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은 사고뭉치 동화는 내 친구 72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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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이들이  생각지도 않게 사건을 벌일 때가 있다. 

내가 어릴 적엔 달고나를 해먹는답시고 태워먹은 국자가 서너개는 될 것 같다.  한 번은 한꺼번에 잔뜩 만들어 먹겠다고 냄비에 달고나를 만들었다가 냄비도 통째로 태워먹었다.  나는 식혜를 좋아했었는데, 엄마한테 식혜 좀 만들어달라고 졸라도 전업주부가 아니었던 엄마는 무슨 날이 아니면 잘 만들어주질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먹겠다며 찬 밥에다 우유와 설탕을 붓고 섞었더랬다. (식혜는 달고 하야니까 라는 이유 하나로) 어린 내가 먹어봐도 도저히 먹을 게 못되길레 키우던 개 밥그릇에 쏟아주었는데 개도 안먹었다.

그 뿐이랴, 친구랑 노는데 귀찮게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동네 남자아이가 있었다.  때마침 교회에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다윗 흉내를 낸답시고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무줄(당시 고무줄놀이가 유행이었다)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맹이를 묶어 겁만 준답시고 휙휙 돌렸는데 이 돌멩이가 어느틈에 고무줄을 빠져나가 그아이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었다.  물론 걔네집 할머니에게 무지하게 혼났다.  

어릴 적 우리집엔 식모언니가 있었다. 그 때 그 언니는 김을 재서 연탄불이었나, 석유곤로불이었나 에다가 석쇠로 김을 구었는데 그게 재밌어 보여서 나도 한번 해본다고 했다가 김에 불이 붙는 바람에 큰일이 날 뻔 한 적도 있다.  엄마가 애써 뜨개질 해놓은 것을 잡아당기면 솔솔 풀리는 게 재미있어서 몇단을 풀어놓는 사고를 친적도 있다.

에밀을 읽고 이렇게 어릴 적 나의 말썽 이력을 고백하게 되는 것을 보면 에밀이 우리의 잃어버린 동심과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린 누구나 에밀을 조금씩 닮았다.  에밀을 읽으며 어릴 적 내모습이 떠올라 웃음짓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게다.  그런 말썽을 부리고 나서 나도 엄마에게 혼난 기억은 없다.  에밀의 엄마처럼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친정 엄마도 어릴 적 무척 말괄량이였단다.)  나 역시 엄마가 되어 세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저지른 장난에 웃음부터 날 때가 있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 아이들은 돌멩이로 다른 아이를 맞힌적은 없으니 나보다는 착한 아이들이다. )

<에밀은 사고뭉치>를 읽으며 아이들은 자기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고 기뻐할 것이고, 어른들은 그 안에서 어릴 적 내 모습을 아련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이마를 감싸쥐게 만드는 말썽들을 사랑담은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삐삐와 마디타에 버금가는 에밀이라는, 사랑스럽지만 곁에 두기엔 뭔가 꺼려지는, 아이를 알게 되어 무척 기쁘다.  삐삐와 마디타, 에밀이 만나면 음....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그 엄청난 일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이 마음은 또 뭘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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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를거야, 내가 누군지 - 개정판 전통문화 그림책 솔거나라 11
김향금 지음, 이혜리 그림 / 보림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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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나라 시리즈는 처음 우리나라에 출판되면서부터 적지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었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족히 10년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첫애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으니까.

