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의 북한은 단순한 소련의 위성국가가 결코 아니었으니, 1945~46년에 광범위하게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기반한 연립정권으로부터 1947~48년에는 비교적 소련의 지배를 받는 정권을 거쳐, 그 후 1949년에는 중국과 중요한 연계를 갖는 정권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개 덕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두 공산주의 대국 사이에서 적절한 책략을 쓸 수 있었다. - P319

소련의 정책은 남한에 단독 정부 및 군대를 세우려는 계획을 밀어붙인 미국의 정책보다 임시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 P320

공산당 혹은 노동당은 사실 방대한 농민층에 사회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 당 기구는 출신계급에 상관없이 거의 누구든지 당원이 될 수 있는 개방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김일성의 지배를 따르는 대중을 끌어모았다. 이로 말미암아 빈농 대중이 당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 P320

해방 후 일년 동안은 민족주의자, 기독교도, 토착 천도교도 같은 비공산주의 정당과 단체가 많이 있었다. 김일성의 지도력은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의 ‘청우당’이라는 두 주요 정당에 대해 ‘통일전선’ 정책을 채택했다. (중략) 이 통일전선 정책은 이 정당들에게 어떤 실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 정책은 농민층에 뿌리내린 천도교와 도시, 특히 평양에서의 기독교 세력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이런 정당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명하달식 통제에 예속시켰다. - P322

북한은 곧 비좌익 정치적 반대파 모두를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제거했다. 통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두 비공산계 정당이 여전히 허용되었으나, 권력은 전혀 없었다. 그 의도는 남한 우익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대안적인 권력중심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일을 훨씬 더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조직의 월등한 우세와 반대파의 전반적인 약세 때문이었다. - P325

북한의 보안기구는 하나의 혁명적 사법기구이자 동시에 철저하고 종종 전체주의적인 통제·감시 체제였다. - P326

그들의 직무에는 기본적인 정치적 사유를 신봉하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할 만큼 전체주의적 사상통제 및 감시체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 정권은 대규모 비밀 조직망을 구축하여, 시민들의 충성심을 검사하는 한편 여론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지도부에게 제공할 수단으로서 풍문과 소문을 포함한 정치적 발언들을 보고하도록 했다. - P328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조국을 통일하려는 목표를 지녔다. 이승만과 달리 그는 1950년에 이르러서는 그 과업을 달성할 수단을 확보하였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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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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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0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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