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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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서영재라는 젊고 발랄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책 분석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내 거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뽀개질 것 같은데. 다른 사람 작품은 오락이고 휴식이에요. 고통은 작가가 쓰면서 충분히 받았을 테니까 나는 즐기는 거죠. 시간과 돈을 투자한 독자의 위엄입니다. 하하하” (35쪽)

생각해보면 정말 즐기면 그 뿐인데 나는 왜 또 꾸역꾸역 리뷰를 쓰겠다고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이 곳을 출판물 가락시장이라고 부른다. 글쟁이들이 농사짓듯 써낸 많은 원고들이 이곳에서 책으로 다듬어져 전국으로 유통된다. 이제 책의 운명은 독자의 몫이다. 날로 먹든 가공해 먹든, 삼으로 죽을 써서 개를 주든, 파뿌리를 구워 임금님 상에 올리든, 작가는 그것에 토를 달 수 없다. (63쪽)

그러니까 내가 이 밤에 컴을 켜고 책상머리에 앉아 이러고 있는 건 책을 요리해 먹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

 

『완득이』로 처음 만났던 김려령이라는 작가가 19금 성인 소설을 썼다는 말이 들렸다. 김려령 작가가 쓴 책이라면 첫 책 『완득이』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남아서인지 기대감을 갖고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인데 지금까지『완득이』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래서일까.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라면 완득이만큼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훅 밀려오는 감동이라든가 가슴 속에서 한동안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뭔지 모를 단단한 알맹이 하나를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어린이나 청소년 책을 비하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어린이나 청소년 대상의 책들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을 테니까, 다 큰 성인을 상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작가 입장에선 더 자유롭게 막힘없이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섣부른 짐작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것 같다.

 

마흔여섯 살의 미남 작가 정수현은 삶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불행한 사람이다. 삶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제대로 끼워져야 할 단추는 바로 가족일 터. 따뜻하고 다정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난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고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 비록 살아가는 날들 내내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유년의 행복한 기억이란 얼마나 값진 것일까. 불행하게도 정수현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다. 책에서는 정수현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표현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나온 곳은 개천이 아니라 수렁이나 늪인 것 같다. 빠져나오려고 기를 써보지만 결국은 붙잡히고 마는. 태어났더니 난 이미 살갗 밑에 불행이라는 진피가 하나 더 끼워져 있더라, 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불행이다.

어머니는 아내가 보통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 정신 똑바로 차려. 여자는 골라도 어머니는 못 고른다고 했어. 발에 채는 게 여자라도 어머니는 하나라고! ......어머니, 내가 고른 사람도 아닌데 평생 버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머니인 건 어떠세요? 발에 채는 여자는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면 되는데, 발에 스치기도 싫은 여자가 어머니라고 딱 붙어 있는 건요? 내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까지 어머니일 당신, 숨이 막힙니다. (51)

숨막히는 어머니도 그랬지만 갈비뼈가 부러지고 고막이 터질 정도로 자신을 두들겨 패는 형이나 그 형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아버지도 수현의 잘못 끼워진 첫단추였다. 더 불행한 건, 다시 고쳐 끼울 수 없는 첫단추라는 거다.

 

수현의 아내는 모래바람 몰아치는 사막 같이 황량하고, 남극의 겨울처럼 차갑다. 이 여자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레 이리 꼬이고 가시가 돋았을까, 궁금했지만 끝끝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나름의 아프고 고달픈 상처가 있었겠구나 짐작할 뿐. 그래도 용기내어 수현의 사랑을 얻고자 했던 것 같은데, 캄캄한 밤 차갑게 내리는 '습설'같은 삶을 살아온 수현에게 아내는 또 하나의 습설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집에는 늘 이길 원하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첫 자살시도를 막은 건 그런 죽음이 곁에서 벌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작가에게도 직업적 친절을 보여야 하는 편집자의 자세, 그것으로 아내를 살렸다.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을 안 아내가 끝내 목숨을 버렸다. 많은 사람이 요절한 아내를 애도하고 아내를 잃은 나를 위로한다. 나도 아내를 애도한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다. 목숨으로 흥정하는 사랑은 죽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다. (64)

 

그렇게 숨막히게 답답하고 눅진하고 무거운 나날을 살아가던 수현 앞에 서영재가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영재라는 인물은 가장 도드라지는 매력을 갖고 있다. 수현에게는 영재가, 아마도 온통 눈앞을 가리며 내리던 습설 속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는 동그란 해님처럼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라 했던 수현에게 영재는 싱싱하고 밝고 따뜻한 삶의 면면을 열어 보여주었던 것이다. 수현이 영재의 집을 찾아갔던 날 보았던 노란 패브릭 커텐처럼.

