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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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박경리는, 아니 박경리 선생님은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 엄청 유명하신 분에 한 분이란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읽고들 있어. 아빠도 모르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절로 나오는구나. 아빠는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은 대표작인 <토지>와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만 읽어보았단다. 최근 새로 출간된 <토지>는 모두 20권으로 엮어서 나왔는데, 아빠가 읽은 버전은 21권짜리였단다. 언제 읽었는지 확인해 보니, , 20년이 넘었구나. 다시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21권짜리다 보니 큰 마음을 먹어야겠구나. 사두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들도 쌓여 있고 말이야. 박경리 선생님의 책들도 여럿 사 두었는데 아직 열어보지 못했구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도 좋았던 기억이 있구나. 아빠가 그 책을 읽고 쓴 리뷰를 다시 읽어보았단다. , 이 책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더구나.

….

이번에 읽은 박경리 선생님의 <일본산고>는 알라딘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알게 된 책이란다.  나는 철두철미 반일 작가입니다라고 적힌 책 띠의 문구가 너무 강렬해서 클릭을 할 수 밖에 없었단다. 책 제목에 있는 산고라는 말은 한자로 散考라고 쓰는데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오지 않는 말이란다. 한자의 뜻을 풀이해 보면 일본에 대해 간간히 생각해 봤던 글정도로 생각할 수 있단다. 그러니까 박경리 선생님이 일본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글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생전에 발표한 글들도 있고, 미발표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구나. 예전에도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나온 것이란다.


1.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도 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단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피해국가들에 진정한 사과를 한다면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도 좋아지고 외교 관계도 좋아져서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 될 것 같은데, 왜 안 하는지 그걸 모르겠구나. 반성이나 사과를 안 했을 때 자신들에게 어떤 이득이 가는지 잘 모르겠구나. 정말 자신들이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친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때가 기회가 싶은지 반성, 사과는커녕 욱일기를 매단 군함을 몰고 우리나라에 오기도 했단다.

박경리 선생님은 1926년에 태어셨고, 꽃다운 나이를 일제시대에 보내셨으니, 일본의 만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일 거야. 해방 이후 당연히 전범국인 일본의 사과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니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그런 내용들이 이 책 전반에 걸쳐 있었단다. 일본 역사를 통해서 일본 국가권력의 몰염치한 태도의 원인을 찾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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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생각해 보면 개인의 사고를 그토록 붙들어 맨 일본의 국가권력은 놀랍다. 그것도 장구하게 유지해 왔다는 것이 더욱 놀랍고 유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기능과 세기(細技)가 우수하면서도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 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고 할밖에 없었다. 본과 틀이 없는 나라, 그들의 정치 이념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날조된 역사 교과서는 여전히 피해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고 고래심줄 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는 것이다. 가는 시냇물처럼 이어져 온 일본의 맑은 줄기, 선병질적이리만큼 맑은 양심의 인사(人士), 학자들이 소리를 내어 보지만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 반대로 높아져 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다.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여 분명한 것이 차츰 부풀어 거대해질 때 우리가, 인류가, 누구보다 일본이 자신이 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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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은 일본에 대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셨기에 일본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도 자신 있게 자신을 반일작가라고 이야기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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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나는 내 자신을 소개하기를 철두철미 반일(反日) 작가다.” 두 사람은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왜 충격을 받을까? 전에도 그런 얘기는 했었고 일본인들은 가만히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깨달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반일을 당연하다고 본 그들은 이제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과 나는 꽤 오랜 시간 얘기를 했다. 남경(南京, 난징) 학살 사건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 그들의 안색은 변했고 실은 겁이 많은 것이 일본 사람 아니냐 했을 때는 당혹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손님에게 너무 무례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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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읽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게 해 주시는구나. 오늘날 정부는 일본에 눈치를 보는 짓과 말만 해서 창피했는데 말이야. 반성과 사과 없는 일본에 예()를 차리지 말라는 호통이 시원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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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 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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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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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에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걱정이란다.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온도를 1.5도 상승을 막으면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하는데, 요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 날씨들을 살펴보면 이미 늦은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구나. 박경리 선생님도 생전에 이런 인간들의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의 말씀도 하셨단다. 인간들은 지금 탈출할 수 없는 자신의 집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까지 하고 있는 모양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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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인간들의 지칠 줄 모르는 파괴와 약탈로 아시다시피 지구는 지금 만신창이가 돼 있습니다. 설령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자업자득, 어디 봄의 죄이겠습니까. 소생시켜 놓은 생명들이 참살을 당하고 멸종이 된들 봄에게는 임무 밖의 일이지요. 다만 길손일 뿐, 노쇠해 가는 길손일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도 인간이 저질러서 맞이하게 될 재난에 희생되어 처지일 수도 있고 지구와 생명들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노쇠한 봄이라는 말은 물론 합당하지 않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세월의 조화인데 계절 자체가 세월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늙고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오도 가도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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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내 생각에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또 창조적 열정은 균형을 잡고 균형을 잡아주어 존재하게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탐욕은 균형을 잡아주어 존재하게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탐욕은 균형을 파괴하고 존재를 흔들리게 하는 것으로 바로 오늘, 현재가 그 같은 것을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구 도처에서 균형을 망가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땅이 죽어간다거나 물이 썩어간다거나. 이젠 그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다 가공할 일은 오존층이 찢기어 점점 넓어져 가고 있다는 것, 환경호르몬에 관한 것, 지구온난화 현상, 여차하면 자멸의 무기 핵폭탄 등. 이것들이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 하겠습니까? 지구의 사막화, 도처에서 범람하는 물, 이런 상황이 천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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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도 오래 전부터 인간의 야욕에 의해 황폐화되는 지구를 경고했지만, 우매한 지구인들은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구나.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믿어보고 우리도 작은 것이라도 지구온난화를 늦출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자꾸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해방 후, 1950년 일본서 초판을 발행한 <세계문예사전 동양 편>을 보면 문예사조 항목에 무려 26페이지가 일본 문학을 위해 할애되어 있고 중국 문학이 12페이지, 인도 문학이 약 5페이지, 아라비아 페르샤 남방아세아가 각각 1페이지 안팎, 다음은 일본 주변 문학으로 묶었는데 아이누, 유구(류쿠), 대만 순으로, 그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조선 문학(朝鮮文學)이라 하여 한 페이지를 쓰고 있다.

책의 끝 문장: 또 그것이 의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종교나 도적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것들은 적시적소에 써먹은 도구에 불과하고 어떤 권력이든 도구화하려는 속성은 있게 마련이지만 일본처럼 철저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그런 그들에게 내세관이 희박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유한(有限)을 잘 소화시켜 온 민족이다. 유한은 인간의 숙명이지만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생명이 오는 곳 생명이 가는 곳, 그 한(恨) 때문에 사람은 유한 밖으로 나가려 몸부림치는 것이며 그 몸부림은 신의 축복인 창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신의 축복이 없는 나라 일본, 역사상 한 번 기회가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으로까지 몰고 갔으나 섬멸되고 만 천주교도들, 답회령(踏繪令)으로 수없는 순교자를 냈던 그때, 아마테라스를 뛰어넘고 영혼의 구제로 향한 죽음들이 있었다. - P39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통분이 무슨 사과인가?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다. 가와무라 씨는 한글세대는 반일이라는 대전제를 전면에 세우고 있으나 구체적 체험과 연구 관찰이라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반일이라는 민족교육으로 길러진 지식과 근본적 이미지에 의해 일본을 단죄, 규탄하는 태도를 가지기 일쑤다 했는데 동감이다. 그러나 동감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도식적인 교육을 떠나 생생한 역사적 사실 역사적 입김에 접할 수 있다면 한글세대는 무조건 감정적 시비를 떠나 조목조목 따지고 넘어가는 사상적 강화(强化)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의 전후세대도 우리 한글세대에 대한 불만을 사실에 입각하여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관찰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대로(大路)는 결코 일방통행일 수 없기 때문이다. - P62

전쟁은 문화의 어머니요 어쩌고 하는 말도 생각이 난다. 일본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분노를 지겹고 불쾌하고 귀찮아한다.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 하면서도 철도를 놓아주었느니, 학교를 세워주었느니, 아무도 그것을 부탁한 바 없는 일을 좀스럽고 쩨쩨하게 늘어놓는 데 대해서는 말이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침략이 아니라는 망언에 대해서도 무반응이다. 그들의 계속되는 망언은 괜찮아도 한국인의 분노는 왜 지겨운가. 사리를 명백하게 하지 않는 이상 잘못은 되풀이된다. 과거지사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데서 오는 근심이다. 장차 세계에서, 인류라는 차원에서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인류에 속하는 일본인 역시 오늘 군비 확장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의 목을 조르는 아들의 비극이 없기 위하여. - P76