그 때까지만해도 우리나라 그림책이 많이 나오질 않았었는데 보림에서 세밀화 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반갑게도 우수한 그림책이 출판되기 시작했었다.  솔거나라 시리즈가 세상에 주목을 끌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 전통문화를 유아들 수준에 맞추어서 세심한 기획을 거쳐 출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네에 그림책과 애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줌마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입었던 그림책이다.  살림이 넉넉치 못했던 나는 아이들 데리고 집근처 큰 책방에 가서 그림책 구경을 하다가 오는 일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슬쩍슬쩍 책방 직원들 눈치를 봐가면서.. 어쩌다 맘먹고 그림책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신나는 날들이었다.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누군지>는 우리나라 전통 탈에 대한 이야기다.  '가면'하면 베트맨 가면, 스파이더맨 가면 등 미국 헐리우드 영화상품에 더 박식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탈의 개성있고 해학이 섞인 탈의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이 그림책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거기에 늘 바쁜 맞벌이 부모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건이는 도시 어린이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건이의 마음은 말썽과 심술로 나타나고 이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건이 편에 서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건이가 말썽을 부리고나서 다락방으로 숨어든다.  방에 놓여진 사진을 보니 아마 건이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전통 탈을 만드시는 분인가 보다.  어두운 다락방에는 탈이며 요강이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려있다.  무서움도 잠시, 우리의 용감한 건이는 탈을 쓰며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누군지.."하고 더 꼭꼭 숨어버리려 한다.  네눈박이 탈도 써보고, 소탈도 써보고, 양반탈, 말뚝이탈, 각시탈... 엄마처럼 예쁜 각시탈... 엄마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거다.  이 때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 할머니 탈을 쓰고 한번만 더 자기를 불러주기를 바란다.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다락문을 살짝 열었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가 다 와 있다. 건이 눈에서 눈물이 질끔..

건이는 엄마, 아빠가 자기를 봐주길 바랬던 아이다.  아무도 내가 누군지 절대로 모르게 숨어버리고 싶었던 아이가 아니다.  그런 건이가 하나씩 쓰고 보여주는 탈들을 아이들은 차곡차곡 마음에 쌓아둘지 모를 일이다.  뒤쪽에 이 책에 나왔던 탈들이 사진과 함께 좀더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부모와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을 것 같다. 

이혜리씨가 그린 표정이 살아있는 그림이 재미있다.   탈과 건이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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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혜리님 그림은 늘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쳐서 좋아요.^^

섬사이 2006-12-0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혜리씨만큼 아이들의 표정을 실감나게 잡아내는 작가도 드문 것 같아요. 이혜리씨 그림을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거든요.
 
남쪽의 초원 순난앵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1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김상열 옮김 / 마루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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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드그렌의 글들에 나오는 아이들은 대표적인 인물 "삐삐"처럼 활달하고 밝은 성격이다.  마디타도 그랬고 라스무스도 그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밝음을 유지하는 씩씩함에 읽는 사람까지 마음 든든해지는 그런 아이들..

그런데 <남쪽의 초원 순난앵>에 나오는 두 아이 마티아스와 안나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져버릴 것 처럼 작고 슬프다.  온통 시커멓고 어두운 잿빛 그림 속에 두 남매의 눈은 퀭해보이다 못해 마치 생명이 다 꺼져버린 듯이 빛을 모두 잃어버린 그런 눈이다.   거기다가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죽음까지 걱정해야 하는 극단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  희망하는 거라곤 오직 '올 겨울까지 견뎌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 뿐이다. 

한겨울 몇주간 동안만 열리는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지만 (이부분에서 잠시 눈내린 겨울 배경으로 그림이 환해지긴 한다) 추위에 발톱이 갈라지고 코끝이 빨개지는 온몸을 파고드는 혹독한 추위를 견뎌가며 간 학교는 두 아이에게 즐거운 곳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봄이 오기전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 앞에 빨간 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모든 희망도 꿈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조여오는 걸 느꼈다.  마티아스와 안나가 느끼는 절망감이 너무 캄캄하고 막막하게 느껴졌다. 

빨간 새를 따라 가다가 찾게된 순난앵의 따뜻한 봄의 세계. 행복하고 배부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인자한 눈빛과 손길로 아이들을 모두 감싸주는 곳이다.  마티아스와 안나도 빨간 옷을 입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이다.  순난앵은 아이들의 이상향이며 천국이다.  '순난앵'의 이름이 마티아스와 안나의 살던 고향마을과 이름이 똑같다는 것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죽음을 걱정했던 두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시절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을 마음을 담은 것이 아닐까. 

