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씨저 나남 셰익스피어 선집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성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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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씨저>라는 텍스트는 정치의 정당성과 조건에 관해 묻고 따지는 작품이다. 줄리어스 씨저의 살해 동기와 브루터스의 몰락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는 늘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정당한 근거 위에서만 정치는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다. 줄리어스 씨저는 왜 죽었는가? 그가 너무 오만했기 때문이다. 브루터스에게 씨저의 오만함은 로마공화정의 전통적 덕, 다른 말로 로마의 정신을 형성하였던 요소에 대한 부정으로 비춰졌고, 로마의 통치자로서 씨저가 가진 정치적 권한의 정당성을 넘어선 일이었다. 캐씨어스는 씨저가 신처럼 되려고 한다면 못마땅해한다.

 

나 자신 하나만 놓고 본다면,

나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자를 두려워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일세.

나 씨저 못잖은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자네도 그래.” (1293~96)

 

이 부분은 씨저의 오만에 대한 캐씨어스의 개인적 원한 감정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보다 넓게는 정치적으로 씨저의 비극을 만든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씨저의 오만함에 근저에는 그의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씨저는 어느 순간 신과 같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아직 압제자로서의 횡포를 보인 적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2110~34행 참조). 이런 정치 형태는 전통적 공화정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도자로서 씨저가 킹십(kingship)을 상실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캐씨어스는 바로 이 점에 입각하여 브루터스가 암살 모의에 참여하도록 설득한다. 캐씨어스는 로마의 기백’, 즉 로마의 전통을 거론한다. 씨저로부터 로마의 공화정적 전통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이들의 대의명분이다.

 

암살의 동기가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든(캐씨어스), 공공의 대의이든(브루터스)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씨저의 전제적 정치를 비판하며 그를 살해했고, 따라서 씨저 암살자들은 로마공화정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으로써 씨저 암살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리고 정당성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브루터스라는 도덕적 우월성과 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의 존재는 매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 텍스트는 초반에 정당한 정치에 대해서 물으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반()씨저 동맹이 기여한 부분은 딱 거기까지이다. 씨저를 죽인 다음, 그들은 분열하며 옥테이비어스와 안토니에게 패배하고 브루터스와 캐씨어스는 자결한다. 왜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여 자신들의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던 것일까?

 

씨저에 대한 적대감을 제외하면 반()씨저 동맹을 묶어주는 어떠한 이념적 지향이나 정치적 실천 프로그램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캐씨어스가 씨저 암살을 계획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과 같은 인간이면서 꼭 신처럼 행세하는 씨저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공공의 대의를 위해 나선 브루터스와는 애초에 동기가 달랐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씨저 사후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43장에서의 브루터스와 캐씨어스의 논쟁은 단순히 속물적인캐씨어스와 영웅적 덕성의 브루터스 사이의 갈등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씨저의 질서를 대신할 통치 질서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해 생긴 혼란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너무 조급했다. 씨저라는 권력자를 죽인 뒤 필연적으로 생길 정치적 공백을 어떻게 해결할지, 씨저 사후 로마를 어떻게 이끌지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합의도 없이 그들은 그저 씨저를 죽이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불확실한 예언의 날짜에 맞추어 그를 암살했다. 사실 이 지점에서 그들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브루터스는? 브루터스는 로마공화정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 이미 작품 곳곳에서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브루터스의 이러한 의도는 외적으로도 공인받은 것이다.

 

브루터스는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역자 이성일이 말하는 대로 브루터스는 이상주의자였다. 브루터스의 덕성에 대해서는 그의 정적인 안토니의 대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분은 저들 중에서 가장 고매한 로마인이었소. 사해 모의자들 모두가 이분만을 제외하고- 위대한 씨저를 시기하였기에 그 짓을 하였소. 오직 이분만은, 사심 없는 명예로운 명분과 모두를 위한 공공의 선 때문에, 저들의 일원이 된 거요. 이분의 생애는 고결한 것이었고, 인성의 기질들이 이분 안에 조화를 이루었기에, 대자연마저도 일어서서, 온 세상을 향해 말하리오: ‘이 사람 사나이였다!’라고.” (5568~75)

 

