 선생의 저서와 함께 이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9. 폴 콜리어, <엑소더스>, 21세기북스, 2014

 '전 지구적 상생을 위한 이주 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이주 노동자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는데, 이 책이 포함하는 연구 대상은 난민 + 이주민 + 불법 이주 노동자 등을 다 포괄하고 있어서 100% 만족할 답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극단적 주장을 하지 않고 시종일관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며,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던 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저자의 책이 새로 얼마전에 새로 번역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책인데, 빠른 시일 내에 구매해서 읽어볼 계획입니다. 







10.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올해 제 독서는 '후쿠자와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에 출판된 후쿠자와 유키치 관련 저서들은 거의 다 섭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문명론 개략>은 매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봉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서양사사의 세례를 통하여 급진적 평등주의자로 거듭났는데, <문명론 개략>이 바로 이러한 후쿠자와가 생각한 문명 사회의 이상과 현 일본 사회에 제시하는 문명 사회의 비전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명저입니다. 특히 일본 사회에 만연한 권력의 편중, 다른 말로 불평등을 날카롭게 꼬집는 9장 '일본 문명의 유래'는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내에 출판된 <문명론의 개략> 중에서는 소명출판에서 나온 이 번역본이 가장 잘 된 번역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조선은 마치 필연적으로 근대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한 역자 성희엽의 해제는 확실히 마이너스 요소였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과 더불어 읽으면 좋은 책은, 우선 그의 또 다른 저서인 <학문의 권장>(소화)입니다. 심지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 쓴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텍스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야스 노부쿠니가 쓴 <문명론의 개략> 해설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됩니다. 









워낙 좋은 책을 많이 읽었어서 고르기 많이 힘들었네요 ㅎㅎ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나 김회권 선생의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무엘상.하>, 마크 마조워 <발칸의 역사>, 단테의 <신곡>,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 무라카미 하루키의 <약속된 장소에서> 등등. 다 꼽을 수 없을 지경이네요.


내년 독서 계획 주안점 중 하나는 '서사시 읽기(길가메시-일리아드-아이네이스-베오울프-니벨룽겐의 대서사시-동명왕편-실낙원-복낙원-모비딕까지)'와 '조선시대사 읽기(조선왕조의 기원-건국의 정치-한국의 유교화 과정-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정의의 감정들-사대부시대의 사회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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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2-10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많이 읽으셨네요 ^^ 함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민우 2020-12-10 10:33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합니다 ~^^ ㅎㅎ

막시무스 2020-12-10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도 엄청난 포스의 리스트임이 느꺼지네요! 배제와 포용에 대해서 관심이 가서 담아 두었습니다! 혹시 성경의 욥기에 관해 읽으셨다면 괜찮은 책을 권해주실수 있을까요? 인문학적 관점의 욥기를 한번 보고 싶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김민우 2020-12-10 10: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욥기를 다룬 책은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문학 고전 강의>에서 욥기를 다루긴 합니다.

제가 읽었던 욥기 서적 중에서 추천할만한 건 권지성의 <특강 욥기>(IVP) 바르톨로뮤 크레이그의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이레서원)입니다. 틀에 박힌 욥기 해석은 하지 않아 도움이 될 것입니다! ㅎㅎ

막시무스 2020-12-10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문학고전강의에서 욥기편 읽고 관심이 생겨서 이리저리 책을 찾던 차였어요! 강박사님이 책에 기재한 도서가 절판이고 도서관에도 없어서 아쉬웠는데 추천 감사합니다!ㅎ

김민우 2020-12-10 11:43   좋아요 1 | URL
읽고 꼭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ㅎㅎ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b판고전 11
발터 벤야민 지음, 심철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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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출판 b에서 출간한 심철민 역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1939년에 출판된 제3판을 저본으로 삼되, 1판과 2판과의 내용 변화 추이를 반영하여 번역하였다. 이를 위해 부록 ‘판별 내용 대조’에는 1판·2판과 비교하여 3판에 추가되거나 변경된 부분, 그리고 3판에서 삭제된 부분, 마지막으로 불어본까지 포함한 네 판본 간의 본문 및 원주 대조가 실려있다.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최성만 옮김, 길, 2007)에는 2판과 3판만이 수록되어 있고(목차만 확인한 것이다), 전기가오리 역간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신우승 옮김, 전기가오리, 2016)도 2판을 번역한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주요 판본의 내용을 비교해서 읽고 싶은 독자분들은 이 번역본이 적절하겠다.

