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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점 반 ㅣ 우리시 그림책 3
이영경 그림, 윤석중 글 / 창비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허름한 옛날 구멍가게, 가게 이름이 九福이다. 팔복에 하나를 더한 구복. 그림책 첫장에서부터 내 입꼬리가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올라갔다. 담배도 팔고 복덕방 노릇도 하고 죽은 닭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닭도 파는 그 구멍가게를 빨간 깡통치마에 까만 고무신을 신을 단발머리 여자 아이가 들어가고 있다.
가겟방 방문이 빼꼼 열리고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하고 묻는 여자 애. 구멍가게 할아버지는 방안을 온통 어지럽혀가며 라디오를 고치고 있다. 비가 새는지 방안 벽지는 얼룩덜룩.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방안이다. 팔각 성냥통, 목침, 주판, 금색에 빨간 꽃무늬가 요란했던 둥그런 양은쟁반, 날마다 한장씩 뜯어내야 했던 달력, 까만 다이얼식 전화기...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들에 다시 또 살며시 웃음..
"넉 점 반이다." 돋보기 너머로 눈을 치켜 뜨고 대답하는 무표정한 할아버지. 가게 안 물건들이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건 벽에 붙어 있는 원기소 광고지. 이쯤되면 그린 이의 주민등록 앞번호 두자리가 궁금해진다. 얼른 그린 이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1966년생. 어쩐지.. 내 어릴 적 기억의 한 부분을 자꾸 건드린다 했더니만.
"넉 점 반, 넉 점 반." 아이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중얼중얼.. 하지만 눈은 푸드득 날개짓하는 닭에게 가있다. 물 먹는 닭을 구경하며 무심히 서있는 아이.
닭 구경을 하던 아이는 빨간 접시꽃이 피어 있는 담장 아래를 걷고 있다. 영차영차 지렁이를 끌고 가는 개미 떼를 구경하고 있다. 그래도 입으로는 "넉 점 반 넉 점 반."
힘들게 끌고 온 개미들의 지렁이를 잠자리가 날아와서는 낚아 채갔다. 얄미운 잠자리 떼를 따라 한참을 돌아다니면서도 "넉 점 반 넉 점 반"
날아다니던 잠자리가 분꽃 위에 앉았다. 아이는 아예 분꽃밭 속으로 들어가 앉아 꽃 따물고 니나니 나니나 ...
해가 꼴딱 져서야 집에 돌아오는 아이. 헉, 그런데 아까 아이가 들렀던 "구복상회"가 아이 집 바로 앞이다. 가게 밖에 나와 있는 할아버지가 부채질을 하며 곁눈질로 아이를 보고 있다.
"조 녀석이 아까 와서 시간을 물어보더니 이제야 집에 들어가는 게여?" 하는 눈빛이다.
양 손에 분꽃 한 두송이 들고, 저고리 고름에도 꽂고 아이가 하는 말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아이야. 지금 "시방"은 아까 그 "시방"과는 너무 멀구나..ㅋㅋㅋ 아이네 집 열려진 방문 너머로 아이의 언니 오빠인 듯한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있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갓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아이의 엄마와 고무신을 벗어 놓고 툇마루를 오르는 아이의 마주치는 시선이 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한다.
이 그림책에 등장한 여자 아이는 귀여운 미소를 머금은 깜찍한 얼굴도 아니고, 장난끼가 반짝반짝 흐르는 개구장이의 생생한 표정도 없다. 아이는 오히려 무심한 듯한 고집스런 얼굴에 표정도 없이 골똘하게 자기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들에 몰입하는 그런 얼굴이다. 그 시절 아이들의 머리 스타일이 그랬듯이 아이도 앞머리를 가르마를 타서 옆으로 넘겨 실핀으로 고정시킨 단발머리이고 오동통한 두 뺨이 차라리 심통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난 그림책 속 그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고 기분이 좋아진다. 적당히 향수를 자극하는 토속적인 냄새가 풍기는 그림도 정겹고, 시간의 흐름에 무심한 아이의 동심도 사랑스럽다.
두 말이 필요없는 윤석중 님의 동시에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려서 나에게 즐거움을 선물해 주신 이영경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