브루터스는 로마의 전통적 공화주의 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로마의 공화정을 신앙처럼 여긴다. 그가 씨저 암살 모의에 참여한 것도 씨저를 죽이고 로마공화정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의 의도나 순수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브루터스 자신도 자신의 올바름에 대한 자각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로마 인민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했다. 연설에서 왜 씨저를 죽였는지 설명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그를 새로운 씨저로 받들자는 것뿐이었다. 반면에 안토니는 탁월한 정치적 혜안과 수완으로 로마인의 지지를 받는다. 브루터스는 이상만 앞섰지,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절대 권력자를 살해했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장과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로마인의 지지 확보 실패이다. 공화정의 회복이라는 브루터스의 대의명분은 현실에서 실효적 힘을 가지지 못했다. 다른 하나가 씨저에게 충성을 보였던 안토니를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씨저 암살은 결과적으로 브루터스의 정적 안토니와 옥테이비어스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뿐이었다.

 

정치 정당화에 대해, 플라톤처럼 초월적 근거를 통해서 정치 정당화 근거를 마련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실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를 찾으라는 마키아벨리도 있다. 또 막스 베버처럼 정치 권력을 소명(beruf)으로 여기고 그 소명에 합리적인 정당화 근거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할 수도 있다. 정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다른 말로 덕스러운 목적과 이기적인 목적 사이에서 작동한다. 한쪽의 독트린만을 교조적으로 따를 경우 정치 사회는 치명적 결과를 맞는다.

 

이 작품을 다시 정의하자면, 정치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조급한 이상주의자의 파멸로 끝맺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터스가 보여주는 것은, 이상주의적이기만 한 정치가 가져올 파멸적 결과이다.

 

 

여담으로, 개인적으로 느꼈던 감상은 <줄리어스 씨저><맥베스> 사이에 유사성이 꽤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줄리어스 씨저를 <맥베스>의 덩컨 왕에, 브루터스를 맥베스에 대입해보자. 그러면 우선 부하가 왕(씨저는 왕이 아니긴 하지만)을 죽인다는 플롯이 유사하며, 그 이후 맥베스의 파멸도 브루터스의 몰락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씨저> 21장에서 브루터스가 씨저에 대한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와 공공의 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부분은,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할지 말지 망설인 부분과 겹친다. <씨저>의 예언자와 <맥베스>의 마녀 등 <맥베스>가 연상되는 부분은 이 외에도 많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씨저>의 플롯과 주제 의식을 한층 더 농축하여 발전시킨 작품이 <맥베스>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정치와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 <맥베스>를 다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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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0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우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Redman 2021-10-08 20: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scott님도 이번달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1-10-08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축하드려요 *^^*

Redman 2021-10-08 20: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mini74님도 이달의 리뷰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10-08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꼼꼼히 읽게 되는 페이퍼!
축하드려요 ~^^

Redman 2021-10-08 20:57   좋아요 2 | URL
매번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ㅎㅎ 늘 나츠메 소세키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서니데이 2021-10-08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Redman 2021-10-08 20:5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1-10-1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1860년대 뉴욕시 최하층민이 거주하는 파이브 포인츠를 배경으로 '토착파'(Natives) 갱단의 알력 싸움, 미국 최하층의 삶, 그리고 암스테르담 발론(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토착파와 아일랜드 이주민 계열의 '데드래빗'(Dead Rabbits)파의 패권 싸움으로 시작한다.

토착파는 개신교 계열에 (지들도 이주민의 후손이면서) 자신들이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에 젖어 산다. 아일랜드계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데드래빗파는 이들의 텃세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 잔인하게 죽고 죽이는 가운데 데드래빗파의 수장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은 토착파의 두목 윌리엄 커팅(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죽으면서 전투는 끝난다.

프리스트 발론의 아들인 암스테르담 발론은 도망치고 16년이 지나 성년이 되었다. 다시 파이브 포인츠로 되돌아온 그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커팅의 밑에서 생활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커팅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발론은 수적으로 더 압도적인 아일랜드계를 규합하여 데드래빗파를 재건하고 토착파에 대항할 방법을 찾는다. 우선은, 자신들을 위한 정치인을 세우겠다는 작전을 짠다. 약간은(?) 지저분한 선거였지만, 선거 결과 과거 프리스트 발론의 동료기도 했던 월터 맥긴을 당선시킨다. 하지만 아일랜드계 후보가 승리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커팅이 대낮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맥긴을 살해한다. "친구들, 이걸 소수표라고 하지"라는 말과 함께.

발론은 맥긴의 장례식에서 커팅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 말은 영화 첫 장면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쪽이 끝장날 때까지 싸우자는 의미이다. 그 다음날 데드래빗파와 토착파는 16년 전 그때처럼 다시 피터지는 전투를 앞두고 마주서게 된다.