총 15개의 절로 구성된 이 짧은 텍스트는 ‘머리말’과 ‘추기’를 제외하고 다섯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물론 이 구분은 내가 임의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그닥 설득력은 없다.

2.

먼저 1~5절은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가장 정독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1절에서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서 예술작품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라의 붕괴’이다. 아우라란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작품이 갖는 ‘지금-여기’라는 특성, 즉 예술작품은 그것이 존재해 있는 곳에 유일무이하게 현존해 있다는 특성이다.” 그리고 이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적 유일무이성”이 예술작품의 “진본성”을 이룬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복제가능성은 예술작품을 대중 앞으로 당겨 놓으면서 진본성, 즉 예술작품이 갖는 ‘지금-여기’의 특성을 무색하게 한다.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여 예술은 복제를 통하여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말해 유일무이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진본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더 근원적으로 예술 “최초의 본원적 사용가치”인 제의적 가치와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는 그 제의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대부터 이미지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 이용되어왔다. 맞는 사례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표적으로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입상’ 같은 작품은 프로파간다를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그 석상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듯 청년기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그의 ‘맨발’도 자신을 신격화시키기 위한 장치로써 이용되었다. 또한 가톨릭의 이콘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예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세계사에서 최초로 제의에의 기생상태로부터 해방시킨다.” 벤야민은 5절에서 이를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 옮겨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전 내부의 신상과 이곳저곳 옮겨지는 흉상, 프레스코화/모자이크화와 패널화, 그리고 미사곡과 교향곡. 각각의 사례에서 후자의 전시가능성이 전자보다 더 크다. 이는 3절에서 설명한 “모든 것의 복제를 손에 넣음으로써 주어진 것의 유일무이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현대 대중의 경향과 맞물리면서 아우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바야흐로 예술 향유의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아우라의 붕괴는 “평등성에의 감각”을 진척시키거니와, 이는 당시 대중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진본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사라지면서 예술은 제의적 기반으로부터 분리된 대신 “정치에 근거를” 두게 된다.

3.

두 번째 부분인 6절은 제의적 가치보다 전시적 가치가 더 중요해진 최초의 예술 분야인 ‘사진’과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다룬다. 초기 사진은 ‘얼굴 사진’을 통해서 아직 제의적 가치, 즉 아우라가 남아 있었지만, “앗제에 이르러 사진은 역사과정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한다.” 즉, 사진에서 사람이 사라지게 되면서 드디어 예술의 전시적 가치는 예술적 가치를 추월하였다. 위키백과 ‘으젠 앗제’에 따르면, 앗젠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사라져가는 파리의 옛 모습을 기록하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이러한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뀐 사진의 성격, 곧 사진은 관찰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관조”가 아니라 “특정한 의미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영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세 번째 부분인 7절은 6절과 8절 사이에 교두보 역할을 하는 장으로, 사진의 예술적 가치보다도 사진의 발명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변한 예술 자체의 성격이 더 중요하다며 영화의 의의를 여전히 초자연적인 것 속에서 구하는 반동적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8절에서부터 드디어 기술적 복제 가능 시대 예술의 전형인 영화를 분석한다.

4.

네 번째 부분인 8~14절은 기술적 복제 시대 예술작품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의 특징과 영화로 인한 변화들을 열거한다. 영화는 카메라와 조명 등의 기계장치를 매개하여 대중에게 선보여진다는 점에서 연극 무대하고 다르다. 기계장치를 매개한다는 사실이 영화의 특징을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데, 이로써 영화배우의 연기(9절)뿐만 아니라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10절)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어떤 예술작품의 ‘지금-여기’의 특성이다. 연극무대에서는 배우의 아우라를 관객이 느낄 수 있지만, “영화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갖는 특이한 점은, 관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계장치가 놓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배우를 둘러싼 아우라는 탈락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누구든지 영화제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10절). 비근한 예를 들자면, 다큐멘터리 영화나 르포 영화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영화들은 굳이 배우가 아니더라도 스크린에 출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회가 되면 누구나 출연할 수 있다는 면에서 영화에서는 대중과 배우 사이의 차이는 상실된 것이다.