학교가 마지막으로 열린 날. 다른 부잣집 아이들이 놀려도 두 아이는 웃을 수 있을 만큼, 상처받지 않을 만큼 순난앵에서 느낀 행복의 크기가 마티아스와 안나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농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순난앵에 들른 마티아스와 안나는  한 번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는 순난앵의 문을 닫아버린다. 

린드그렌의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둡고 슬픈 이야기라 좀 벙벙했었다.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현실을 그대로 남겨둔 채 얻은 결말이라서 그럴까.  순난앵에서만 행복한 두 아이가 슬프다는 느낌이 더 진하다.   삐삐랑 마디타랑 라스무스랑 에밀까지 전부 총 출동해서 친구하라고 보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쪽 속표지에는 커다란 눈보라치는 숲을 걸어가고 있는 작디 작은 잿빛 두 아이가 그려있고, 뒷쪽 속표지에은 똑같은 숲이 온통 연둣빛 봄의 숲이 되어 빨간 옷을 입은 두 아이가 활기차게 어딘가로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있다.  앞표지에는 순난앵의 열리진 문으로 들어오는 두 아이와 그 아이들을 반기는 듯 호기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다른 아이들이 서있는 그림이고, 뒷표지에는 순난앵의 문이 사라진 담벼락이 그려져 있다.  이야기 전체를 참 잘 담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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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12-04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두운 헛간그림과 순난앵의 푸르고 아름다운 그림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던 기억입니다..

섬사이 2006-12-0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너무 대조되어서 슬픈건 더 슬퍼 보였어요.
 
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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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글이 애잔하게 내 마음 속에 흘러들었다.  서머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에겐 잃어버린 사랑이 너무 컸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사랑이 그랬고, 사랑밖에 없는 커다란 통 같았던 메이 아줌마의 사랑이 그랬다.  사랑이 큰 만큼 상실감도 컸고 그리움도 컸으리라.  그런 서머의 아픔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서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서머는 행복한 아이다.  잃어버린 사랑이 큰 만큼 남겨진 사랑도 크기 때문이다.  서머는 가엾은 엄마가 자기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져 때까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랑을 남겨 두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일게다.  우린 누군가에게서 사랑받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살아가는 내내 힘들 때마다 그 사랑을 펼쳐보면서 위안을 얻고 힘을 얻는다.  가끔씩 현실에서 고개를 돌려  사랑하고 행복했던 기억에 잠시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고단하고 팍팍한 현실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곤 한다.  그러니 어린 서머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던 기억은  고통의 완충제 노릇을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서머는 갑작스럽게 메이 아줌마를 잃었다.  생전에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필요한 곳에 늘 있어주었던,  사랑이 가득했던 메이 아줌마를 잃은 슬픔은 서머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걸까.  오브아저씨마저 흔들리는 것을 보며 혼자 남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서머의 마음이 자꾸 위태롭게만 보였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상실의 아픔보다 메이 아줌마가 남긴 사랑이 더 컸다.  아줌마의 빈 자리를 견디는 데 급급했던 서머에게 울음으로 쏟아낸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서머한테 불어넣어 준 아저씨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은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오브아저씨와 서머는 메이아줌마가 남긴 사랑으로, 메이 아줌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로를 붙잡는다.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고 마술처럼 삶의 의욕을 얻는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담에 내 아이들이 나를 그리워해주기를 바란다.  내 남편이, 내 친구가, 혹은 첫사랑의 상대가 두고두고 날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리워해주기를 바란다.  그리움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사랑을 주고 받지 못한 사람들끼리는 그리워할 수가 없다.  그런 이기적인 이유때문에라도 우리는 많이 많이 사랑해야 하나 보다.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더 많이 사랑을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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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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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엄마들보다도 오랫동안 나를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때까지 받은 사랑 덕분에 나는 다시 그러한 사랑을 보거나 느낄 때 바로 사랑인 줄 알수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아무도 나는 맡으려 하지 않았을 때도, 이모나 삼촌들 손에 끌려 이집 저집 전전할 때도 나는 그 사랑을 가슴 속 깊이 간직했으며, 아무도 나를 친딸처럼 받아들이지 않아도 투정을 부리거나 남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가엾은 우리 엄마는 나를 받아 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랑을 남겨두고 간 것이다. -11쪽