한편, 이 시기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충원을 위해 징병법을 제정하여 징병대상자를 발표했는데,이것이 뉴욕 빈민층, 특히 아일랜드계 빈민층을 자극하였다. 불공평한 징병대상자 선정 때문이었다. 징집을 피하고 싶으면 300달러를 내야했는데, 문제는 가난한 이주민들에게 300달러는 너무 큰 액수였다는 것이다. 부자들만 따로 병역을 피해갈 여지를 준 이 법에 하층민을 불만이 높았고 이 불만이 터져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경찰 인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병력을 출동시켰고, 군대의 압도적 화력 앞에서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런데 데드래빗파와 토착파의 결투날이 바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날과 겹쳤다. 싸움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이들 앞에 갑자기 대형 함포가 떨어져 결투 장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시작도 못해본 것이다. 포탄 세례와 흙먼지 속에서 발론은 커팅을 죽이고 승리하지만 이 전투는 이미 미국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순간이었다.

16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 권력이 아니라 지역 내 갱단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전통적인 방식의 폭력적 수단은 국가의 힘 앞에 가로막히게 된 것이다. 갱단의 폭력적 질서는 국가라는 더 상위의 조직의 폭력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통치는 갱이 아니라 국가가 하며, 폭력적 수단도 국가가 독점한다. 이제 아일랜드계, 토착파 할 것 없이 어느 갱 소속이기 이전에 미국의 국민이며, 갱단 보스의 명령과 규율이 아니라 국가의 법과 질서하에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야흐로 갱단의 질서는 갔고 국가의 질서가 사회 구석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의 강력한 질서 속에서 과거의 역사는 잊혀진다. 결말에서 영화는 커팅과 프리스트 발론의 묘비를 원거리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묘비의 뒤에는 뉴욕시의 전경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뉴욕은 번창하여 고층빌딩이 늘어선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만, 전통적 미국을 상징하는 발론과 커팅의 묘비는 흔적도 사라진다.

여기까지가 대략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무엇이 있는지보다 무엇이 없는지를 더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토착파 미국인과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그리며, 양자는 서로의 이권을 위해서 싸운다. 우습게도 토착파는 지들이 진정한 미국인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그들의 인식 속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도 아메리칸 원주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실상 권리 투쟁의 자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목소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은, 제니 에버딘이 발론에게 샌프란시스코로 도망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커팅에게 발론의 정체가 탄로나자 뉴욕에서 기회의 땅인 샌프란시스코로 가자고 한다. 제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며, 사람들은 강가에서 황금을 건진다고 얘기한다. 당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발 골드 러쉬로 촉발된 서부 개척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이 발견되자 너나 할 것 없이 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동했으며, 이를 계기로 샌프란시스코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서부 개척이니, 기회의 땅이니 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일 뿐 원래 이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멋대로 하페치고 유린하는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착취당했고 자신이 살던 땅에서 쫓아났다. 그들에게 서부 개척은 기회가 아니라 재앙 그 자체였다. (이런 역사를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참조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로 자신과 같이 떠나자는 제니 에버딘의 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그곳이 그저 과거를 잊고 발론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재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일부러 대상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드러낸 것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이라는 땅의 동쪽 끝에서는 자칭 토착파가 이주민들을 차별하고 지역질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진정한 토착 원주민이 이주민 백인 세력들에 의해 삶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었다. 토착파를 이끄는 윌리엄 커팅은 열렬한 애국주의자였다. 그는 "진정한 미국인"으로 죽을 수 있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그의 애국과 그의 조국에 토착 원주민은 없었다. 감독은 한쪽만 보여주어 무엇이 없는지를 은연중에 드러내어 토착파와 데드래빗의 이권쟁투를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감독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현대 미국인이다. 위에서 얘기한 결말 장면에 더해 엔딩 크레딧도 현대인을 간접적으로 지목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동안에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이 걷는 등 일상적인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마치 그때까지 있었던 격동의 사건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일상을 살아간다. 감독은 결말과 엔딩 크레딧을 통해 지적하고 싶었던 것도 현대 미국인이 무엇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였을 것이다.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어떤 낭만화나 미화도 없이 건조하게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이 건조함이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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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 (1disc) - 할인행사
데이비드 핀처 감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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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1969년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었다.