11~13절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가져온 예술작품의 기술 복제 가능 시대 일대의 변화들을 순차적으로 다룬다. 그중에서도 11~12절은 화가와 회화와의 비교를 통해 영화가 가지는 특징적인 면모를 더욱 부각시킨다. “화가는 작업할 때 대상과의 자연적인 거리를 관찰하는 데 반해, 촬영기사는 대상의 구조 속에까지 깊이 파고든다.” (11절) 또한 영화에서는 “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계”가 변한다. 항상 소수의 사람에 의한 감상을 요구했던 회화와는 달리 영화는 대중에 의한 “집단적 수용”을 요구한다. (12절) 영화는 카메라 렌즈와 같은 기계장치를 통하여 사물이나 운동을 느리게 보거나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으며,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까지 볼 수 있게 한다. 이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필연성들에 대한 통찰을 증대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유희공간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13절) 14절은 “대중이 영화 속에서 구하고 있는 효과들을 회화라는 수단을 통해 만들어내려고 시도”한 다다이즘에 대해 설명한다. 다다이즘은 복제의 방식을 회화에 접목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인 15절은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대폭적인 증대”가 예술에의 참여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다룬다.

5.

벤야민은 추기에서 ‘파시즘’에 의한 ‘정치의 미화’를 경고한다. 그가 이 논문을 쓰고 있던 1935년은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즘 세력이 집권하여 온 유럽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다. 파시즘에서 보이는 정치적 표현의 특징은, 공공 연설이나 퍼레이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한 대중 동원력과 선동력이다. 히틀러는 연설을 통하여 대중 앞으로 자신을 가까이한다. 이것은 벤야민이 고찰한 영화의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영화 자본이 ‘스타숭배’를 만들어 다시 제의적 가치를 존속시켰듯이,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지도자(영도자) 숭배를 통하여 다시금 예술의 제의적 요소와 아우라적 요소를 부활시키고 있었다(강력한 일인 지도 체제라는 면에서 루즈벨트도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예술의 근거가 다시 제의적 가치로 옮겨가는 것은 기술 복제 시대가 가져온 한 특징, 곧 ‘대중의 등장’과 ‘예술 향유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파시즘적 정치에도 대중은 존재하지만,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온존시킨 채 표현의 기회만을 그들에게 주려고 한다.”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은 채 대중을 지배하려는 그들이 택한 방법은 “매스컴 기구를 장악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파시즘의 정치를 ‘정치의 미화’라고 부른다.

“정치의 미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 정점이란 전쟁이다. 전쟁은, 그리고 오직 전쟁만이 종래의 소유관계를 유지한 채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에 하나의 목표를 부여할 수 있게끔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정한 파시스트들이 종래의 소유관계를 유지하면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에 하나의 목표”, 즉 전쟁으로 향하게 한다. ‘정치의 미화’의 궁극적 결과는 전쟁이라는 벤야민의 예언은 이후의 역사 전개를 아는 우리의 경각심을 울린다.

벤야민은 이 논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는다. “이 파시즘에 맞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 ‘예술의 정치화’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파시즘적 ‘정치의 미화’에 대립되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 ‘예술의 정치화’란 불평등한 소유관계를 그대로 놔두고 영도자 숭배로 이어지는 ‘정치의 미화’가 아닌 소유관계의 평등과 대중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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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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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저서들을 연속해서 발표했던 유현준은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융합되고 어떻게 생각의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 추리"하기 위해 <공간이 만든 공간>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왜 다른가를 그 지리적 배경, 다른 말로 공간적 배경을 통해서 파악한다. 빙하기 이후 서로 다른 기후가 형성된 된 두 지역은 집약적 농업인 벼농사를 주로 짓느냐, 혹은 밀농사를 빗느냐에 따라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건축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서양의 법칙은 상황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명제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서 동양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중용’ 같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행동에 대한 가치가 결정 난다. 두 문화권은 건축 공간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서양의 건축은 벽 중심의 건축을 하면서 내부와 외부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공간의 성격을 갖는 반면, 동양은 기둥 중심의 건축을 하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성격의 공간을 갖는다. 서양의 법칙은 상황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명제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서 동양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중용’ 같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행동에 대한 가치가 결정 난다. 두 문화권은 건축 공간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서양의 건축은 벽 중심의 건축을 하면서 내부와 외부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공간의 성격을 갖는 반면, 동양은 기둥 중심의 건축을 하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성격의 공간을 갖는다. (56p)"