언제였는지 일본인의 저축열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일본인은 저금통장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결코 저금통장을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살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사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저금통장이 필요한 것이지 저금통장을 위해 삶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쿠타가와의 예술지상주의가 만일 저금통장을 위한 삶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허위인 것입니다. 착각이거나 아쿠타가와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의식구조는 반생명적인 경향이 농후하며 그것이 체제에서 굳어져 버린 것이고 보면 분재와도 같이, 축소되고 불구적인 정신세계를 떠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국체를 부정하고 진실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 P93

이삼 년 종안 나는 우리 뒷동산에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리는 일을 계속하여 육십오 계단이라는 꼬불꼬불 계단이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만리장성은 아닐지라도 내 손자가 오르내리는 기쁨의 자리가 되었고, 오른다는 것 무한히 오른다는 것 무한히 간다는 것…… 나는 그 계단을 끝내고서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계단 위에 산이 계속되고 또 울타리가 없다면 계단은 계속하여 쌓아 올려졌을 거라고. 그리고 시시포스의 바위를 생각했지요. 부정적, 근원적으로 부정적인 인생과 문학 행위. 아마도 긍정적이었다면 갈 길은 없었을 것이요, 배불리 먹고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고 사랑도 없고 존재뿐인 삶은 비인간 로보트가 아니겠습니까.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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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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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얼마 안 있으면 개봉한단다. 오펜하이머라고 하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을 만든 맨하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단다. 아빠는 오래 전에 제레미 번스타인의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라는 책을 읽고 나서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예고편이 추천동영상으로 떠서 보게 되었단다. 눈이 돌아갈만한 화려한 출현진도 출현진이지만, CG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핵폭탄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예고편만 봐도 영화의 웅장함이 느껴졌단다. 우리나라의 개봉일은 8 15일에 한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날짜를 잘 잡았구나. 아무래도 우리나라 광복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유튜브에서 <오펜하이머> 예고편을 보고 난 얼마 후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초기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책 앞표지를 가득 채운 책 한 권이 올라왔단다. 유튜브에서 본 예고편 속의 그 얼굴. 오펜하이머. 그 책을 바로 클릭해봤는데 오펜하이머의 평전이더구나. 책의 제목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으로부터 불을 빼앗아 간제우스 신으로부터 다시 불을 빼앗아 온 그리스 신이잖니..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식상한 말보다 훨씬 있어 보이는구나. 책 제목 잘 지은 것 같구나. 이 책은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앞두고 출간한 모양인데,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인데 이번에 특별판으로 다시 출간한 것이라고 했단다.

아빠가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도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영화 <오펜하이머>의 예고편이 떠올랐다고 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책 표지 사진이 영화 속 배우 사진인줄 알았단다. 다시 자세히 훑어 보니 오펜하이머의 실제 사진이었단다. 당연히 오펜하이머의 사진이어야겠지. 순간 든 생각은 영화 속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을 진짜 잘 뽑았다는 생각과, 엄청 잘생겼다는 생각이었단다. 책 소개를 읽다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책을 읽고 영화화 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이미 오래 전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기억도 다 흐려졌고, 영화를 보기 전에 준비 운동으로 읽어보려고 바로 결재했단다.

결재할 때는 책 소개를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집에 도착한 책을 보니 어마어마한 벽돌책이더구나. 천 페이지가 넘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석과 참고 문헌이 백 페이지 정도 되었고, 실제 읽어야 할 부분은 900페이지 남짓이었단다. 그래도 900 페이지라도…. 이렇게 두꺼우면 출판사 욕심이 분책을 했을 텐데, 분책하지 않고 한 권으로 내준 것이 고맙구나. 이 책은 카이 버드라는 사람과 마션 셔윈이라는 사람의 공저인데, 참고 문헌도 엄청난 것으로 보아 지은이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구나. , 그럼 이 책의 내용을 시작해 보자꾸나.


1.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의 부모님은 독일계 이민 1, 2세대로 아버지는 사업가이시고, 어머니는 화가였단다. 모두 유태인이었고, 뉴욕에서 살고 있어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 4 22일 뉴욕에서 태어났단다. 오펜하이머가 성()이긴 한데 그 이름이 유명하니, 호칭은 오펜하이머로 이야기를 할게. 오펜하이머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성공으로 생활이 넉넉했단다. 네 살 어린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오펜하이머의 부모님들은 오펜하이머를 과잉보호 하면서 키웠다고 하는구나. 다시 동생이 태어났는데 오펜하이머보다 여덟 살 어린 프랭크였단다.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둘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무척 친하게 지냈단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에 입학을 해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3년만에 졸업을 하고 물리를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 켐브리지 대학의 러더퍼드 교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지원을 했단다. 화학과 물리, 그 어려운 학문을 둘다 하고 싶었다니아빠 같은 범인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런데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를 불합격시켰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오펜하이머의 추천서를 톰슨에게 넘겼는데, 톰슨은 그를 받아주었어. 러더퍼드, 톰슨이런 분들은 현대물리학에서 있어 유명한 사람들로 너희들도 교과서에서 많이 보게 될 사람들이란다. 어떤 일은 한 것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이 편지가 길어질 것 같으니, 오늘은 오펜하이머에만 집중을 하는 것으로 하자.

그렇게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양자역학을 접했다고 하는구나. 지금까지 삶을 보면 공부를 엄청 잘하는 모범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에게도 단점이 있단다. 학교 생활에 불안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 우울증도 겪고 발작 증세도 있었어. 그래서 정신과 진료도 한 동한 받았다고 하는구나.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증세가 좀 좋아졌다고 하는구나. 친한 친구들과 여행은 이렇게 사람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점점 공부하면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했어. 그런데 당시 켐브리지 대학은 실험 물리학의 중심지였어. 이론 물리학의 중심지는 독일의 괴팅겐이라는 곳이었어.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1926년 괴팅겐으로 자리를 옮겼단다. 괴팅겐에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았고, 오펜하이머 역시 그들과 교류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했단다. 막스 보른,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젊은 과학자들이었어. 이제 막 떠오르는 양자역학은 젊은이들의 과학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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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양자 물리학은 확실히 젊은이들의 과학이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물리학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그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실망한 채로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만방자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맛이 갔어.”라고 썼다. 하지만 1920년대 말까지만 해도 괴팅겐의(그리고 보어의 코펜하겐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에게 그들의 양자 이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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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보른은 오펜하이머의 지도교수였어.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서 공부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을 많이 꼈단다. 1927년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강의를 했는데 당시 미국에는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드물어서 오펜하이너는 양자역학의 선두주자라 볼 수 있었지. 잠시 미국에 머물던 오펜하이머는 다시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에렌페스트 교수에게 배우려고 했는데, 에펜페스트 교수가 우울증을 앓고 계셔서 오펜하이머는 스위스 취리히 파울리 교수에게 지도를 받게 되었단다. 파울리 교수 밑에서 1929년까지 많은 논문을 썼는데, 이 즈음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어.

192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 잠시 쉴 때는 주로 뉴멕시코에서 지냈는데, 동생 프랭크와 자주 같이 지냈다고 하는구나. 형으로서 십대 프랭크의 인생상담도 많이 해준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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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929년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모든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그런 욕망이 꼭 허영심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와 같은 매력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사람들은 멋진 취향이나 행복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의지만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야.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설계도 없이 기계를 만들려는 것과 같을 테니까.”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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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문학도 많이 읽고,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시도 자주 썼는데, 문학잡지에 실리기도 했다는구나.


2.

미국에 와서 그는 칼텍과 버클리 대학교 분교에서 일하게 되었어. 그와 친한 동료 교수로는 로런스 교수가 있는데, 로런스는 실험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단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정세가 급박하게 변했어.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태인을 탄압하게 되어 많은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 중에 유명한 과학자들도 많이 있었어. 오펜하이머는 이들 과학자들을 후원하기도 했단다. 오펜하이머는 이때 인도출신 동료 교수를 알게 되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영향을 받기도 했대.

1930년대는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공산주의도 전세계적으로 퍼지던 시기여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 오펜하이머와 주변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1930년를 살던 사람이 정치성을 띠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단다.