왜 웃어요, 사람 말하는데. 나야 워낙 개 같으니까, 이 새끼 작업 들어갔구나 하고 마는데, 아시잖아요, 글 쓰는 애들 은근히 순진한 거. 가끔 선배님이 하도 유명하니까, 작가답지 않게 좆나게 예쁘게 생겼으니까, 아 뜨거워, 아 씨, 이 담배 왜 이렇게 짧아.”

주유소에서 받은 물티슈로 영재의 손가락을 감쌌다.

왼손. 검지와 중지 안쪽으로 작고 붉은 반점이 돋았다.

이거 봐, 이거! 막 벌렁벌렁해. 이렇게 해서 꼬신 애들 몇 명이에요? 왜 자꾸 웃어요!”

너 예뻐서.”

예쁘죠, 얼마나 예쁘냐면요, 내가 눈가에 주름만 없애면 십대로 회춘한대서 성형외과에 갔잖아요. 나는 단지! 주름 하나 없애려고 갔는데, 거기 간호사 언니가 환자님은 이마랑 눈이랑 코랑 팔자주름이랑, 그러면서 자꾸 나보고 환자래. 내가 아주 중환자였더라고! .......왜 자꾸 해장국이 술처럼 올라와. 내가 지금 어디 아파서 환자는 돼봤어도, 못생겨서 환자 돼보기는 처음이야. 이거 의료보험 적용해야 해. 타인의 생명에 지장이 있어. 나 보는 순간 안구에 치명적인 피해가 간다고! , 우리 엄마 맨날 골골대더니만 못생긴 병에 걸린 거였어. 가족력이야. 왜 자꾸 웃어요? , 그래, 선배님 얼굴은 건강하다 그거죠? 만수무강하세요. , 손 따가워.” (47쪽)

영재가 쓰는 이 언어의 싱싱함이란. 수현은 이런 영재의 말을 '영재의 목소리와 어투가 결합하면서 발생한 화학반응으로 말의 온도가 올라간다. 영재가 따뜻한 이유다.'(101쪽) 라고 했다. 사랑에 대해서 영재는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헛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한 거야.” (117쪽) 라며 수현을 예쁘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표지의 그림이 말하듯, 수현의 삶에 잘못 끼워진 첫번째 단추, 절대로 다시 고쳐 끼울 수 없는 그 첫 단추는 수현을 음산하고 끈끈한 수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수현은 영재와의 사랑이 아프다. '내가 바란 건 오직 하나였다. 나를 그냥 가만히 두는 것'(101쪽)이라고도 하고,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제발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103쪽)라고 하면서 견디기 힘든 죄책감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삶은 왜 걸핏하면 어깃장을 놓고 뭐 하나라도 손에 거저 쥐어주는 게 없는 것인지. 첫번째 단추는 운이 없었더라도 두 번째나 세 번째에서 제대로 끼워서 다시 하나씩 하나씩 잘 끼울 수도 있는 걸 텐데 말이다.  너, 영재 사랑해? 그래, 그럼 그동안 네가 잘못한 거 다 용서하고 없던 걸로 해줄 테니까, 이제 착하고 예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수현은 영재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디쯤을 계속 분주하게 오간다.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엉켜 있어서 긴장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번 더 읽으면 이야기의 깊은 속을 좀 더 잘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끌리는 소설은 솔직히 아니었다. '와, 재미있다'와 '와, 감동적이야' 사이의 어중간한 자리에 붕 떠있는 소설이랄까. 그저, 수현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약간의 고단함과 그 고단함을 이기고도 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을 뿐이다. 삶을 온통 사랑으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그릇이 작고 품도 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명하고 명확하고 밝고 따뜻한 무언가가 늘 내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나 자신이라면 더 좋고.

