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와 모나리자 사계절 1318 문고 15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장바구니담기


레오나르도는 하느님이 아니었다. 맨 처음 만난 날 살라이는 그 사실을 알았고, 이제는 악마의 조수가 아니란 것도 알았다. 레오나르도는 하느님과 악마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살라이도 마찬가지였다. 살라이라 불리는 잔 자코모 데 카프로티 또한 그런 존재였다. -21쪽

"축제란 번개 같은 거야. 번개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 아주 짧은 한순간, 온 세상을 확 밝히지. 그러고는 사라져 버려. 한순간의 느낌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번개 그 자체는 후세 사람들이 손댈 여지가 없어. 야외극도 예술가한테 번개처럼, 격렬하고 무책임한 무엇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닐 기회를 준단다."-33쪽

레오나르도는 항상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현재를 느긋하게 보내지 못했다. 살라이는 레오나르도 같은 천재는 항상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는 천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저 영리하고 재빠르기만 하면 되었다. 살라이의 삶은 언제나 '현재'들의 집합이었다. 결코 미래의 더 큰 행복을 위해 현재의 작은 행복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살라이의 삶은 온통 축제이자 격렬한 번갯불이며, 르네상스 시대를 무책임하게 활보하는 것이었다. -34쪽

그러자 살라이는 공작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베아트리체도 살라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둘은 그 후로도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묶어 준 눈길을 나누었다. 서로의 눈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순수한 장난기였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스멀스멀 번지는 웃음을 못 이겨 눈의 초점을 잃었다. 다음 순간 살라이와 베아트리체는 아기의 첫 걸음마를 지켜보는 사람들처럼 나직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상대방한테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66쪽

"맞아요, 레오나르도 선생.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는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찬사를 받는다고 해서 외로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내 까무잡잡하고 못생긴 거죽과 그 위에 붙은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가 아닌 다른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겠어요? 내가 우리 언니처럼 금발 머리에 우아한 얼굴이라면, 사람들은 나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고 싶어하겠죠. 사람들은 이 칙칙한 포장지 안에서 화사한 색깔을 발견할 거예요. 무지개가 가진 모든 색깔의 색조 하나하나까지 볼 줄 아는 눈과 류트의 음 하나하나를 들을 줄 아는 귀를 발견할 거예요. 온갖 향기, 온갖 감촉, 온갖 맛에 대해 흥분하는 피를 발견할 거라구요."-69쪽

"마님은 용모가 수수하시군요."
그러고는 손에 든 베들레헴의 별꽃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소용돌이꼴의 잎 속에서 참으로 수수한 꽃이 피었지요? 제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소용돌이꼴의 잎들입니다. 마님께서도 수수한 꽃 같은 얼굴보다는 잎의 모양을 흥미롭게 가꾸는 게 어떨까요?"-70쪽

" 머지않아 네 친구 베아트리체는 우리 마음 속에서 과거가 완전히 묻히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게다. 그리고 불행한 과거를 극복하는 길은 과거를 껴안고 살아가는 것뿐임을 깨달으려면 좀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겠지."
(중략)
"난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걸요. 난 그저 '옛날'은 옛날, 지금은 지금, 앞으로는 앞으로'라고 생각해요. 왜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못 하죠?"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과거의 고통 때문에 현재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침묵과 교양으로 자신의 나쁜 기억들을 적당히 가리고 살아가지. 누구나 다 살라이가 될 수는 없는 거야."-104쪽

"레오나르도한테는 격렬함이 필요해. 모든 위대한 예술에는 그것이 필요하지. 섬광처럼 번쩍이면서 훌쩍 도약하는 것. 그 격렬한 요소를 작품에 불어넣는 예술가들도 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렇지 못해. 그 사람은 너무 자의식이 강하거든. 만일 어떤 중요한 고객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중요한 임무를 맡기면,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직관을 모두 꽁꽁 묶어버린다고.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 주지 않고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거야. 수도원 식당 벽화는 그 윤곽만 봐도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기미가 보여. 그 작품을 볼 사람이야 가난한 수도사들같이 하찮은 사람들이니, 레오나르도는 정신적인 여유를 갖고서 신선하고 격렬한 요소들을 받아들인 거지. 살라이, 나는 레오나르도 선생이 작품 속에 격렬한 것, 무책임한 것들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네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112쪽

"나는 무도회에도 나가고 연극도 할 거야. 우리 아이들과 놀이도 할 거고. 나는 아주, 아주 명랑하게 지낼 거야. 두 번째로 밀려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거라구. 살라이, 그게 바로 내가 가장 잘 하는 거란다."-132쪽

다음 순간 살라이는 깨달았다. 베아트리체가 살아 있다면 바로 그 여인과 같은 모습이리라는 것을.
이 여인은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이 여인은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 사람이었다. 머릿속의 잣대로, 오직 자신의 잣대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의 여인, 기쁨을 주는 법과 고통을 주는 법을 아는 여인, 인내하는 법을 아는 여인, 무수한 겹으로 감싸인 여인. -16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