, 이번에는 오펜하이머의 사랑 이야기를 좀 해보자꾸나. 1936년 스탠퍼드 의대생 진 태트록을 알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진단다. 그런데 진 태트록은 공산당을 가입하게 되어 나중에 오펜하이머에도 이 일로 심문을 받게 된단다. 그리고 진 태트록을 통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 교류를 하게 돼.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정식 가입한 이력은 없다고 하는구나.(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긴 해.) 그래서 FBI에서 오펜하이머도 조사 대상에 올렸고, 단순동조자로 판단하였다고 하는구나.

1939년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어. 이것이 무엇이냐면, 독일과 소련은 서로 침략하지 않고, 남을 침략해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거야. 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불법 침략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는데, 소련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독일 편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도 의견이 분분하였고, 소련의 이런 행동에 실망한 이들의 공산당 탈당 러시가 이루어졌대. 오펜하이머도 이 때부터 소련을 경멸하기 시작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진 태트록과 4년 정도 사귀고 헤어졌어. 그리고 키티 퓨닝이라는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임신까지 하게 되어 키티는 이혼을 하고 오펜하이머와 결혼을 하였단다. 1940 11월이었어. 키티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면, 키티도 공산주의자로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어. 첫 번째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스페인 내전까지 참전했는데, 그만 전쟁에서 죽고 말았단다. 남편이 전사하고 나서 키티는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와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생물, 화학, 수학을 공부했대. 그 대학에 다니다가 같은 대학 의과 대학 인턴을 사귀고 두번째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실패한 결혼으로 무늬만 유부녀였어. 그 시기에 오펜하이머를 만난 것이란다.


3.

1939 1월 우라늄의 원자핵을 2개 이상으로 쪼갤 수 있다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이것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보통 사람들은 이야기하겠지만, 물리학자들에게는 한 가지를 떠올리게 했어. 핵폭탄(원자폭탄). 우라늄의 원자핵 분리를 이용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1942년 미국의 물리학자들(아인슈타인도 포함)과 여러 관계자들은 모여서 원자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루즈벨트 대통령한테 설명을 했대. 특히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면 큰 일 난다고 했고, 이미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미국은 독일에 비해 원자폭탄 개발이 늦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들의 제안을 허락했고, S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오펜하이머도 동참했단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맨하튼 프로젝트라고 명명했고, 엔지니어 출신 육군 중령인 그로보스가 총지휘를 하였단다. 이렇게 맨하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 1942 9월이었단다. 그로보스는 연구 총책임자로 오펜하이머로 지목했어. 하지만 당시 동료연구원들은 오펜하이머가 총책임자로 적임자는 아닌 것 같다고 했어. 정치권에서도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이유로 반대를 했어.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일을 하면 할수록 총책임자의 적임자가 되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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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한때 괴짜 이론 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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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 프로젝트를 위해서 장소를 섭외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협곡 사이에 위치한 로스앨러모스라는 곳이었어. 그곳에 대규모 연구 단지를 지었고, 가족들이 함께 와서 살 수 있는 마을도 새로 지었단다. 오펜하이머는 연구 단지뿐만 아니라 연구 단지 마을의 인프라에도 신경을 써서 부족함 없게 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전국 각지의 인재들을 섭외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리처드 파인만도 포함되었다고 하는구나. 오펜하이머의 가족들도 로스앨러모스의 공동체 마을에서 생활했는데, 카티는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대. 이곳에 와서 둘째 아이인 딸 토니를 낳았는데, 갓난 아기 토니를 이웃집에 맡기고 첫째 피터만 데리고 여행을 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그곳 생활을 적응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이제 오펜하이머의 목적은 단 하나. 나치스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일. 독일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인물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소문이 있어.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하이젠베르크가 독일로부터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 받았으나 그가 일부러 개발을 늦추거나 못하겠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는 기억이 나는구나.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쓴 소설 <클링조르를 찾아서>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 책을 일고 쓴 독서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

이런 와중에도 FBI는 여전히 오펜하이머를 검열하고 도청하면서 감시했다고 하는구나. 오펜하이머가 전 여친 진 태트록을 만났는데, 소련을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고 의심을 하기도 했어. 하지만 진 태트록은 조울증과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으며, 결국 그 싸움에서 지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4.

양자역학의 거물급 학자인 닐스 보어도 미국으로 망명을 왔단다. 2년 전에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 때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어. 이 내용도 앞서 이야기한 소설 <클링조르를 찾아서>에서도 그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구나. 보어는 원자폭탄 개발에 있어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국제적으로 협의를 해야 한다고 했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개발이 진행될수록 고민이 되었을 거야.

1943 12,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을 중단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어. 그러면 미국도 원자폭탄 개발을 중단해야 하는가. 독일이 아니면 일본도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 원자폭탄 개발은 일정대로 진행되었어. 1945 5월 히틀러가 자살을 하면서 사실상 유럽에서2차 세계대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단다. 원자폭탄을 개발해도 쓸 데가 없는 건가? 이제 남은 것은 일본인데, 사실 일본도 시간만 지나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어. 정치인들과 군인들 사이 폭탄 사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은 원자폭탄에 반대했다는구나.

하지만 변수가 하나 있었어. 소련이 미국과 일본 전쟁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 시간이 지나면 일본이 패망하는 것은 맞는데, 소련이 일본본토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전쟁 후 상황이 복잡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이 해결책이라고 했지. 드디어 원자폭탄 개발이 완료되어 사막에서 폭발 시험을 했는데, 시험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성능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면서도 향후 이 무기가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1945 8 6일 오전 8 14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어.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떨어졌고그 두 방으로 일본은 곧바로 항복을 하고 전쟁은 끝이 났단다. 피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단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끌려온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도 많이 돌아가셨어. 그 이야기는 한수산 님의 소설 <군함도>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

이 일이 있고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는 화학무기처럼 국제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고, 그것이 국제 회담에서 논의되길 바랬어. 하지만 미국, 영국, 러시아(소련)이 모여 진행한 포츠담 회담에서 핵무기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 오펜하이머는 이에 실망하면서도 계속 원자폭탄을 포함한 슈퍼폭탄은 더 이상 안 되고 국제적으로 규제해야 하고 미국도 핵폐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과 군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진 순간부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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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만약에 오펜하이머가 히로시마 폭탄 투하 전에 대통령이 일본인들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인지했다면, 그리고 대도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 폭탄의 군사적 이용이 8월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속았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정부 관료들이 하는 말이면 뭐든지 의심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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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을 앞에서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대통령에게 밉보이는 행동이 되기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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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나중에 누군가 대통령이 손에 피라니, 제길. 그는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묻히지 않았어. 그걸 아프다고 떠들고 다니다니.”라고 중얼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애치슨에게 나는 두 번 다시 저 개자식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1946 1월까지도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는 애치슨에게 오펜하이머를 “5~6개월 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손을 비비면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하여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 울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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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펜하이머는 1945 10.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총 책임자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칼텍으로 돌아왔어. 당시 FBI 국장인 후버는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일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감시를 시작했는데 1946년부터 무려 8년간 감시를 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의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겠구나. 그런 감시와는 별개로 그의 과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1947 3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고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이사로도 임명되었어.

그는 연구소장에 있으면서 TS 엘리엇 등 인문학자들과 작가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개설했지만, 다른 연구원들에게는 좋은 반응으로 보이지는 않았대. 당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엄청난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었어. 아인슈타인, 보이, 디랙, 파울리, 괴델, 폰 노이만 등이 있었어.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냉전시대에 돌입했어.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냉전시대의 안 좋은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어. 1949년 정치권에서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였단다. 공산주의자 지인들이 많은 오펜하이머도 조사를 받았어. 첫 번째 청문회에서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내뱉은 이름들이 큰 영향을 받았어. 동료들과 제자들이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고 담당자를 찾아가 잘못 이야기했다고 했지만,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동생인 프랭크와 프랭트의 아내 재키도 공산주의자 이력이 있어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후 프랭크도 대학에서 쫓겨나고 농장 일을 시작했다는구나. 한편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는 여전히 일상 생활을 힘들어했어. 술에 취해 있는 시간이 많았고 우울증을 달고 살았어. 오펜하이머와 키티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래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어.