어떤 공간에 사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두 생각과 문화가 나왔고, 이 두 문화가 융합하면서 새로운 생각과 문화가 탄생한다. 6장 '동양을 닮아 가는 서양의 공간'에서 저자가 자세히 다루는 현대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마스 반 데어 로에는 동양식 사유에 영향을 받아 이를 자신들의 건축에 적용한 사례이다. 그리고 7장 '공간의 이종 교배 2세대'에서 나오는 안도 타다오와 루이스 칸은 문화 융합의 또 다른 사례다. 루이스 칸은 "현대식 건축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서양 전통 건축, 도가 사상, 유대 민족 문화까지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유전자를 섞어서 융시킨 건축가였다."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은 융합을 보여준 것이다. 안도 타다오는 "서양의 기하학과 동양의 상대적 관계성을 융합"시켜 '바람의 교회' 같은 건축물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를 요약하면, 새로운 생각은 다른 공간과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과거의 전통과의 접촉을 통해, 그리고 전혀 다른 문화를 종합시킬 때 나올 수 있다. 건축의 사례에서 보자면,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도 새로운 생각이 나올 수 있다. 현재에는 이조차 부족하여 다른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하여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으려 하는 시도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권인 공간에 인터넷 공간이 새롭게 추가될 것이고, 향후에는 해저 공간과 우주 공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공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해이다. 코로나는 일상을 변화시켰고, 일상의 변화는 공간을 재구성한다. 가장 단적인 예시는 권력의 해체와 재배치이다. 모임을 통하여 믿음과 권력을 강화시킨 기독교는 위기를 맞았고, 반대로 유투브나 넷플릭스 등의 플랫폼은 부상하였다. 어쩌면 우리는 공간의 재구성과 그로 인한 권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것은 긍정적일 수 있고, 부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흑사병과 전쟁 등으로 인해 중세 사회가 무너지자 대학은 더 이상 어떠한 새로운 사상도 낳을 수 없게 되고 신비주의로 도피했던 것처럼, 코로나 시기 속에서 어떠한 융합도, 어떠한 새로운 것도 거부한다면, 부정적인 결과로 귀결됨은 당연할 것이다.



여담. 이분의 균형 감각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이 책은 건축과 지리를 중심으로 동서양 문명과 철학, 역사를 서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며 충분히 틀릴 수 있고 다른 해석도 가능함을 인정한다. 이전에 읽은 루이스 다트넬의 <오리진>은 지리적 영향력을 너무 강조하여 지리결정론적 입장을 보여준 데 비해 겸손함과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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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독교 (반양장)
윤정란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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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한국현대사에서 기독교, 구체적으로는 서북 출신 월남 기독교인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것이다. 윤정란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남한 교계와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계기는 한국전쟁 시기 구호물자 사업의 독점이었으며, 북한과 소련의 탄압 기억 속에서 형성된 강한 반공 정서가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과 결합하면서 이들은 남한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호물자 사업은 미국 선교단체와 연결된 것이므로, 결국 서북 기독교인들은 미국과의 커넥션과 반공주의로 성장했다 할 수 있겠다.