메이 아줌마는 밭을 가꾸다가 돌아가셨다. '밭을 가꾼다'는 표현은 아줌마가 즐겨 쓰던 말이다. 파예트 군에서는 누구나 밭에 일하러 나간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은 어쩐지 흙먼지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투덜대면서 일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메이 아줌마는 밭을 '가꾸었고', 아줌마가 그렇게 말하면 아주 사랑스런 사람이 머리에 노란 꽃 모자를 쓰고 어깨에 작은 울새들을 잔뜩 앉힌 채 귀여운 분홍 장미를 다듬는 장면이 떠오른다. -17쪽

그것은 단지 쓸쓸함일 뿐이었다. 등 뒤에는 오브 아저씨가 바람개비들이 잠들어 있는 낡은 트레일러 속에 혼자 남아 있고, 나는 이 캄캄한 길을 혼자 걷는다.
아저씨도 나도 메이 아줌마가 몹시 그립다. 이 어둠, 이 겨울, 그리고 이 차디찬 새벽에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19쪽

나는 메이 아줌마처럼 좋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오브 아저씨보다도 훨씬 좋았다. 아줌마는 오직 사랑밖에 없는 커다란 통 같았다.
오브 아저씨와 내가 몽상에 빠져 헤매고 다닐 때도, 아줌마는 늘 이 트레일러에서 우리가 돌아왔을 때 아늑하게 쉴 수 있도록 집 안을 정돈해 두었다.
아줌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고, 누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아줌마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다 믿었고, 그 믿음은 결코 아줌마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아줌마를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사람들은 아줌마가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만 본다는 점을 알고, 아줌마에게 그런 면만 보여 줌으로써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던 모양이다. -26쪽

지금 메이 아줌마가 여기 있다면, 나와 클리스터에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은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아줌마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곳이 이 세상만이 아니라고 일러주곤 했다. 이 세상의 삶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두 얻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라고. 또 다른 생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37~38쪽

일단 장례식을 직업으로 삼은 장의사나 목사들 같은 외부인들이 오고 나면 사람들의 슬픔마저 어떤 틀에 맞춰야 한다. 마치 극장에 들어가려면 누구나 줄을 서는 것처럼, 혹은 병원에 가서 앉아 있는 것처럼.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그저 트레일러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몇날 며칠이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짬도 없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거나 교회에 다니거나 아이를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친척이 죽어서 슬픔에 잠기는 시간도 정해진 틀에 따르기를 바란다. -54~55쪽

"너도 알겠지만, 오브 아저씨의 바람개비는 그게 뭔지 한눈에는 알아볼 수 없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건 하나도 없지. 아저씨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아저씨는 마당을 꾸밀 장식품 따윈 안 만들잖아. 예술 작품을 만들지. 나는 아저씨가 왜 바람개비들을 마당에 내다 걸지 않는지 알아. 아저씨는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생각 같은 건 없거든. 메이 아줌마는 그런 아저씨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준거야."
클리터스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저씨에게는 상상의 세계가 있어. 서머 너랑 똑같이. 하지만 넌 항상 그걸 떨쳐 버리려고 애쓰지."-58쪽

메이 아줌마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천사였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천사로 되돌아간다고. 그러면 다시는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지상에 머무르고 싶어할까? 왜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이 곳에 머무르려 할까?
예전에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다. -113쪽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울어 보지 못했다. 그저 아줌마의 빈 자리를 견디는 데 급급해서 지난 두 계절 동안 내 속에 차오르던 눈물을 안으로 삼켜 왔다. (중략)
아저씨는 나를 꼭 끌어 안고는, 내가 울음으로 쏟아 내는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나한테 불어넣어 주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 속의 눈물이 다 빠져나가서 가뿐해질 때까지 나를 안고, 크고 튼튼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나는 아저씨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메이 아줌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대답했다.
"아줌마는 여기 있단다, 아가야.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단다."-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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