1949 8월 소련이 원자폭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오펜하이머가 경고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야. 미국은 소련의 원자폭탄에 대항하기 위해 그보다 성능이 좋은 슈퍼폭탄을 개발하자고 했어. 자문위원회였던 오펜하이머는 강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단다. 하지만 트루먼 정부는 적극적인 슈퍼폭탄 개발 의지를 보였어. 오펜하이머는 반대파로부터 과거 좌익 이력이 있다면서 다시 공격을 받았어. 그 중에 원자력에너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트라우스가 선봉에 섰단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했고, 그에게 비밀취급인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1950년대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라는 것이 있었단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열풍을 이야기하는데,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가 처음 공산주의자가 숨어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시작했는데 근거도 없이 리스트에 오르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했단다. 어쩌면 오펜하이머도 그런 매카시즘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었어. 이미 그 전에 청문회나 맨하튼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을 때 조사를 이상 혐의점 없다고 했는데 다시 조사하고 청문회를 열게 되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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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11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자신은 매카시가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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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재판을 받았어. 그의 사적인 것까지 다 까발려져 공개되었단다.  그렇게 되자 여론은 오펜하이머가 갈릴레이처럼 박해 받는 과학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대. 또는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하기도 했어. 그만큼 그의 청문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청문회였던 거야. 결국 그는 비밀취급인가 자격을 취소당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싶구나. 1960년대 들어서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오펜하이머는 일부 복권이 되었고, 그의 성과들을 다시 인정받아 페르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어. 오펜하이머의 영원한 정적 스트라우스는 이에 격분하기도 했대.

오펜하이머는 1965년 후두암에 걸렸는데 40년 동안 이어진 줄담배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치료를 시작하여 후두암은 완치가 되었지만, 다른 곳에 전이가 되어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단다. 1967 2 18일 오전 10 40분 오펜하이머는 마지막 숨을 쉬었단다. 그리고 1972년에는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가 죽었고, 1977년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딸 토니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대. 아빠가 생각하기에 딸 토니의 자살에는 엄마 키티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렸을 때부터 딸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우울증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술에 취해 있던 시간이 많았으니

이 책에는 앞부분과 뒷부분에 오펜하이머, 그의 가족들, 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일상 사진들이 담겨 있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겠구나.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여전이 오늘날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고 있단다. 누군가는 핵무기가 오히려 전쟁 억제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단다. 하지만 여전히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갖고 있단다. 어떤 또라이 같은 지도자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핵무기를 쓸 수도 있으니 말이야.

….

, 아빠가 메모를 하면서 읽었고, 메모를 바탕으로 독서 편지를 썼어. 메모 중간 건너뛰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독서 편지는 엄청 길어졌구나. 이제 곧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을 하는데 우리들이 좋아하는 로버트 다우트 주니어도 출현한다고 하더구나. 어떤 역으로 출현하나 찾아봤더니, 오펜하이머의 정적인 스트라우스 역으로 나오는구나. 아이언맨의 악역 연기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니 기대가 되는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긴 글 읽느라 고생했다.


PS,

책의 첫 문장: 1967 2 25.

책의 끝 문장: 하지만 그 자리에는 주민 회관이 세워졌고, 그 부근은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 불리고 있다.


뉴욕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가 자신을 불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브리지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내 경력 역시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의 지원서를 J.J. 톰슨(1856~1940년)에게 넘겼다. 톰슨은 러더퍼드 이전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던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69세의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19년에 그는 행정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고, 1925년 무렵에는 실험실에 띄엄띄엄 나오며 가뭄에 콩 나듯 학생을 받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자신을 받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서는 크게 안도했다. 그는 물리학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물리학의 미래와 함께 자신의 미래 역시 유럽에 있다고 확신했다. - P77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 P93

나중에 MIT 총장까지 오르게 될 콤프턴은 당시 오펜하이머의 박학다식함에 기가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맞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괴팅겐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대개 "프린스턴 대학교나 캘리포니아에서 온 기혼자 대학 교수들이야. 그들은 물리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교양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아. 그들은 독일인들의 섬세하고 잘 조직된 지적 활동을 부러워하고 있고, 그와 같은 물리학을 미국으로 이식하고 싶어 하지."라고 썼다. 이는 확실히 콤프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 P105

괴팅겐은 성인이 되어 가던 젊은이로서 오펜하이머가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양자 혁명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던 젊은 과학자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대변동에서 참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물리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짧은 9개월 동안 그는 학문적 성과와 성격의 변화를 이루었고,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단지 1년 전만 해도 그의 생존까지 위협했던 불안한 감정 상태는 이제 상당한 학문적 업적과 그에 따르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 P118

요점을 말하자면 오펜하이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대의에의 헌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매카시 시기의 가장 해로운 특징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 P244

오펜하이머는 양자 역학을 책만 읽어서는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첩경이었다. 그는 같은 강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와인버그는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 학생은 오펜하이머에게 달려가 그 문제를 자신이 풀어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좋아, 그것이 내가 오늘 세미나를 한 이유라네."라고 대답했다. - P273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 P443

몇 분 후, 뜨거운 뉴멕시코의 태양을 받으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앞으로 연구소의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 P501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도 아루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 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 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 P571

1953년 무렵이면 냉전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핵의 지니 요정을 호리병 속에 가두려 했던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미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류로 인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정치 기류는 오펜하이머를 병에 가둬 바닷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 P684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P701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폴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 P746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 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 - P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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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1권 - 개화기편,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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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역사 관련 책을 좋아하잖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 옛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더구나. 그리고 몰랐던 역사 상식 하나씩 알게 되는 것도 좋고 말이야. 비록 얼마 못 가 까먹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말이야. 이런 역사책을 학창시절에는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르겠구나. 국사, 세계사라는 과목들이 아빠가 싫어했던 과목들이거든. 그런데 요즘에는 무척 좋아하게 되었단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여러 권으로 된 시리즈도 즐겨 있는데, 이번에 읽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시리즈>도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시리즈란다. 강준만 님의 <한국 현대사 시리즈>도 있는데, 그건 분량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 나고, <한국 근대사 시리즈> 10권으로 한번 도전할 만하다 생각했어. 너희들에게 해줄 역사 이야기꺼리도 생기고 말이야. 강준만 님은 교수이자 비평가로도 많이 활동을 하는 분이란다. 예전에는 아빠랑 정치적 노선이 맞아서 그의 책들도 여럿 가서 보긴 했는데, 언젠가부터 다른 길을 가시는 것 같더구나.

그래도 <한국 근대사 시리즈>는 역사물이니 괜찮겠다 싶었어. 아빠도 근대사를 한번 쭉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말이야. 그런데 이 책은 구성이 좀 독특하구나.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여러 역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쓴 내용들을 발췌를 해서 정리를 해주는 식이란다. 지은이의 생각도 들어있지만, 다른 역사가들과 비평가들의 글들이 더 많이 실려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아빠가 모르는 비평가들이 많은데, 그 비평가들이 옳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구나. 심지어 아빠가 싫어하는 신문의 내용도 실었는데, 아빠가 보기에는 편중된 시각으로 적힌 것 같은데, 지은이께서는 아무런 평을 하지 않더구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방법은 아빠에게는 별로였단다. 아빠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한번 쭉 훑어보는 기회로만 삼아야겠구나.


1.

언제부터 우리나라 근대를 봐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그 시기는 개화를 통해 외부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정의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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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였다. 그 충돌은 개화기 이전부터 일어났으니 그건 바로 천주교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 대응은 박해로 나타났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이는 개화기가 결국 망국(亡國)으로 종결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자폐적 시스템과 더불어 내부갈등이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는 사실을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개화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천주교 문제를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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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도 본 것처럼 개화기에 천주교 문제는 빼놓을 수 없단다. 18~19세기 천주교가 탄압을 했는데, 천주교가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한단다. 천주교에서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나라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것이야. 우상숭배를 너무 폭넓게 본 것인데 그것은 천주교의 실수였단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했으니 당시 법이나 마찬가지였던 관혼상제를 거역하는 일이었어. 그래서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게 된 거야한참 나중에 교황에 의해 동양의 조상 숭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규정을 해서 오늘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제사도 지내고 그런단다.

아무튼 천주교는 17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1785년 사교로 규정지었다고 하는구나. 정조 시절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으나, 정조가 죽고 나서 반대파가 정권을 잡고 나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어. 정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남인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는데, 반대파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목적에 사용했단다. 1810년 신유박해는 많은 천주교도가 죽었고, 남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단다.  이때 아빠가 좋아하는 정약용도 유배를 가게 되었지.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매관매직이 널러 퍼지게 되었단다. 대표적인 매관매직은 공명첩이 있었는데, 돈을 주고 관리직을 사는 것이었어. 능력도 필요 없고 시험도 필요 없고 돈만 있으면 관직을 가질 수 있었지. 이러니 백성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졌고, 실패했지만 홍경래의 난까지 일어나게 되었단다. 헌정 때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등이 일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알려진 김대건을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단다.