'조디악'이라는 연쇄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고 붙잡기 위한 경찰과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기가 주된 내용이다.

이 영화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끈질김'이다.

우선 영화는 갈피도 안 잡히는 조디악의 정체를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알아내려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건 담당 형사 데이브 토스키(마크 러팔로우),

신문사 삽화가이지만 누구보다 조디악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는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

이 둘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이들은 작은 단서 하나 놓치지 않고, 관련 기사나 자료를 끊임없이 되짚어가며 조디악을 추적한다.

무려 20년이 넘도록.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에 나온 조디악 피해자가 데이브와 로버트가 특정한 조디악 유력 용의자의 얼굴을 지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자막으로 후일담이 나오는데, 다소 충격적인(?) 수사 결과와 함께

여전히 조디악 사건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범인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가 개봉된 것이 2007년이니, 조디악 사건이 발생하고 거의 40년이 지난 뒤이다.

범인을 잡기 위한 이들의 끈질긴 노력을 담고 있는 영화에게는 가장 알맞은 결말이다.

2시간 30여분 정도되는 러닝 타임에서 극적인 갈등이나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는 거의 없다.

흥미로운 플롯이나 구조도 발견하기 어렵다.

감독은 그저 다큐멘터리처럼 범인을 찾기 위한 과정만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정말 끈질긴 인물들과 끈질긴 영화이다.

그런 장면이 계속 이어지니 피로감이 쌓이고 지루할 법도 한데,

배우들(마크 러팔로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이크 질렌할)의 열연과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는 감독의 연출이 이 끈질긴 영화를 계속 보게 한다.

오히려 불필요한 내용들이 거의 없어

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매우 깔끔한 뒷맛을 느낄 수 있다.

미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살인의 추억>과는 또 색다른 느낌의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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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9-17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오늘부터 추석연휴 시작입니다.
즐거운 명절과 좋은 주말 보내세요.^^

Redman 2021-09-17 21:1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연휴되시길 바랍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개정2판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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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최장집의 문제의식은 87년 민주화 이후에 군사 독재가 끝났음에도 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았는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는가이다.

 