그것은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지 않은 모든 만약의 길은 후회와 미련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삶을 지키며 잘 살아내길 바랄 뿐이다. 살아 있는 당신에게 행운이 가닿길.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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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모든 것 』(마틴 솔즈베리, 모랙 스타일스 지음/서남희 옮김/시공아트)

 

얼마 전부터 그림책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점점 그림책을 읽는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요즘 출판되는 그림책 수준이 얼마나 높은데, 어른인 내가 읽기에도 벅찬 내용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냐고 타박한다면 물러날 자리가 없다. 하지만 막내가 취학 전일 때와 비교해보면 전혀 읽지 않는 게 아니라 많이 줄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나도 덩달아 그림책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알라딘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는 덥썩 사버렸다.

 

표지에 새겨진 '그림책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 아래에는 '역사/소재/주제/기법/출판 산업까지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이라는 부제가 따라붙어 있다. 판형이 좀 크긴 하지만 200쪽이 안되는 책 속에 그 많은 것들을 다 담았다고? 책을 펼치기 전부터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서남희 씨의 번역이라는 점이 조금 의심을 흐려지게 했다. 오히려 어떤 묘책으로 그 많은 내용을 이 한 권에 담았는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그랬다.

 

그림책의 발달을 인쇄술의 발달과 관련지어서 설명한 것도 좋았고, 그림책 작가들이 대상연령을 미리 생각하고 책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크로스오버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것이 그림책의 가능성을 더 열어두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새로웠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도 벅찬 그림책들이 많아지는 거였구나!) 시각적 문해력과 드로잉을 통한 사고에 대한 설명, 글과 그림의 상호작용을 '보완'과 '대위법'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놓은 것도 깔끔했다. 시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텍스트와 그 자체가 그림의 요소인 텍스트 간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는 설명도 마음에 담아둘만 했다. 게다가 시원시원하게 들어가 있는 그림들은 이 딱딱한 이론서를 '읽을만한' 책으로 여기고 쉽게 다가서게 만들만큼 매력적이었다.

 

짐작한 거였지만 200쪽이 안되는 책 속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니 개론적 설명이라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그 아쉬움 속에서 이 책이 해낸 큰 역할이 있다면 연이어 그림책 이론서를 줄줄이 사게 만들었다는 것.  책이 책을 부르는 책꼬리잡기 연쇄반응이 일어나서 나는 이 책에 나오는 『그림책을 보는 눈』(마리아 니콜라예바 외 지음, 마루벌)과 『그림 읽는 아이들』(에블린 아리프, 모레그 스타일 공저, 미진사)와 『그림책론』(페리 노들먼 지음, 보림)을 내 책꽂이에 꽂아두게 되었다. 이런 책을 번역해서 출판해 주다니, 정말 고마운 출판사라고 감동하면서 신나서 주문을 했던 거다.

 

 

 

 

 

 

 

 

 

 

 

 

 

 

 

 

 

이 세 권의 책을 다 읽게 된다면 스스로가 너무나 대견하고 기특해서 어쩔 줄 몰라할 것 같은데, 언제쯤 붙잡고 읽을 지는 나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갑자기 저 책들보다 먼저 오래전에 읽었던 마쓰이 다다시의 『어린이와 그림책』(한림출판사)을 다시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도 딱딱한 이론서를 읽고 나니까 다정한 이론서가 그리워진 모양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급하게 주문할 게 뭐람.)