2.

1850년이 넘어서는 이양선, 즉 서양배들이 우리나라 앞바다에 출몰이 잦았단다. 세계적으로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이라 동양의 끝까지 빼앗을 땅이 없나 기웃하던 배가 아닌가 싶구나. 이 때는 이미 여러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단다. 중국 베이징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몰락한 상태이고, 일본은 서양 열강을 따라 하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단다. 그런데 조선은 출처 없는 낙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단다. 그렇다고 나라 기반이 제대로 되었냐? 그것도 아니야. 전정, 군정, 환정 등 삼정이 문란하여 백성의 여론은 땅에 떨어졌고, 어려울 때 빌려준다는 환곡의 이자가 치솟아 백성들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그래서 이 시절 민란이 많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했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절에 흥선대원군의 계략에 의해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올랐어. 고종 대신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나라의 정책도 그에 의해 다 결정되었어. 비변사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반들도 군포세를 납부하게 하는 듯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정책들을 개편하여 민심을 얻기도 했어. , 나름 정치개혁을 하려고 노력했구나. 하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삶은 고달펐단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의 호의적이었대. 쇄국정책을 일관한 사람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약간 의외구나. 오히려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어. 그들의 거센 반발을 눈치 볼 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했대.(병인 박해)

1860 4 5일 최제우가 서학에 대항할 학문으로 동학을 창시했단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 즉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여 속였다고 해서 체포를 했단다. 많은 백성들의 항의로 금방 풀려났지만, 얼마 후 다시 체포되었고, 1864년 참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단다.

….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들어왔다가 그 선원들이 우리나라 백성들을 난폭하게 대했고 해적질을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단다. 그래서 박지원 손자인 박규수의 지휘아래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켰단다. 물론 그곳에 타고 있던 선원들도 죽었지. 이 일이 나중에 미국에게 신미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빌미를 주게 된단다.

같은 해, 프랑스는 프랑스인 출신 신부의 죽음을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군함을 몰고 한강 따라 한강까지 왔었다고 하는구나. 서울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않자 일단 후퇴했는데 강화도에서 이를 대비하고 있는 조선군과 격전을 벌였어.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이 이때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서적, 직지심경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보물들을 포함한 많은 책과 유물들을 약탈해갔단다. 그렇게 약탈해간 것인데 오늘날까지 돌려줄 생각을 없다니, 선진국의 양심들은 어디다 팔아먹었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고 5년이 지난 1871,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를 찾겠다고 왔다가 조선의 거센 항의에 전투를 벌이게 되었단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신미양요였단다.

….

서양열강 뿐만 아니라 일본도 호시탐탐 노렸단다.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에 대한 학습이 되어 있었고, 주변국 중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조선을 간섭하기 시작했단다. 일본 운양호 사건을 조작하여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단다. 이때 적극적으로 일본인 입장에서 도와준 김인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러니까 이완용 이전에 김인승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친일파 1호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단다.


3.

최한기라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본 사람인데 그는 우리나라 개화와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많은 글을 쓰신 분이란다.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가 어떤 분이었는지 잘 몰랐는데, 조선말 진보 지식인이었고, 많은 책들을 쓰셨구나. 나중에 시간 되면 그에 관한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최한기에 대해 쓴 책이 있는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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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89)

금장태는 최한기는 조선 후기 실학파의 마지막 인물이자 근대 개화사상으로 한걸음 나아갔던, 그 기대의 가장 앞선 진보적 지성인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저술은 1000권이나 된다는데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직 100여 권뿐이다. 그의 탁월한 학문의 폭넓은 식견이 알려지자 당시의 여러 재상들은 그를 조정에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벼슬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신미양요로 강화도가 미국 함대에 침략당하자 친분이 있던 유수의 자문요청에 조언한 바 있다. ……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낡은 것을 바꾸는변혁의 시대로 규정한 그는 차라리 옛것을 버릴지언정 지금을 버릴 수는 없다하여 진보정신을 표방하고 과학과 문명이 더욱 발전하고 역사가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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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개화파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단다. 특히 서양제도와 사상까지 모두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급진개화파들이 그랬단다.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에 유학을 가면서 일본 메이지유신 계몽운동을 앞장선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고 와서 우리나라도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야 하자고 주장했단다. 참고로 급진개화파와 달리 우리 사상과 도덕은 그대로 두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고 하는 온건개화파도 있었단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정부도 개화 정책을 추진했어. 민영익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는데,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서 청나라에는 영선사,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단다. 그리고 서양의 나라와는 처음으로 미국과 1882년에 수호조약을 맺었단다. 역사책에서는 조미수호조약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인데, 이걸 주도한 사람은 청나라의 이홍장이라는 사람과 미국의 슈펠트였단다. 이렇듯 이 시절 청나라의 간섭이 심했단다. 나라의 자존심이 서질 않던 시절이구나. 조선은 참석하지 않고 조미수호조약을 승인만 했다고 하는구나.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다 보니 구식 군대에서 봉급을 일 년 넘게 미지급하게 되었는데, 참다 못한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었단다. (1882) 임오군란을 일으킨 지도부는 흥선대원군과 면담을 했는데, 한직에 물러나 있던 흥선대원군이 이들을 뒤에서 조정한 것으로 보인단다. 난을 일으킨 군인들은 궁궐을 습격하고, 이때 민비(명성황후)는 도망을 간단다. 얼마 전에 펄 벅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서도 명성황후가 궁궐 습격에 충주까지 도망을 가는 장면이 있었잖아.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장면이란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흥선대원군은 입궁하여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흥선대원군이 입궁을 하게 되자 난은 잠잠해졌어. 역시 흥선대원군이 뒤에서 조정한 것이 맞는 것 같구나. 흥선대원군은 입궁하자마자 정적이었던 민비의 국상을 준비했단다. 민비가 도망갔는데 죽은 걸로 치고 장례식을 치르려 했던 것이란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가 개입하게 된단다. 아무래도 민비 쪽에서 움직인 것 같구나.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했단다. 한 나라의 왕의 아버지를 다른 나라 군대가 침입해 끌고 가다니흥선대원군이 잘못한 것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다른 나라에서 끌고 간다는 것이 말이 되니? 국력이 약한 당시 우리나라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단다. 재집권한 지 33일만의 일이었어. 그렇게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4년이나 유폐되었다가 풀려난다고 하는구나. 민비는 궁에서 도망간 지 51일만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단다.

….


4.

미국과 수호를 맺은 다음 조선 정부는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한단다. 이것도 펄 벅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서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1883년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등은 미국 견학을 떠나게 된단다. 민영익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들렀다고 오고,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서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했단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지. 그는 미국의 신문에까지 실렸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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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한편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미국 생활은 어떠했는가?

미국 <뉴욕타임스> 1883 11 8일자는 사절 수행원의 한 사람인 유길준은 자기나라의 옷을 벗고 지금은 서양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에드워드 모스(1838~1925) 교수 지도하에 학생으로 이 나라에 머물 것이다. 어제 저녁 이 젊은이는 5번가(뉴욕)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몇 마디의 영어를 사용하여 경찰관에게 호텔 가는 길을 물어 찾아왔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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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들 중 박영효, 유길준이 주축이 되어 1883년 한성순보를 창간하게 되는데, 국내 소식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소식도 많이 알려주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학창시절 때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구나.

….

조선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다른 서양의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어. 영국과 맺은 조영수호조약, 러시아와 맺은 조러수호조약 등. 그런데 조영수호조약의 내용에 영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영신조약이라고 다시 맺었는데, 영국 제품에 낮은 관세를 보장하는 등 우리나라에 엄청난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국제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던 우리나라는 이때 맺은 조약들이 대부분 우리에게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을 거야.