 

서북이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대부분의 북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 서북 지역이라고 지칭하는 곳은 북장로교가 관할했던 평안도와 황해도 이북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한국개신교 최초의 세례자가 나오고, 1898년에 전체 장로교인 중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서북민일 정도로 개신교 교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서상륜, 함석헌,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한경직 등 주요 기독교인 인물들이 또한 서북 출신이며, 1907년 평양대부흥는 이 지역에서 기독교가 더욱 깊숙하게 자리 잡아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만든 사건이었다. 일제의 강요 속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까지도 서북 기독교인들은 이북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대거 월남하게 된 계기는 소군정과 북한 정권의 탄압 때문이었다. 신의주 학생 사건 등 당국과의 마찰이 거세지는 동시에, 소령군 사령부는 북한 정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을 정치에서 점차 배제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법으로 경제적 기반까지 잃은 기독교인들은 월남을 단행했다. “월남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피난민 교회, 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를 거점으로 삼아 월남한 목사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독점하여 장로교 내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서 저들을 도와주겠다는 뜻에서 구호물자를 기부했고, 미국교회협의회(N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과 협력을 받는 기독교세계봉사회(CWS)가 이러한 구호물자를 한국의 전재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한국 구호 활동을 책임지는 이가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각 교파는 서로 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선교지 분할 정책을 펼쳐 교파별로 특정 지역을 맡았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북장로교의 선교지는 서북이었다. 그래서 월남 기독교인과 북장로교 사이에 더욱 밀착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CWS가 미국 정부에도 영향력이 있던 NCCWCC와도 관계가 있다 보니, CWS를 통한 구호물자를 독점한다는 것은 곧 WCCNCC와의 관계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장로교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경직을 비롯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장로회 총회를 주도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방대한 구호물자를 독점할 수 있게 된 한경직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 정부, IMC, WCC, 미국 NCC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남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가진 미국과의 커넥션이 유용하다고 여기면서도, 휴전협정에서 언제든 자신보다는 미국의 입장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WCC 용공설을 이용하여 서북 출신 기독교인과 갈등 관계에 있던 고신파로 하여금 휴전협정에 찬성하는 WCCNCC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지원을 받고있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까지 용공으로 몰아붙이도록 부추긴 것이다. 월남 기독교인과 WCC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서였다. 참 이승만다운 비열함과 옹졸함이다.

 

한편, 서북 기독교인은 구호물자와 더불어 반공 헤게모니를 통하여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고아 사업(4), 서북청년회(5), 승공 담론(6)을 통하여 이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밀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전쟁고아 사업은 빌리 그레이엄과 월드비전 등 미국 복음주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미국인들을 다시 냉전 외교 정책에 동참시킨한편 미국과 한국이 가족애에 바탕을 둔 혈맹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전쟁고아 사업을 주도한 미국 복음주의 세력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이들은 역시 한경직을 비롯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적극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서북 기독교인들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한경직 세력은 그 후에도 박정희 정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북 출신과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는 서북청년회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강력한 전투적 반공주의 아래 모인 서북청년단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수 십 명의 남로당원들이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을 결정했다. 그래서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생의 3분의 2가 서북 출신이었으며, 8기생에서도 서북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5기와 8기는 박정희와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도한 중심 세력이다.

 

서북 출신 월남 기독교인들이 박정희 정권을 지지할 수 있던 또 다른 요소는 승공 담론이었다. 북한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이들이 조직한 서북청년회, 영락교회, 이북신도대표회는 전투적 반공주의의 선봉이었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도, 전쟁의 원인을 공산주의의 야욕으로 돌리고 공산주의를 마귀의 세력으로 치부하는, 전투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참고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WCC의 에큐메니컬 노선을 지지하는 맥락도 WCC가 반공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적 반공주의는 1950년대만 가도, 대내외적 요인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은 전후 재건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투적 반공주의에 회의가 일었고, 이제 반공주의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반공은 이제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 구체적으로 말해 민주주의 질서 확립과 사회적 빈곤의 제거의 성공으로 정의되었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유린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KNCC 등 서북 기독교인은 4·19혁명을 지지하는 한편, 동시에 탈냉전·중립화 통일론으로 이어진 4·19 이후의 흐름에 반대하고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모순적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들에게 박정희와 군사정변 세력이란 공산주의 체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실질적 반공 체제의 확립인 승공’”을 실현시킬 세력이었고, 한경직과 김활란이 미국에 친선 사절단으로까지 가서 미국을 설득하려 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의해 승공 담론은 국시로 승격되었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미국과의 커넥션과 반공주의를 통하여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더 나아가 권력층과도 유착 관계를 형성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초청 여의도 집회는 어떤 면에서 서북 기독교인과 정권 사이의 유착 관계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의도 집회에서는 정부의 독재 행태에 대한 예언자적 성찰과 비판은 결여되어있다. 반공주의만 있었을 뿐. 오늘날에도 친미/반공/보수 세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이렇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기독교인의 죄악에서 찾았으며, 익히 일려져 듯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학생 두 명을 용서하며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탄압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내려온 이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이해 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 손양원 목사처럼 포용의 손길을 내미는 목소리가 없었다는 점은 다소 서글퍼진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이전 세대의 역사를 대부흥의 역사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해방 이후의 역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 교회의 역사를 다시 봐야 하겠다.

