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까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 P108

시간체제에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담론뿐 아니라 장기적인 역사인식의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식민지 체제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국사 속에 식민지의 역사를 포함시켜 변형시킨다. 또한 국가권력에 의한 시간적 주기에 대한 특별한 의미부여로서의 기념일 제도가 포함된다. - P110

시간관념의 근대화에는 력의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봉건시대에 력은 하늘이나 신을 대신하여 세속적인 최고권력이 사람들에게 우주의 운행원리를 알려주는 것, 조선시대에도 력은 왕실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지배질서의 정당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 P112

조선총독부는 력을 독점관리하고 통제했다. 이에 대응하여 상해 임정에서는 발족과 더불어 독자적인 민력을 작성하여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배부하였고, 일제 영사관이나 경찰은 이를 철저히 단속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상해임정은 ‘대한민국 4년중 음력세차 임술년 월표 급 절후표’를 단도에 배포하였고, 일본의 간도총영사는 이를 단속하여 외무성에 보고하였다. - P112

력의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양력과 음력의 문제였다. - P112

설이 이중과세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추석은 민족의 명절로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민족을 지켜가는 의례적 장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략) 단오는 민속적인 행사를 했지만, 점차 각 지역에서 근대적 의미의 운동회를 개최함으로써 봄 운동회날로 그 의미가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어떤 경우에는 6월 10일 시의 기념일과 단오가 겹치기도 하였다. - P115

국가의 근대적 시간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가 표준시의 문제이다. 조선에서 표준시의 문제는 한두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 1912년 도쿄를 지나는 선을 표준으로 한 이래 일제 지배 기간 내내 그대로 관철되었고, 1950년대에 서울을 지나는 선으로 바뀌었다가, 1960년대에 다시 환원되었다. - P116

일제하에서 이루어진 시간관념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시의 기념일’ 제도가 존재한다. 일제하에서 매년 6월 10일은 ‘시의 기념일’로 조선총독부와 지방관청은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시간에 관한 계몽사업을 1921년부터 실시하였다. - P117

‘시의 기념일’은 시계의 기계적 원리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시계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시계는 점차 근대인의 중요한 필수품이 되었고, 장식된 시계는 의례의 중요한 예물이 되었다. 또한 시계는 자본주의적 시장개척의 현상 선물로 자주 이용되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일본의 시계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 P118

시의 기념일의 핵심적인 구호는 ‘시간존중’과 ‘정시여행’이었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지키자’, ‘시계를 바르게 맞추어라’ 등이 시의 기념일의 세 가지 축을 나타내는 대중적 표어였다. 이는 곧 식민지 국가권력에 의한 근대적 시간 캠페인을 주도하고 시계산업에 종사한 상인들에 의해 뒷받침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계 상인들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 P119

근대적 시계가 들어오고 시간관념이 형성될 때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의 그림이나 상징이 12시간, 또는 24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의 공간적 도형에 접합되었다. 자정이나 정오, 오전과 오후라는 용어는 모두 쥐나 말과 같은 12간지의 동물로부터 연원하였는데, 이 용어의 기원이 언제 어디서부터 사용되었는지 불분명하다. - P122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38년부터는 시의 기념일에 경성부에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황궁요배 및 ‘무운장구’를 비는 1분간의 묵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능률증진이 시의 기념일의 구호에 덧붙여지기 시작하였고, 근로봉사라는 이름의 동원이 강화되고 있었으며, 양력실행운동을 강화하였다. - P122

조선민족이나 구황실의 기념일이 아니라 일본의 천황제와 관련된 경축일이 조선에서 그대로 시행되었다. (중략) 1927년 3월, 조선총독부는 칙령 25호로 ‘제일 및 축일,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국가경축일과 공휴일이 명백히 연관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념일의 의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명치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가 ‘절’로 전환되었다. 육군기념일, 해군기념일 등이 경축일에 추가되거나 기존의 경축일을 일부 대체하였다. 육군기념일에는 조선군이 용산 일대에서 퍼레이드를 대대적으로 펼침으로써 시간으로서의 기념일을 공간적으로 가시화하였다. - P124

일제 지배하에서 중요한 기념일은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 등 일본의 왕실과 결부된 것이 많았다. (중략) 일제하 기념일에서 특이한 것은 군사 관련 기념일, 즉 육군기념일과 해군기념일이 매우 중요한 기념일로 지켜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125

군사 관련 기념일 외에 조선총독부는 매 5년마다 ‘시정기념일’ 행사를 성대하게 하여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종종 공진회나 박람회를 동반하여 자신들의 지배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작용하였다. 특히 30주년 기념행사는 동원체제와 맞물려 큰 규모로 행하였다. - P127

한편으로는 공식적 기념일과는 다른 대안적 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일종의 기억투쟁이 존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갖가지 형태의 습속적 저항이 존재하였다. - P127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사건 발발일은 일제의 명치절이었지만, 조선 학생들로 볼 때는 음력으로 개천절이었다. 양력과 음력, 일본 국가의 기념일과 조선 민족의 기념일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했던 것이다. - P128

식민지 권력이 부과하는 기념일에 대한 또 하나의 저항은 전통적 시간감각에 기초한 민중들의 습속이다. 습속적 저항은 주로 세시적 축일을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민족의 세시풍속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은 설과 단오, 추석이었는데, 단오와 추석이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진 반면 설은 끊임없이 식민지 권력 및 지식인 집단의 프로젝트가 민중적 습속에 부딪치는 장이었다. - P129

한국에서 ‘일상생활’은 1920년대에 역사적으로 성립한 개념이다. 1920년대 ‘생활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이 ‘표준’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고가 자리잡았고, 이것은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을 형성시켰다. 여기에는 ‘표준’을 내세워 계급적 양극화를 절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 P129

각종 계몽의 담론이 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였다면, 시간체제는 보다 심층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포괄한다. 근대적 시간체제의 식민화는 한편으로는 1910년대 초반의 국가 경축일의 일본화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 1920~30년대의 시의 기념일 제도를 통한 시간사용의 합리화 캠페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 P130

총동원 시간체제는 일주일 단위의 동원이 자주 발생하고 또한 의례의 정교화를 통한 행동적 정신적 동원을 강화한다. 이는 민중적 생활세계뿐 아니라 가장 자유가 널리 허용된 대학사회에서도 관철된다. 총동원체제는 노동을 늘리고 소비를 억제하면서 일상의 시간적 재조직화를 시도했지만, 동원에 필요한 각종 기념일과 의례의 강화를 낳으면서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 후의 식민지적 유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즉, 이 시기의 캠페인성 프로젝트들이 1960~70년대의 국가주도형 경제성장에서 재생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식민권력에 의해 조선민중에게 부과된 시간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민중들에게 의례를 통한 동원에의 익숙함과 반의례적 정서를 동시에 물려준 듯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생활양식이나 시간체제의 식민화 속에 대안적인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시간적 관념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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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15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부분부분, 유용해서 원작 클릭하니 품절이네요^^ 늘 공부하시고 나눠주시는 모습 보기도 좋고 감사드립니다

Redman 2021-04-15 17: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네 품절 도서인데 내용이 좋은 것들은 같이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ㅎㅎ 그래도 이전에 올린 <개발 없는 개발>은 아직 판매중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