마지막으로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잖아. 그는 조선의 시스템을 서양의 제도로 싹 바꾸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고종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어. 고종도 김옥균의 주장을 지지했어. 고종도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개화사상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했거든. 이미 왕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 정변의 성공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1884 12 4.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회에서 척화수구파들을 비롯하여 대신들을 십여 명 죽이고 개화파가 정권을 잡았단다. 이 일을 성사시킨 사람들은 젊은 급진개화파인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이었단다. 그들은 새로운 내각을 구성을 했어. 갑신정변에 의해 구성된 내각은 대부분이 20대와 30대로 이루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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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갑신정변의 내각은 청춘정권이었다. 내각 서른두 명의 연령을 보면 20대와 30대가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김옥균 서른세 살, 홍영식 스물아홉 살, 서광범 스물다섯 살, 박영효 스물세 살, 서재필 스무 살 등 주동자들은 더 젊었다. 혈기가 지혜를 앞섰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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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인지 고종은 그들에 반감을 갖게 되었단다. 고종의 이런 낌새와 함께 다시 청나라의 간섭으로 청나라 군대가 궁을 침략했단다.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어. 하지만 고종은 끝내 그들을 배신하고 버렸단다. 이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3일의 권력을 내려놓고 도망을 가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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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는 그렇게 개화를 버렸다. 김옥균은 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는다. 이제 곧 천하대역죄인이 될, 그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은 몰살을 당하게 될, 그리고 자신은 10여 년의 망명객이 될 것이며 망명지 일본에서도 버림받은 후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그러나 군주를 사랑하였고 조선의 강대한 힘을 꿈꾸었던 김옥균은 이렇게 군주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김옥균과 함께 후퇴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군주의 곁에는 이제, 청군과 군중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홍영식, 박영교만 남았다. 실패한 혁명 뒤에 남은 것은 군중의 분노뿐이다. 거리는 살육으로 뒤덮인다. 일본인과 개화파들, 그들의 가족은 보이는 대로 습격을 당한다. 김옥균의 집과 일본공사관은 성난 군중의 손으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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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일본군대까지 끌어들여 반대를 무차별하게 죽이면서 정권을 잡는 방식이 민심에도 부합하지 않았단다. 그러니까 정변에 대한 지지가 적었고, 그렇다 보니 명분도 줄어들었던 것 같구나. 결국 청나라 군대도 쉽게 간섭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구나.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신용하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여 정리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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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이어 신용하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실패 요인은 일본군 무력을 차용한 요인이라며 갑신정변은 아무리 필요하고 애국적인 목적을 갖고 있어도 그 수단에 있어서 침략의도를 가진 일본의 힘을 일부 빌려서 수행하려 해서는 실패하고 만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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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한국 근대사 산책> 1권을 이야기해보았단다. 이 시리즈는 이미 10권까지 다 사 놓았기 때문에 끝을 봐야 한단다. 한 달에 두어 권씩 읽으면서 올해 안에 끝내는 것으로 목표를 삼아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이다.

책의 끝 문장: 이는 김옥균 암살사건을 다루면서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정복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의 의미인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동쪽으로 와서 정복한 도시인 셈이다. 이전 이 땅은 발해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고 이후로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땅을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라고 표기했는데 바닷가에 ‘해삼’이 많아서 해삼위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도 4~5개월간 결빙하기 때문에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 P72

역설이지만 서학은 물론 동학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죄, 즉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시사하는 건 아닐까? 민생을 도탄에서 건져낼 수 없는 무능이, 언제든 민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 제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망국(亡國)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P90

다블뤼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자선(慈善)의 원조 국가가 조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이 나라에서는 자선 행위를 진정으로 존숭하고 실천한다. 사랑방에서 받는 대접 이외에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로 그를 위해 밥을 다시 하기도 한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식사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뱃사공들은 밥을 먹지 않고 배 타러 나온 사람과 나누어 먹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서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눈다. 여비가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
먼 훗날에라도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 P99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 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하고 이어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이 개항했다. 학계에선 근대화가 되는 시대를 의미하는 ‘근대’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논쟁이 있는데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강요된 것이긴 하지만 개항을 통해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한 1876년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 P161

<한성순보>는 신문발간의 동기와 기술적 지원은 일본에 의존했지만 신문의 뉴스원, 내용과 관련해선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신문이 기사로 가장 많이 다루었던 국가는 중국(453회)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베트남(165ㅎ회), 프랑스(71회), 영국(56회), 일본(53회), 미국(47회) 등이었다. 중국 관련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 이외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선교사나 상인 등이 발간하던 중국계 신문들을 주요 뉴스원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성순보>의 실무자들은 "거의가 한학자와 중국어 역관(譯官) 출신들로서 한문에는 능통한 반면 일본어는 몰랐다는 점과 이들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더 숭상"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베트남, 프랑스 관련 기사가 많았던 건 1884년 6월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1883) 문제로 일어난 청불전쟁과 베트남이 프랑스에 먹히는 비극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 감정 때문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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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양장)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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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Jiny 가 학원에서 읽어야 한다면서 책목록을 보여주었단다. 그 목록에 이희영 님의 <페인트>이 있었단다. 이 책은 예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많이 노출이 되어서 책 제목과 책 표지는 이미 알고 있던 책이었어. 책 제목과 책 표지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가늠이 안 되었단다. 왜 제목이 페인트일까? 궁금했지. 이 궁금증은 우리 식구들 모두의 궁금증이었지.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빠가 가장 먼저 읽어 보았단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했단다. ㅎㅎ Jiny도 아빠 다음으로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겠구나.

너희 같은 학생들에게 추천을 해주어서, 이 책에 교훈적인 내용도 담겼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책을 펼쳤단다. 책 소개를 전혀 읽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SF 소설이더구나. , 아빠가 SF 소설은 좋아하니 더 반가웠단다.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휘리릭 읽었단다. Jiny는 이미 책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 아빠의 기억력을 백업한다는 생각으로 줄거리에 충실하게 적어보련다.


1.

가까운 미래인데, 먼 미래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의 시대에는 아이들의 양육을 포기한 부모들을 위해서 나라에서 체계적으로 아이를 양육해주는 NC센터가 있었단다. NC Nation’s Children의 약자였어. 그리고 아이를 낳고 양육을 포기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했어. 그래야 양육 문제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떨어지는 출생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구나. 아이들을 낳아본 아빠로서는, 미래가 되었다고 해서 엄마, 아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본능이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더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양육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런 사회가 되어도, 양육 포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야.

아무튼, NC센터는 국가에서 아이들을 키워주는 그런 단체였고, NC 센터는 나이에 따라 퍼스트 센터, 세컨드 센터, 라스트 센터로 구분되어 있었어. 마지막 라스트 센터는 13살부터 19살까지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면접을 통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단다. 이것이 오늘날 입양 시스템과 좀 다른 것이란다. 오늘날 입양은 부모가 될 사람이 아이를 선택하게 보통인데, NC 센터에서는 입양하고 싶은 사람들을 아이가 면접을 여러 번에 걸쳐서 하고 나중에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그때 NC 센터에서 나가 자신의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거야.

NC 센터의 아이들을 입양한 부모에게는 나라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기도 해. 이렇게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면접하는 것을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이라고 하고, 부모 면접을 영어로 한 페어런츠 인터뷰를 줄여서 부르다 보면 페인트와 발음이 비슷해서 아이들 사이에 부모 면접을 은어로 페인트라고 불렀단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페인트가 된 것이란다.

센터에서 아이들을 보호해 주는 어른을 가디언이라고 하고, 줄여서 가디라고 한단다. 그리고 센터의 아이들은 입양이 되어 센터를 떠나기로 확정되면 이름을 갖게 되고 그 이전에는 자신이 태어난 달의 영어 이름을 줄인 것에 숫자를 붙여서 부른단다. 주인공은 1월에 태어나서 제누301’이라고 불렀어. 제누301 17살로 센터 안에서는 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단다. 19살까지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NC에서 나가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이 경우 암암리에 NC센터 출신이라는 차별을 받게 된다고 하더구나. 센터장 박씨와 가디 최씨는 제누301 19살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부모를 만나게 해주려고 노력을 했단다. 센터장 박씨는 센터를 위해서 참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어. 자신의 일보다 센터의 일이 늘 먼저였어.


2.

보통 NC 센터에 아이를 입양하려는 부부는 준비를 많이 해 온단다. 아이의 면접을 받는 대상이 부부들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젊은 30대 부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센터에 들렀단다. 서하나, 이해오름이라는 부부인데 그들의 자세부터 부모가 되려는데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 그저 국가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려고 온 사람들인 것 같아서 가디들은 그 부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다른 준비를 많이 한 사람들과 달리 솔직함이 좋다면서 제누301은 그들을 면접하겠다고 했단다.