 

 

 

 

 

 

 

 

 

 

 

 

 

 

 

그러니까 결론은 그림책이 궁금한데 제법 딱딱한 내용으로 냉철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잡고 싶고,,,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금방 휘리릭 정도만 원할 경우애는 이 책을 시작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또하나 우리 그림책 연구에 대한 아쉬움이 앙금처럼 남는다.  미국의 경우 벌써 한 30년 쯤 전부터 그림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가 그림책의 출발이 좀 늦었다고는 하지만 이제 슬슬 우리 그림책과 작가에 대한 연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직 대학 학부에도 어린이문학과 그림책에 대한 강의를 찾아보기 힘들고, 그나마도 창작강의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말이다.  좀 더 열심히 으쌰으쌰, 응원을 보내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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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3-12-0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왕,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이라는 책이 있는데, 저도 읽진 못했지만 저자들이 믿음이 가서 찜해두었어요. 섬사이님도 아실지 모르지만 저의 다짐 차원에서(?) 남겨 봅니다.

섬사이 2013-12-07 00:07   좋아요 0 | URL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은 저도 보관함에 쓰윽 넣어 두고 있어요.
아직까지 장바구니로 옮기지 못한 이유는... 음... 현존하고 있는 작가들, 게다가 왕성하게 활동 중인 작가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소개하고 있을지, 믿어도 될지... 좀 망설여져서요.
하지만 네꼬님이 '저자들이 믿음이 가서'라니까 조만간 장바구니로 옮기게 될 것 같아요. ^^
 
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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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갈색 마룻바닥 위에 책들을 가지런히 주욱 펼쳐놓고 앞치마를 두루고 앉아있는,  저 머리카락도 하얗고 수염도 하얀 할아버지가 미야자키 하야오다.  여백이 많은, 군더더기 없는 공간 속에서 무릎까지 꿇고 바닥에 펼쳐놓은 소년문고 책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이 사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전부를 다 본 것도 아니고, 본 것들을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라고 하면 막연히 무조건 '보고 싶다'고 느끼는 편이다.

TV로 봤던 <빨강 머리 앤>이나 <하이디>, <미래소년 코난>, <플란더스의 개> 같은 작품들과 영화로 봤던 <이웃집의 도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것은 잊지 못할 작품으로 남았다. <마루 밑 아리에티>,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은 늘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챙겨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아있고. <벼랑 위의 포뇨>나 <붉은 돼지>는 기대했던 것만큼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애니메이션 분야의 '대가'라고 인정하고 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야 나같은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여기겠지만.

 

이 책은 내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이책에 대해서 쓴 책이다. 정말 멋지다. 앞부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고른 50권의 책들이 짤막한 추천의 글과 함께 소개되고 있고, 뒷부분에는 어린이책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들이 편안하고 솔직하게 적혀있다. 그 솔직하고 편안한 글이 참 반갑고 신선했다. 어린이 독서지도에 대한 책들을 읽다보면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다'거나 '책을 많이 읽으면 아이에게 이러저러한 능력이 향상되어 학업성적이 좋아진다'는 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난 그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정말 그럴까는 의문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리 막내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성인 평균 독서량을 훨씬 웃돌게 책을 읽는 엄마가 있지만 책읽기보다 밖에 나가 뛰어놀기를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책은 잠자리에서 내가 읽어주는 정도로만 만족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가 성적이 높다는 것도 아이마다 다른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깊고도 많아서 오히려 학교 공부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시시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가끔 책읽기가 아이에게 장차 성공과 눈부신 영광을 가져다 줄 것처럼 써놓은 책들을 만날 때면 씁쓸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말한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려고 책을 건넨다는 발상은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려고 해도 아이들은 읽지 않습니다. 부모가 열심히 읽으면 아이가 읽지 않는다거나 오빠가 열심히 읽으면 여동생이 읽지 않거나 합니다. 책을 읽는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책만 읽는 아이는 일종의 외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놀면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으니까요.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141쪽)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른들이, 특히나 부모나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책읽기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기대치가 너무 무겁고 아득해 보이곤 했다. 학문을 중요시했던 전통 때문인지 우리는 책읽기를 자꾸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활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점이 오히려 책을 읽고 즐거워할 기회를 아이들 뿐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서도 빼앗고 있는 것 같다.

 

놀랍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대학시절 어린이문학연구회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 처음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간 신입 시절에는 회사 책장에 있는 어린이책(소년문고)들을 마구마구 읽었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 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너무 뻔한 일이다. 어린이책을 읽은 것이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한 것이지만 그가 그런 효과가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작정하고 소년문고 책들을 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효과를 기대했더라도 재미있고 즐겁지 않았다면 그렇게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유익함을 위해서는 조금 움직이지만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는 많이 움직이는 법이니까. (나만 그런건가?)