 


여담. 5서북청년회 출신들의 정치적 배제와 부활에서는 저자의 논지가 다소 느슨해진다. 우선 서북청년회와 서북 출신 기독교인의 관계가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한경직과 베다니교회의 청년부에 서북청년회 회원이 다수 존재했고 서청이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서북에서 찾았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베다니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회를 주도했다는 증언도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청계 중 5·16에 가담한 이들과 기독교 세력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박정희 정권 요인 중 서청 출신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 사이에는 단지 북한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는 공감대만 형성되었는지, 아니면 더 강력한 연결고리가 있었는지. 서청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은 1949년 이후에도 계속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인가? 이 책의 중점적인 연구 대상이 서북 출신 기독교인이다 보니, 5기생과 8기생이 서북 출신 기독교인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쉽다.

 

4전쟁고아 사업과 한경직에서도 한경직이 어린이 합창단을 통해 한미 간의 혈맹적 관계를 다시 확인시켰다는 표현 역시 더 근거가 제시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어린이 합창단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음은 알겠으나, “어린이 합창단을 통해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라는 결과에 대한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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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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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후지이 다케시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에는 머리말이 추가되고 결론은 본론 요약을 제외하면 거의 다 새로 썼다.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본론에서는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과 큰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35천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riss’라는 사이트에서 저자의 학위논문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니(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이쪽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후지이 다케시는 서론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건국되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후지이 다케시가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국의 해방 8의 정치 공간은 그들 생각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매끄럽게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책에서 족청계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사상적 특징 때문이다. 1945년 등장하여 1953년에 정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족청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위치한 존재였으며, 거시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되는 가운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다양한 편차를 내포하면서 결합되는 양상의 주변부 수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 뒤섞인 족청계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범석, 안호상, 양우정이었다. 이 3명의 공통점은 파시즘과 관계를 가지면서 형성된 민족주의였다는 점이다이범석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장제스의 파시즘에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조직한 족청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에도 장제스의 방식과 훈련단의 모델을 많이 참조했다. 안호상은 독일 유학 시절 히틀러와 나치즘에 깊은 인상을 받고, 칸트와 헤겔을 연구하며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를 주장하는파시즘과 장제스식 역()행철학과도 친화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양우정은 1931년에 전향한 사회주의자인데, 그 전향 논리가 흥미롭다. 양우정은 유물론과 유물사관에 의문을 품고는 민족주의와 일본 파시즘과 그 논리를 공유하는 가족주의 사상으로 전향했다.

 

족청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이범석이다. 따라서 족청의 이념은 이범석이 영향을 받은 장제스식 파시즘과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족청의 이념은 파시즘과 상당한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범석은 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 전쟁으로 보는 공식적인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고, 오히려 패배한 독일·이탈리아·일본 측이 가졌던 전쟁 인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동시에 이범석은 분명한 제3세계주의적 경향을 띤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제국주의적 성격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안호상 등을 통해 족청에 접목된 나치즘의 영향으로 족청은 반공주의면서도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후 족청계가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뒤, 어떤 이는 족청계의 파시즘적 행태, 다른 이는 “‘공산당적수법을 비판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족청계는 좌익/우익’ ‘반공/자본주의라는 이분법 구도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층위와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이러한 족청과 족청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이 일민주의이다.