면접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솔직함에 면접은 3차까지 이어졌단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제누301은 입양을 거부했단다. 서하나, 이해오름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야. 제누301은 이곳 NC센터에 더 배울 것이 있다고 했어. 마지막 19살 때까지 NC센터에서 배우고 이 곳을 나가서 혼자 세상에 부딪혀 보겠다고 했어. 그런 점을 마지막 면접 때 서하나에게 이야기를 했고, 서하나도 제누301의 진심을 이해해 주었단다. 그리고 NC센터를 졸업하게 되면 찾아오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했단다. 그러면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고 친구가 되자고 했단다.

제누301인 센터장인 박씨를 만나러 갔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어. 센터장님을 비롯하여 가디님들과 함께 19살까지 센터에 머무르면서 공부하고 배우겠다고 했어. 그리고 NC센터 출신의 차별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당당히 차별을 없애는데 노력하겠다고 했단다. 제누301을 각별하게 생각했던 센터장님도 제누301의 진심을 받아주었단다. 그래서 제누301은 센터에 남기로 했단다. 아빠 생각에 제누301 19살에 되어 NC센터를 졸업을 하게 되더라도 NC센터에 가디로 취업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러면서 NC센터 출신의 받는 차별을 깨려는 사회운동도 함께 말이야. 센터장 박씨와 다른 가디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이 읽은 사람들의 서평에 나는 몇 점 부모일까?’라고 자문을 많이 하는 모양이구나. 아빠는 그런 자문은 별로라고 생각해. 부모 자식 간을 무슨 점수로 매기니. 정답 없는 사이, 아니 모든 것이 정답인 사이인데 말이야.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아빠의 아이들이라서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되었단다.


PS,

책의 첫 문장: 두 사람은 홀로그램 속 모습과 약간 달라 보였다.

책의 끝 문장: 열여덟, 아직 태어나지 않은 껑충한 아기가 성큼 계단 위로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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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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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스타그램에서 가끔씩 신간으로 나온 책 광고가 보인단다. 어느 날 책 광고 카피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멘트가 후덜덜.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내 인생은 악몽이 됐다.”

라는 광고 카피였단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말을 대문짝 만하게 써 놓다니용감한 출판사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책인가 싶어 광고의 다음 게시물들을 넘겨 보았단다. 소설이더구나. , 지은이가 필립 로스. 필립 로스의 소설들을 서너 권 읽었는데, 모두 괜찮아서 두어 권 사서 재어두고 있었는데신간이 나왔구나. 아주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광고 카피를 달고 말이야. 이런 책은 안 살 수가 없지. 바로 사서 읽었단다. 이 책의 리뷰 중에 필립 로스의 책들 중에 가독성이 가장 좋았다는 평이 있었는데 그 평대로 책장이 휙휙 넘어가고, 재미 또한 좋았단다.

지나간 역사의 어떤 일이 다르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으로 쓴 소설을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한단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승전국이 독일이었다면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이런 걸 가정하고 소설을 쓰는 것이야. 이번에 읽은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도 그런 대체 역사 소설이란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정했냐면…. 1940년 미국 대통령이 루즈벨즈가 아니고, 반유대주의자였던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계2차 대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이 소설에서 반유대주의자로 대통령이 된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은 실존 인물이었단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가 살았던 시절에도 인기가 있었고, 2차세계대전에 참가에 반대하면서 반유대주의 발언도 했었다고 하는구나. 전쟁 전이긴 하지만 독일에 방문하여 히틀러부터 독일 훈장을 받기도 했다는구나. 그가 후에 대통령 후보 추천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지은이 필립 로스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가 그때 실제로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으로 소설을 쓴 것이란다.


1.

주인공은 지은이와 이름이 똑 같은 필립 로스였단다. 당시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가족들이 어떤 생활을 했을까, 상상을 하면서 소설을 쓴 것 같아.

때는 1940. 필립은 7살이었고, 형 샌디는 12살이었고,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어. 아버지는 진급을 해서 다른 마을로 이사 갈 기회가 있었으나, 이사 갈 마을은 유대인들이 적다고 진급을 포기할 정도로 유대인들과 함께 지내려고 하셨단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사촌형 앨빈도 함께 지내고 있었단다.

당시 미국에서는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의 인기가 엄청 좋았어. 비행기를 타고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인데다가 첫 아이가 유괴 당한 후 죽어서 그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단다. 아이의 유괴 사건 이후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다가 독일에도 방문하였고, 총통과 친해지면서 독일로부터 여러 훈장들을 받았단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미국에 와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인기에 힘입어 최종 후보가 되었단다.

그가 인기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공약 때문이었어. 왜 우리 젊은이들이 유럽의 전쟁에 참가해서 죽어야 하는가? 라는 거지. 전쟁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공약이 잘 먹혀 들어갔지. 우리만 괜찮으면 된다는 위험한 생각인데, 그것이 죽음과 관련이 있다 보니 잘 먹힌 거지. 그런데 그가 친나치에 반유대주의자란 것이 널리 알려져서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단다.

필립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루즈벨트가 당선될 것을 믿으면서도, 혹시나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을 했단다. 그런데 벨겔 스도르프라는 유명한 랍비가 린드버그를 지지한다고 했어. 랍비가 린드버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내용 때문이야. 린드버그가 반유대주의자인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어. 린드버그는 미국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미국 고립주의로 지지도가 급상승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단다.


2.

이에 유대인들은 몸을 사리거나 격렬히 비판했단다. 앨빈 형은 유대인의 후원으로 무료로 대학에 다닐 수 있었으나,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캐나다로 건너가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를 했단다. 아버지가 이 일이 있기 전 앨빈 형을 말렸는데, 심한 말다툼 끝에 앨빈 형은 끝내 캐나다에 갔단다.

린드버그는 취임 후 히틀러를 만나 평화 협약을 했고, 추축국 중 하나였던 일본과도 협약을 맺었단다. 이 협약들에는 미국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누가 봐도 미국은 추축국 편을 드는 모양이었단다.

필립의 식구들은 린드버그가 당선이 되기 전부터 워싱턴 DC를 여행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이 여행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갔단다. 테일러 씨라는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었는데, 워싱턴이 아무래도 미국의 정치적 수도이다 보니, 필립의 아버지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적 발언을 했단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조마조마해 하셨어. 그런데 호텔 체크인부터 문제가 생겼어. 호텔에서 실수로 이중으로 예약을 받게 되어서 돈을 환불해주면서 호텔에 묵을 수 없다고 하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지 빈 방을 마련해주는 것이 상식인데, 돈만 툭 던져주고 만 것이란다. 아버지는 이것이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어. 경찰을 불러 따지려고 했으나, 경찰도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제 없다면서 호텔 편을 들어주었단다.

가이드였던 테일러 씨가 다른 호텔을 알아봐주어 다행히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단다. 식당에서 가서는 유대인을 욕하는 반유대주의자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어. 아버지는 미국인인 자신이 왜 미국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면서 큰 소리를 치셨지. 여행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단다.

….

필립에서는 이모 이블린이 있었어. 그런데 그 이모가 린드버그를 지지했던 스도르프 랍비의 비서로 일했어. 아버지는 그런 이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단다. 어떻게 린드버그를 위해서 일할 수 있냐면서 말이야. 유대인 청소년들을 위한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는데, 이모는 그 프로젝트를 샌디 형에게 추천했어. 아버지가 반대를 했지만, 샌디 형은 가고 싶다면서 우겨서 8주간이나 남부에 있는 농장에서 체험을 하고 왔단다.

이 프로젝트를 다녀온 이후 샌디는 농장에 대한 동경심이 커졌고, 샌디가 다녀온 남부 지역이 공화당지지를 해서 그 영향을 샌디도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어. 아버지와 정치적 노선과 달라 충돌하기도 했어. 샌디는 그 이후 이모 이블린과 스도르프 랍비가 일하는 동화청이라는 곳에서 일하기도 했어.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가 유대인 청소년들을 공화당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인 것 같았어.


3.

한편 앨빈 형은 전쟁에 참가했다가 왼쪽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전쟁과 부상에 대한 심한 후유증을 겪게 되었어. 처음에는 거의 폐인 생활을 했는데 조금씩 재활에 힘쓰려고 했단다. 필립도 앨빈 형과 함께 지내면서 도와주었어. 하지만 이내 노름에 빠지며 일상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어.