 

예를 들어 가도노 에이코의 마녀 배달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때, ‘주인공 여자아이를 어떤 식으로 그릴까? 아하, 이거라면 교과서가 잔뜩 있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어린이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책이 모델인지 알 수 없고 제목을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지만, 어린이책에 많이 등장하는 시절의 아이가 저절로 떠오르는 겁니다.

뭐랄까 내 안에 서랍 같은 게 있는 듯했습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무언가 가득 담겨 있었지요.

(105)

 

책을 읽는다는 건 그의 말대로 내 안에 서랍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말끔하고 반듯반듯하게 각을 맞춰 정리가 되어 있는 서랍이 아니다. 뒤죽박죽 흐트러지고 어질러져 있어서 뭐가 어디에 들어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엉망진창의 여러 칸의 서랍.  하지만 뭔가 반짝 떠오르면 마법처럼 서랍 하나가 스르륵 열리고 반짝 떠오른 생각과 상상들을 좀 더 자세히, 길게 이어가도록 신비한 힘을 보태어 주는 거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서랍을 만들어 준다 생각하고 책을 읽어준다면 고르는 책부터 좀 달라지지 않을까? 쏟아져 나오는 어린이책들을 보면 지식정보책의 출판 비중이 참 많이 증가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건 어른들이 아이에게 문학보다는 지식과 정보 전달의 도구로 책을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내가 읽고 뜨끔했던 문장도 있다.

 

홋타 요시에가 젊어서 특별고등경찰을 피해 친구의 산속 오두막집에 숨어 지낼 때의 이야기를 읽어도, 하루 세 끼 밥을 직접 지었더니 그것만으로 하루가 끝나버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며 산을 내려옵니다. 그럴 때 밥 짓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과 밥이나 짓고 있으면 뭔가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렇구나, 홋타 요시에는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 살았구나하면서 저는 몰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 뭔가를 생각해주니까 됐어하고 마는 거죠.  

 

홋타 요시에가 누군지, 뭐하던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루 세 끼 밥을 직접 지었더니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끝나버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며'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에 난 '나도 그런데!;하고 생각했다 . 아마도 하루 세 끼 밥을 직접 지어야 하는 전업주부들은 거의 다 그의 생각과 비슷할 것 같다.  나도 집중해서 책을 읽고, 읽은 책을 음미하면서 몇 자 끄적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책을 읽고 있으면 5분마다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책을 읽다가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지는 않았나,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된 건 아닌가 불안해서 자꾸 시계를 봐야 하는 이 어수선한 일상은, 읽고 있는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와 비례해서 짜증스럽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저 문장들을 만나고나니까 내가 '밥 짓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밥이나 짓고 있으면 뭔가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하지만 나는 홋타 요시에라는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밥 짓는 일뿐 아니라 아이들을 챙기고 빨래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나 자신이 끝도 없이 소비되고, 그렇게 야금야금 조금씩 조금씩 닳아서 없어져버릴 것민 같은 불안감이 밀려들곤 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것을 헤아리고 이해하기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이고, 파를 다듬고, 두부를 썰고, 콩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는 일에 열중도 하고 생각도 끊어지지 않게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끔은 나도 산을 내려가서 밥 짓는 일을 그만하고 싶어질 때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백미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이책에 대한 생각이다.

어린이문학은 다시 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웨스톨(Robert Westall) 같은 작가는 다시 해볼 수 없는 이야기를 썼지요. 하지만 작품 속 아버지, 즉 아버지 역할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그이도 이 세상은 끔찍하지만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3)

 

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55)