최장집은 87년 이후 민주화가 보수적이었다고 규정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보수 편향적 대표 체제라는 것이다. 그가 봤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수적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냉전 반공주의이다. 대한민국은 국가 건설 단계에서부터 좌우갈등을 통해 적대적 이념과 세력을 배제하며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냉전적 반공주의는 더욱 심화되었고 사회의 지배 구조와 사고의 틀을 이분법적이고 단순 도식적인 구조로 바꾸고 이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담론적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좌우 갈등과 냉전 반공주의의 확립은 한국 사회에 이념적 획일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모든 것은 A 아니면 B. 그 중간이란 없다. 중간 지대에 있었던 조봉암 같은 인물에게는 곧바로 빨갱이 딱지가 붙기 십상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강력한 권위주의적 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약한 정당과 약한 대표성의 문제이다. 강력한 국가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박정희식 모델이다. 쿠데타로 집권하여 통치의 정당성이 약했던 박정희 정권은 정부의 수행 능력과 효율성에서 부족한 정당성을 찾았고, “성장, 효율성, 목표 달성이 그들의 철학이자 가치였다. 고도성장 정책을 국가 목표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발전주의는 국가 이념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방대한 행정 관료기구의 조직과 중앙정보부라는 국가기구의 신설은 권위주의적 노선의 정치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또 한편으로, “냉전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의 틀을 조직하고 그 틀 내에서 허용되는 정치적 실천과 이념의 범위를 매우 좁게 제약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 참여와 정당에 의한 대표를 큰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조건 속에서 한국의 정당은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이익이나 요구에 기반을 둔 대표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냉전적 반공주의가 다른 사상이 끼여들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선거 경쟁에 들어온 그 어떤 정당도 보수적 이념 이외의 것을 대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 사회의 균열과 갈등은 정당을 통해 표출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1987년 이후 정당이 대중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향리적, 연줄 관계적, 지역 분획적 방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구와 같은 일반적 형태의 정치 균열로 발전하지 않았다.” 지역주의의 균열이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 편향적이고 지역균열은 사회경제적 내용을 결여한 담론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정당들은 이념적으로 협애한 대표 체제를 가지고 있고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괴리됨으로써 정당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못 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사회가 어떻게 변했을까? 한국의 경우 민주화 이후 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국가무력한 정부의 문제이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문제를 이해할 방법은 헤게모니, 구체적으로 하나의 정부가 냉전 반공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념을 정권의 핵심적 가치 정향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보수적 기득 이익의 지지를 받는정치적 현실에 있다. 냉전 반공주의를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헤게모니를 얻기 위하여 민주화 정부가 스스로 보수적 이념 지향을 흡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야당과 그 후보는 선거 경쟁에서 이념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드러냈고, 그 결과 투표자의 지지와 선출된 자의 책임성 사이의 관계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기보다 매우 느슨하고 모호하다.” 이러한 지지자와 선출 권력 사이의 느슨한 책임성의 고리는 집권 정당의 정체성 상실로도 이어졌다. 민주화 정부는 권위주의와 냉전 반공주의의 논리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적 대안과 비전을 제시할 기회에 실패한 것이다. “국가의 운영 원리라는 점에서 민간 정부와 앞선 권위주의 정부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최장집의 분석은 집권 정당의 느슨한 책임성과 대표성의 결과이며, 또한 국가는 강력한데 정부는 무력한 문제의 결정적 원인이기도 한다. “새로운 발전 모델을 제시하지 못한 정치 엘리트들은 점차 관료에 의존하게 되고, 곧 관료에 포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정부의 선출된 정치 엘리트들이 민주국가의 발전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가를 공직 배분의 장으로 여길 때, 정책 의제를 설정하고 결정을 내리는 기본적 과업이 모두 관료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대통령의 권력에 의해 보호된 기술 관료들은 언제나 듣던 성장·효율성·질서·안정이라는 익숙한 소리만을 외치게 되는데, 국민을 대표한다는 신화는 이렇게 대표와 투표자가 격리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군부의 권위주의 독재하에서는 이런 체제가 운영되는 것이 이해되어도, 민주화 이후까지도 지속되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한국 민주화 이행의 보수성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화 이행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협약에 의한 민주화라는 특징을 가진다. 구체제를 해체한 힘은 운동권에서 나왔지만,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힘은 신민당 같은 야당으로부터 나왔다. , “한국 민주주의의 이행 과정에서는 냉전 보수주의의 정치 엘리트만이 이행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대표되고, 운동의 중심 세력들이 완벽하게 배제되는 급격한 단절이 만들어졌다. 이는 이후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보수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운동권도 그들의 가치와 이상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역량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역시 민주화의 보수적 귀결에 영향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보수라는 이념적 호칭은 이름뿐, 시민들의 실생활 문제와 직결된 대안적 정책들을 민주화 정부는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한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인 듯하다. ‘한국식 민주주의라 하면, 박정희 정권 때 독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던 왜곡된 선거제도와 민주주의를 떠올릴 수 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우덜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정으로 한국의 일상과 정치 현실에 뿌리박은, 다시 말해 한국의 갈등 상황과 계층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여러 대중 조직이 자유로운 선거 경쟁을 통해 대중 권력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의 한국식 민주주의다. 정치 비관론자나 정치에 대한 광범위한 무관심 현상은 민주주의적 정치, 즉 대표성과 책임성의 원리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올해는 19876월 민주화 이후로 34년이 지난 해이다. 한 세대가 지난 셈이다. 이제는 민주화를 이끈 주체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민주 주체들의 민주주의 이해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그리고 정치 엘리트들이 만든 87년 체제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좌표를 찍을 때, 우리의 민주주의 이해도 더 깊어지고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한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 정도는 민주주의 이해 정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남는 의문:

최장집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이는 대중정당을 통해서, 즉 대의제 민주주의를 회복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버나드 마넹이 주장하듯이 선거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와 선출 권력은 민주정보다는 귀족정적 요소에 더 친화적이다(<선거는 민주적인가>, 4장 참조). 편파성(공직 진출 가능성의 편파성 및 후보자에 대한 편파적 평가)과 탁월성의 원칙을 큰 특징으로 삼고 있는 선거는 수동적 시민의 문제를 야기한다. 소극적 시민의 양산이 반드시 취약한 대표성 때문만은 아닌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의제하에서 그가 주장하는 대중정당과 정당 민주주의는 얼마만큼 기존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적 균열에 기초한 정당체계도 결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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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9-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의제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와 귀족정이라는 말씀에 한표입니다. ^^

Redman 2021-09-02 15:45   좋아요 1 | URL
마넹의 선거란 민주적인가 안 읽어보셨다면 추천드립니다 ㅎㅎ

북다이제스터 2021-09-02 15:50   좋아요 1 | URL
자와 독서 취향이 좀 비슷하신 것 같아서 반갑습니다. ㅎㅎ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선거는 민주적인가>모두 이미 사 놓았는데,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조만간 꼭 읽어보겠습니다. ^^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하고 있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는 문고본 분량에 각각의 주제에 입문서 격 역할을 하는 책들을 내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원서는 500권 가까이 나왔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시리즈입니다.