 

일민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안보의 공백이 발생한 지점과 겹친다. 이승만은 공산당과의 싸움이 아직은 사상적 싸움이라고 규정하면서, 사상적 싸움의 수단으로 민주주의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일민주의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 내 좌익들의 사상적 전향을 이끌어내는 매개체로써 일민주의가 사용된 것이다. 전향은 폭력적 강압과 유도한 세트로 구성되었는데, 일민주의가 유도를 맡았다. 그리고 이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으로의 유도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가 양우정이었다. 양우정의 공산주의 비판의 핵심은 민족주의를 기축으로 한 반공주의였다. 그는 민족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까지 비판한다(물론 비판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대한민국 헌법이기에 자본주의 비판은 다소 애매해진 부분은 있었지만).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은 공산주의의 이항대립항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대한민국)로의 전향이었다. , 일민주의는 좌익들을 포섭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물론 전향이 사상적 전향만이 아니라 지리산지구 토벌 작전과 같은 폭력적 강압에 의한 전향도 있었음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일민주의와 족청계는 미국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0, 일민주의보급회를 조직하는 등 이범석은 일민주의를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지만, 경제 원조를 두고 이범석과 안호상을 경계한 미국의 압력으로 이범석 당시 부총리와 안호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사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 발췌개헌을 둘러싼 국회와 이승만 정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 족청계와 일민주의는 다시 정치 무대의 중심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일민주의는 이전에 계급성과 배타적 민족주의 성격이 상당히 희석된 협동주의의 형태로 재등장했다. 족청계와 이승만이 속한 원외자유당이 농민을 위한 당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양우정식의 논리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으며, 미 대사관이 안호상을 경계하는 마당에 일민주의의 인종적 성격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나, “미국을 따라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협동주의로 성격이 바뀌었다.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라는 사태에서 미국은 이범석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은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이범석이 권력자가 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과 이범석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작전은 먹혀들었고, 그 결과가 이범석의 부통령 낙선이다. 1953년 초, 휴전 반대운동으로 잠시 족청계와 일민주의가 부활하는 듯했으나, 이범석이 이승만의 권유로 외유를 나간 사이 족청 출신 장관을 갑자기 해임하고, 자유당 중앙당부에서 이범석과 안호상, 양우정 등을 제명함으로써 권력의 중추부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족청계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이범석은 경찰의 엄중한 사찰 대상이 되었으며, 1956년에 공화당을 조직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지만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안호상은 19546월에 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양우정은 19541월에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지만 정치계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족청계가 정치 세력으로 부활하는 일은 없었다.

 

후지이 타케시는 서론에서 “‘반공=친미라는 냉전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부에서는 냉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반증하는 것이 반공적이면서도 냉전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이었던 사상을 가진 족청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족청계의 몰락은 하나의 상징이다. 족청이 재기불능 상태가 된 것은 미국발 냉전 체제가 한국에 완전히 공고화되었음을 의미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진영 논리가 자리 잡으면서 족청계와 그들의 사상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냉전적 이분법인 진영 논리가 강조됨으로써 첫째 전향 사회주의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되었고, 둘째 경제적 민족주의는 쇠퇴하였다. 여기서는 조봉암 같이 제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마지막 셋째 설립부터 여성과 학생, 농민 등을 포섭할 정도로 막강한 대중적 동원력을 지닌 족청의 몰락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대중 동원의 정치 공간이 한국전쟁 휴전과 더불어사라졌다. 대중이 직접 정치의 주체로 나설 공간이 냉전과 함께 소멸된 것이다.

 

이러한 시사점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냉전적 이분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그리고 이러한 본격적인 냉전 질서의 시작점인 휴전 체제의 성립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해방 공간의 유동성을 앗아갔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진영을 가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냉전에서 벗어나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족청계는 1953년 말경에 권력 중추부에서 제거당하는데, 그에 이어 자유당이 의회정당으로 거듭나고 헌법에서 ‘국가사회주의적’ 조항이 약화된 사실로 상징되듯이, 그들의 몰락은 역사적 전환기였던 ‘해방8년’의 종언, 즉 냉전이 남한 체제 내부에까지 관철되면서 대중이 직접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소멸한 것과 궤를 같이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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