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뉴욕시 최하층민이 거주하는 파이브 포인츠를 배경으로 '토착파'(Natives) 갱단의 알력 싸움, 미국 최하층의 삶, 그리고 암스테르담 발론(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토착파와 아일랜드 이주민 계열의 '데드래빗'(Dead Rabbits)파의 패권 싸움으로 시작한다.

토착파는 개신교 계열에 (지들도 이주민의 후손이면서) 자신들이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에 젖어 산다. 아일랜드계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데드래빗파는 이들의 텃세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 잔인하게 죽고 죽이는 가운데 데드래빗파의 수장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은 토착파의 두목 윌리엄 커팅(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죽으면서 전투는 끝난다.

프리스트 발론의 아들인 암스테르담 발론은 도망치고 16년이 지나 성년이 되었다. 다시 파이브 포인츠로 되돌아온 그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커팅의 밑에서 생활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커팅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발론은 수적으로 더 압도적인 아일랜드계를 규합하여 데드래빗파를 재건하고 토착파에 대항할 방법을 찾는다. 우선은, 자신들을 위한 정치인을 세우겠다는 작전을 짠다. 약간은(?) 지저분한 선거였지만, 선거 결과 과거 프리스트 발론의 동료기도 했던 월터 맥긴을 당선시킨다. 하지만 아일랜드계 후보가 승리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커팅이 대낮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맥긴을 살해한다. "친구들, 이걸 소수표라고 하지"라는 말과 함께.

발론은 맥긴의 장례식에서 커팅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 말은 영화 첫 장면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쪽이 끝장날 때까지 싸우자는 의미이다. 그 다음날 데드래빗파와 토착파는 16년 전 그때처럼 다시 피터지는 전투를 앞두고 마주서게 된다.

한편, 이 시기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충원을 위해 징병법을 제정하여 징병대상자를 발표했는데,이것이 뉴욕 빈민층, 특히 아일랜드계 빈민층을 자극하였다. 불공평한 징병대상자 선정 때문이었다. 징집을 피하고 싶으면 300달러를 내야했는데, 문제는 가난한 이주민들에게 300달러는 너무 큰 액수였다는 것이다. 부자들만 따로 병역을 피해갈 여지를 준 이 법에 하층민을 불만이 높았고 이 불만이 터져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경찰 인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병력을 출동시켰고, 군대의 압도적 화력 앞에서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런데 데드래빗파와 토착파의 결투날이 바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날과 겹쳤다. 싸움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이들 앞에 갑자기 대형 함포가 떨어져 결투 장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시작도 못해본 것이다. 포탄 세례와 흙먼지 속에서 발론은 커팅을 죽이고 승리하지만 이 전투는 이미 미국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순간이었다.

16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 권력이 아니라 지역 내 갱단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전통적인 방식의 폭력적 수단은 국가의 힘 앞에 가로막히게 된 것이다. 갱단의 폭력적 질서는 국가라는 더 상위의 조직의 폭력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통치는 갱이 아니라 국가가 하며, 폭력적 수단도 국가가 독점한다. 이제 아일랜드계, 토착파 할 것 없이 어느 갱 소속이기 이전에 미국의 국민이며, 갱단 보스의 명령과 규율이 아니라 국가의 법과 질서하에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야흐로 갱단의 질서는 갔고 국가의 질서가 사회 구석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의 강력한 질서 속에서 과거의 역사는 잊혀진다. 결말에서 영화는 커팅과 프리스트 발론의 묘비를 원거리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묘비의 뒤에는 뉴욕시의 전경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뉴욕은 번창하여 고층빌딩이 늘어선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만, 전통적 미국을 상징하는 발론과 커팅의 묘비는 흔적도 사라진다.

여기까지가 대략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무엇이 있는지보다 무엇이 없는지를 더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토착파 미국인과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그리며, 양자는 서로의 이권을 위해서 싸운다. 우습게도 토착파는 지들이 진정한 미국인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그들의 인식 속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도 아메리칸 원주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실상 권리 투쟁의 자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목소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은, 제니 에버딘이 발론에게 샌프란시스코로 도망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커팅에게 발론의 정체가 탄로나자 뉴욕에서 기회의 땅인 샌프란시스코로 가자고 한다. 제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며, 사람들은 강가에서 황금을 건진다고 얘기한다. 당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발 골드 러쉬로 촉발된 서부 개척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이 발견되자 너나 할 것 없이 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동했으며, 이를 계기로 샌프란시스코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서부 개척이니, 기회의 땅이니 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일 뿐 원래 이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멋대로 하페치고 유린하는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착취당했고 자신이 살던 땅에서 쫓아났다. 그들에게 서부 개척은 기회가 아니라 재앙 그 자체였다. (이런 역사를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참조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로 자신과 같이 떠나자는 제니 에버딘의 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그곳이 그저 과거를 잊고 발론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재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일부러 대상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드러낸 것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이라는 땅의 동쪽 끝에서는 자칭 토착파가 이주민들을 차별하고 지역질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진정한 토착 원주민이 이주민 백인 세력들에 의해 삶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었다. 토착파를 이끄는 윌리엄 커팅은 열렬한 애국주의자였다. 그는 "진정한 미국인"으로 죽을 수 있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그의 애국과 그의 조국에 토착 원주민은 없었다. 감독은 한쪽만 보여주어 무엇이 없는지를 은연중에 드러내어 토착파와 데드래빗의 이권쟁투를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감독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현대 미국인이다. 위에서 얘기한 결말 장면에 더해 엔딩 크레딧도 현대인을 간접적으로 지목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동안에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이 걷는 등 일상적인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마치 그때까지 있었던 격동의 사건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일상을 살아간다. 감독은 결말과 엔딩 크레딧을 통해 지적하고 싶었던 것도 현대 미국인이 무엇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였을 것이다.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어떤 낭만화나 미화도 없이 건조하게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이 건조함이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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