국내에서는 교유서가에서 '첫단추 시리즈'로 이 시리즈를 꾸준히 출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워낙 유명하다보니 이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이 시리즈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그동안 국내에 출판된 'A Very Short Introduction'를 모아봤습니다.


1)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국내에서도 유명한 시리즈입니다. 저는 대략 이 정도만 구매하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늘 뒤에 더 읽을 거리도 저자들이 추가해두었습니다.

영어권 독자 기준이다보니, 저자가 추천하는 책이 국내에 번역됐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번역자분들이 국내에 번역본이 있으면 따로 표시합니다.

특히 이재만 씨 같은 번역가분은 저자가 만든 독서 안내 이외에 또 추가로 국내 독자들을 위한 더 읽을 거리도 적어두어 매우 도움이 됩니다.




2) 비아 교양

 성공회 계열 출판사 '비아'에서 <구약> <신약> <예수> <성공회>를 번역했습니다. 


<예수>를 쓴 리처드 보컴은 <예수와 그 목격자>들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학자인데, 몇년전에 이 책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말고 <성서>는 교유서가에 번역되어 있는데, 역자는 이재만 씨입니다. 








3) 그리스도교를 만든 3인의 사상가

제가 신뢰하는 출판사인 뿌리와이파리의 '그리스도교를 만든 3인의 사상가'라는 시리즈로 

<사도 바오로>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를 번역했습니다. 

각 책을 저술한 E.P.샌더스, 핸리 채드윅, 스콧 헨드릭스는 모두 각 분야의 권위자입니다. 


세 명 모두 한국에 다른 저작들이 출간되어 있는데,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비싸기도 하고, 아직 제가 사서 읽을 책은 아닌 듯하여 안 샀습니다. 핸리 채드윅의 <초대교회사>나 스콧 헨드릭스 <마르틴 루터>는 소장하고 있는데, 둘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를 만든 3인의 사상가 3권 중 2권이 현재 절판됐습니다. <마르틴 루터>만 남았는데, 보아하니 며칠 안 가 이 책도 절판될 것 같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얼른 구매하시길..


 참고로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에서는

스티븐 하우의 <제국>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절판)

번역자는 강유원, 한동희 씨입니다. 







4) 한겨레지식문고


한겨레지식문고에서 9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없는 한 권은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인데, 이 책은 교유서가에서 원서전면개정판이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어 있어 뺏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정치학>도 원서가 제4 개정판까지 나왔습니다.

시리즈 전체가 절판되었지만, 아직은 중고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5) 기타

나머지는 여러 출판사에서 한 두권 정도 출간한 걸 모았습니다


폴 S. 보이어,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


테리 이글턴, <인생의 의미> - 이런 것도 입문서가 있네요


마가렛 월터스, <여성 인권의 역사>


콜린 워드,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로버트 영,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로저 스크러튼, <아름다움>


미리 루빈, <중세>

에릭 클레인, <성서 고고학> <트로이 전쟁>


버나드 크릭,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


스티브 스미스, <러시아혁명>






시공 로고스 총서도 very short introduction을 번역한 시리즈이기는 한데,

워낙 예전에 나와서 개정판이 나온 원서가 많을 것 같아 여기서는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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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29 0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읽은 교유서가의 인류세가 이 씨리즈 였군요. 글이 굉장히 매끄럽고 잘 읽히던데 역시!
다른 책들도 신뢰가 갑니다!

Redman 2021-08-29 11:46   좋아요 1 | URL
믿고 읽을 수 있는 시리즈죠 ㅎㅎ

얄라알라 2021-08-29 0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유서가 시리즈 달랑 2권 정도 읽었는데 500권의 방대한 군집이라니!

이렇게 소개해주시니 봤던 시리즈도 다시 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포스팅^^

Redman 2021-08-29 11:46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면 참 다행입니다 ㅎㅎ

얄라알라 2021-08-29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지식문고는 생소한데, 이렇게 안내해주셔서 보니 표지가 참 좋네요! 다 읽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