그래, 이게 바로 어린이문학의 가치이고, 우리가 어린이문학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이고, 아이들에게 어린이문학을 읽어줘야 하는 까닭이다.  앞으로 아이가 승승장구해서 일류대에 가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살아가다가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지금부터 좋은 어린이책을 골라 정성껏 읽어주며 미리미리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만큼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에게 좋은 어린이책을 더 읽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을 것 같다. 그는 이 시대를 '바람이 부는 시대'라고 말한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마치 터질 만큼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과 게임과 소비에 빠져들면서, 개를 키우고 건강과 연금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불안만큼은 착착 부풀어 올라 스무 살 젊은이와 예순 살 늙은이가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돌연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일본만이 아닙니다. 파국은 세계적 규모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제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145쪽)

 

아마도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에게 '책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게 된 것 아닐까.  거기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서 앞으로의 인생을 무사히 잘 살아달라고, 할 수만 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막연한 신뢰를 보내던 사람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부터는 왜 이 사람이 믿을만한지 이유가 분명해졌다.  어린이책을 좋아하고 어린이책에 대한 가치를 이만큼 분명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바람대로 '책으로 가는 문'을 향해서 모든 아이들이 달려와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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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12-0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좋다~~~ 깔끔하면서 깊이있는 서평입니다^^
어린이책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참 멋지죠.
마녀 배달부 키키 재미있게 봤어요~~

섬사이 2013-12-11 05:3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칭찬을 들으면 아이처럼 으쓱해져요. ^^
마녀배달부 키키는 책으로도 읽고 싶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보고 싶어요.
책으로도 무척 재미있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거든요.

푸른희망 2014-02-0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정말 좋네요.. 제가 생각은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책읽기에 대한 생각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고 있었네요, 저도 외로운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고 믿거든요... 그의 작품중에 마녀 배달부 키키 정말 좋아요.. 꼭 보셔요. 전 이책 꼭 봐야겠네요..

섬사이 2014-02-10 12:4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푸른희망님.
마녀배달부 키키, 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꼭 보고야 말겠습니다. ^^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의 문장 하나하나를 이토록 다정하게 쓰다듬고 헤아리며 읽은 흔적들. 그녀가 성실함을 재능으로 가지고 있어 다행이다. 10년이나 20년쯤 후에도 그녀의 따뜻한 책 이야기를 읽으며 미소지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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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이들은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해는 기울어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었고, 낮동안 같이 실컷 놀았는데도, 나도 K의 엄마도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니들 왜 이러냐고 다그쳐도, 무슨 생각인지 아이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덟 살 두 아이의 마음이 어이없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결국 나는

"K야, 그럼 우리집에서 저녁 같이 먹고 조금 더 놀래?"하고 K를 초대했다.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우리집으로 뛰어 들어갔고, 나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뭐가 저리 재미있을까, 뭐가 저 아이들을 저렇게 다정하게 만들까. 저녁을 먹고 나서도 둘은 지칠 줄을 모르고 놀았다. 저 또래에 들어서면 이성친구끼리는 서로 노는 스타일이 달라지는데도 둘은 참 잘 어울려 놀았다. 9시쯤 K의 엄마가 K를 데리러 왔다. K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숨었다. 아직도 더 놀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두 손을 꼭 잡고 헤어지지 않겠다고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몸으로 표현했던 두 아이는 그 날 밤, 우리집에서 함께 잤다.

 

4학년 때였나?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좋아하는 친구의 집이 우리집과 정반대 방향이었는데 학교가 끝나고 헤어지기가 싫어서 나는 그 아이의 집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러면 그 아이는 다시 우리집까지 바래다 주고,  그렇게 그 아이와 우리집을 여러번 왔다갔다를 하다가 하늘에 노을이 번질 무렵에서야 학교 앞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었다.

 

아직 어리고 순수해서 친구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몸으로 행동으로 완고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성장하는 동안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하면서 사람에 대해 방어적으로 변해서 좋아해도 맘놓고 좋아한다 표현하지 못하고,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밀당의 기술을 적용하려고 들지만 아이들은 아직 순수함 그 자체로 친구를 좋아하는 거다.

 

아직도 두 아이는 함께 어울려 자주 논다. 어디 갈 일이 생기면 내 아이는 K도 함께 가는지 묻고, K는 또 우리 아이가 함께 가는지를 자기 엄마에게 묻는다. 어디 가는지, 뭘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가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럴 때 나는 아이들이 부럽다. 이렇게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 게 지겨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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