친척 중에 몬티 삼촌이 있는데, 앨빈 형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자, 삼촌의 말 따라 일을 하려고 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단다.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어. 그렇게 잠깐의 노력이 좌절되자, 앨빈 형은 집을 떠나서 셔시라는 친구의 삼촌이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나라 안에서는 한 동안 조용히 있던 루즈벨트 전 대통령이 반 린드버그 세력을 집결시키면서 시위와 집회를 했단다. 필립의 집안은 정치색이 두 개로 나뉘어졌단다. 필립과 아버지, 어머니는 루즈벨트를 지지하고, 이블린 이모와 샌디 형은 린드버그를 지지했어. 이블린 이모는 스토르프 랍비와 함께 백악관에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기도 했는데, 독일에서 온 히틀러의 측근도 참석했단다. 유대인들을 그렇게 학대하는 히틀러의 측근과 함께 연회를 하다니이게 말이나 될 소리냐며, 아버지는 이블린 이모와 심한 말싸움을 했고, 이모를 집에서 쫓아냈단다.

린드버그 정부는 홈스테드 42’라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유대인 가족들을 특정 지역에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단다. 이제는 대놓다 유대인들을 차별하려는 것이었어. 필립의 엄마 베스는 캐나다로 가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곳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어.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이 나라에서 쫓겨나야 하냐고 말이야. 린드버그를 비판하던 유대인 방송인 윌터 윈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그는 방송국에서 퇴출되었단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다음 대선에서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이어지자, 윌터 윈첼은 자신이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단다. 그러면서 지역을 돌면서 유세를 했는데, 반유대주의자들의 테러에 의해서 그만 피살되고 말았단다. 나라는 점점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지. 반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이 이어졌는데,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도 않았어.


4.

그런데 뜻밖에 일이 벌어졌어. 1942 6월 어느날 린드버그는 자가비행기를 타고(그는 전직 비행사답게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단다.) 워싱턴을 가던 도중 사라졌어. (전직 비행사인 그에게 이런 일은 아주아주 드문 일이지.) 대통령의 실종. 이동 경로를 며칠 동안 수색했지만, 비행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어. 독일은 영국군이 린드버그를 납치해 갔다고 주장했어. 영국은 독일이 린드버그를 데리고 가서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고 했어. 린드버그가 사라지고 부통령인 휠러가 대통령 대행 임무를 하고, 나라는 계엄령이 내려졌는데, 혼란은 더해갔단다. KKK를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백여 명이나 죽고 말았단다.

이 시기 필립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힘든 시기를 보냈단다. 필립의 친구 셀덴의 엄마가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당했어. 엄마와 둔 둘이 살던 셀덴은 혼자 있게 되었는데, 셀덴이 살고 있는 곳까지 멀리 떨어져 있었어. 아버지는 샌디형과 함께 셀덴을 데리러 폭동과 혼란의 한 가운데를 질러 갔단다.

….

휠러의 대통령 대행은 일주일 남짓하고 의외에 사건으로 끝이 나고 말았단다. 린드버그의 아내, 그러니까 영부인이 휠러의 반국가적 불법에 대해 폭로를 했어. 영부인은 국회에 민주주의를 다시 수립해 달라고 요청을 했어. 휠러는 탄핵이 되었고, 대통령 재선거가 진행되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다시 당선이 되었단다. 그렇게 다시 나라를 제자리에 돌려 놓았지. 루즈벨트 대통령은 연합국을 지지했겠지. 그가 당선된 지 한 달 만에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했고,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단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1945년 종전을 얼마 앞두고 죽고 말았단다.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가지고 왔구나. 실제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종전을 얼마 앞둔 1945 4월에 죽었거든.

….

그런데 나중에 이블린 이모가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해주는데 놀라움 그 자체였단다.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 모두 히틀러의 작전이었다는 거야. 린드버그의 아이를 유괴한 것은 독일이었고,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다른 아이였고, 실제 린드버그의 아이는 독일로 유괴해 갔으며, 린드버그 부부가 독일에 왔을 때 아이를 보여주었다고 했어. 그리고 아이를 인질로 린드버그로 하여금 미국에 친독정부를 만들게 한 거야.

집권 중에 린드버그는 다시 독일에 가서 아이를 만났는데, 아이는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고 독일 소년군 수업을 받고 있었어. 완전히 독일 사람이 다 된 거지. 이에 린드버그 부부는 그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독일에서 시키는 것에 대해 조금씩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는구나. 그리고 그 와중에 린드버그가 실종된 것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린드버그의 실종도 독일의 짓이라는 것인데….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났단다. 지은이의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것이 2004년이었어. 필립 로스가 1933년생이니까, 일흔 넘어서 쓴 소설인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창의력 넘치는 소설인 것 같구나. 이제부터 <미국을 노린 음모>를 아빠가 읽은 필립 로스의 소설들 중에 가장 좋았던 소설로 손꼽아야겠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함이 하나 있었어. 만약 아빠가 그 시절 미국에 살고 있었고, 전쟁에 나갈 나이가 되었거나 그런 자식들이 있었다고 했을 때, 친나치이긴 하지만 린드버그처럼 절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가지고 대선에 나왔다면 그를 뽑지 않을 도덕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어. 루즈벨트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고 하지만, 내가 또는 내 자식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을 지도 모르는데, 그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 되었을 것 같구나.

그런데 친나치주의자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약을 해도, 그걸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히려 추축국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구나. 선거를 할 때, 후보자가 나중에 자신의 공약을 지킬 수 있는지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단다. 그걸 우리나라 국민들이 못해서 고생을 하고 있구나. 줄거리를 주절주절 쓰다 보니 독서 편지가 길어졌는데 그만해야겠다. 안녕.


PS,

책의 첫 문장: 이 기억엔 두려움이 잔뜩 스며 있다.

책의 끝 문장: 그애 자체가 토막난 다리였고, 그애가 결혼한 이모와 함께 살기 위해 열 달 후 브루클린으로 떠날 때까지 나는 그애의 의족이었다.


윈첼은 리벤트로프를 신사인 척하는 사기꾼이라 불러. 그가 전쟁 전에 뭘 했는지 아니? 샴페인을 팔았어. 술을 파는 장사꾼이었단다. 샌디. 그는 사기꾼이야. 재별 정치인에 도둑에 사기꾼이지. 심지어 그의 이름에 붙은 ‘폰’도 가짜야. 하지만 넌 이런 것들 것들을 전혀 모르고 있어. 넌 폰 리벤트로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벨스와 힘러와 헤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폰 리벤트로프 씨가 다른 나치 전범들과 호화 만찬을 즐기는 오스트리아의 성이 어떤 곳인지 들어봤니? 어떻게 그의 것이 됐는지 알아? 빼앗았어. 성주(城主)인 귀족을 힘러가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고, 그래서 술 장사꾼의 소유가 된 거야! 샌디, 단치히가 어디인지, 거기가 어떻게 됐는지 아니? 베르사유 협약이 뭔지 알아? <나의 투쟁>에 대해 들어봤니? 폰 리벤트로프에게 물어봐라. 그가 대답해줄 거다. 그리고 나치의 관점은 아니지만, 나도 대답해줄 수 있어. - P269

아버지의 삶이 고되다는 건 아침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술을 한 잔씩 하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보통 우리집에서 포어로제스 한 병이 비려면 몇 년이 걸렸다. 절대금주를 유난히 강조하는 어머니는 스트레이트 위스키의 냄새는 물론이고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두 분의 기념일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보스에게 얼음을 넣은 포어로제스를 대접할 때가 아니면 언제 술을 마셨던가?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샤워하기도 전에 작은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른 후 머리를 뒤로 젖히며 벌컥벌컥 마셨고 그런 뒤에는 즉시 백열전구를 집어삼킨 듯한 얼굴로 변했다. "좋아!" 아버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 좋아!" 그런 뒤에야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양껏 음식을 먹었고 단 한 번도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았다. - P331

마치 이렇게 해괴한 경우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옳은 판단과 틀린 판단이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다른 누구도 어리석음의 손에 이끌리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의 비통함은 후회로,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채찍질로 표출되었다. 어머니는 단지 직감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 직감은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내렸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정말 가혹하게도 어머니는 설령 본능을 거부하고 행동했다고 해도 어떤 이유를 찾아내 자신의 행동을 개탄했을 정도로 무조건 자신이 파국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 P465

어머니가 고통스러운 혼란에 빠져 자책하는 것을 지켜보는(그리고 그 자신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온 것은, 사람이란 옳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잘못된 일을 할 수 있고, 가끔은 그것이 너무 잘못된 일이라 혼란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위태로울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으며(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곧 뭔가를 하는 경우일 때를 제외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주 큰일을 하는 것이므로) 심지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흐름에 매일 체계적으로 저항하는 어머니에게도 그렇게까지 불길한 혼란을 감당할 체계적인 방법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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