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레슨 - 느끼고, 사랑하고, 충추라!
화이 지음 / 오푸스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에 탱고 인구가 몇 명이나 될까?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300-5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동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것 같다. 친목을 우선으로 하는 동호회는 뒤풀이 자리가 종종 마련되는 모양이다. 서울 강남의 신사동을 중심으로 동회회의 성격을 지니면서 강습을 병행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는 것 같다. 이런 동호회 활동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선택한 곳은 신사동에 자리한 엘불린이라는 탱고 아카데미이다.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곳은 탱고를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습이 목적이기 때문에 친목을 위주로 하는 곳과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엘불린의 운영자 이면서 이곳에서 부군과 함께 탱고를 지도하고 있다.

 

저자는 발레를 전공했다. 모든 춤에 능한 그녀는 뮤지컬 배우로서 이름도 얻었다. 그런 그녀가 탱고와의 사랑에 빠져 아시아인으로써는 처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 탱고대회에서1위를 하고, 그야말로 운명이 바뀌어 탱고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엿볼 있다. 또 서울 탱고 페스티벌 등 굵직한 행사를 개최하기도하고 레슨을 하면서 경험한 많은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풀어놓았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조목조목 안내해주고 있다. 편안하게 쓴 에세이 같으면서도 전문가의 깊이가 느껴지는 글이다. 한국에서 탱고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이미 탱고를 배워 즐기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탱고 자체를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저자와 저자의 남편인 헝얏의 강습을 받아왔던 나는 그들이 강습 시간에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몸짓들이나, 설명을 위해 예로 드는 적절하고도 유머러스한 비유들이 떠올라 책을 읽는 기쁨이 배가 되었다.

 

탱고 강습을 받기 위해 처음 엘불린에 갔을 때의 뻘쭘함을 잊을 수 없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구령에 맞춰 행진이나 체조는 해봤어도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아본 기억이 없다. 막춤조차도 추어본 적이 없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어깨조차 흔들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어쩌자고 여기와 있단 말인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인 뻔뻔함이 이런 뻘쭘함을 금방 해결해 주었다. 그래, 모든 배움에서 학습지진아에 다름 아닌 내게 탱고라고 빗겨가겠는가, 갈 때까지 가보자, 뻔뻔함이 부추기니 나는 곧 막가파의 큰 형님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만 하루 이상을 비행기로 날아가야 간신히 닿을 수 있는 남미의 문화에 접속하는 일은 지진아이면서 국가 대표급 저질 체력인 내게 참으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탱고의 용어는 모두 스페인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뒤늦게 스페인어 사전을 뒤적이고 스마트폰에 어플을 깔아놓고 짬짬이 단어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스페인어 강좌가 모두 영어로 되어있어 한번 들어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음악 들으랴 스페인어 공부하랴 영어 공부하랴 지진아의 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다.

 

그 뿐이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과 가슴을 밀착시키고 덥석 덥석 안아야하는 아브라소의 공포를 극복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군대에 간 남동생이라 생각하라고, 위로하듯 따듯하게 안으라고 거듭 말씀을 하셨고 나는 파트너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했다. 최면은 주효했다. 지금도 낯선 사람 앞에서 여전히 긴장하고 뻣뻣해지지만 심리적으로는 많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짧은 생각이지만 탱고에서는 아브라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것 같다. 이것을 해결하고 나니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동작이야 배우고 연습하면 되는 것이니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새로운 문제에 당면했는데 그것은 주제넘게도 탱고로 아름답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동작을 정확하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음악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남성과 그 남성의 몸의 언어를 표현하는 여성. 이것들의 삼위일체가 아름다움의 조건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탱고의 아름다움이 여성의 화려한 동작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동작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파트너의 수고스러움이 새삼 고맙게 여겨진다.

 

무엇이든 몰아서 해치우는 성향이 강한 내게 탱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요일 오후 6시간 이상을 9cm 높이의 힐을 신고 놀았다. 탱고는 발뒤꿈치보다 발가락에 체중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 발볼이 현격하게 넓어지더니 평생 부어본 적 없던 발이 붓기 시작했다. 새끼발가락은 까맣게 멍이 들었고 오른발의 발가락들은 쥐가 난 것처럼 감각이 없어졌다. 침 한 번 맞으면 낫겠지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4,5번 경추에 문제가 왔다나 뭐래나....... 도대체 이놈의 몸뚱이는 써먹을 곳이 아무 곳도 없는 거냐고 따져 물었더니 선택은 잘 했는데 공주의 몸을 갖고 태어났으니하고 말끝을 흐린다.

 

: “몸은 공준데 무수리처럼 몸을 굴린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지요? 근데 탱고 추는 무수리 보셨어요?”

의사 : “공주님은 왕자님하고 딱 한번만 추는 거예요. 당분간 굽 높은 구두 신지 마시고 두 시간 이상 춤추지 마세요.”

 

영국의 BBC에서 만든 탱고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탱고 살롱 La Confiteria Ideal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한 남자에게 탱고를 못 추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한다. 나는 아직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탱고에 미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픈 몸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탱고를 좀 더 오래 추기 위해서라도 다리는 좀 보호해 줘야할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몸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탱고에 빠지자 가 뒷전이 되어버렸다. 대체 원고는 언제 들여다보나? 정신은 시에 끄달리면서 몸은 탱고에 빠져있다. 그런데 시와 탱고는 닮았다. 우선 쉽지 않다는 것, 그렇지만 아름답다는 것, 두 가지 모두 영혼을 위로한다는 것이 닮았다. 또 시와 탱고는 다르다. 시가 언어를 매개로 한다면 탱고는 육체를 매개로 한다. 시가 영혼을 더 많이 담고 있다면 탱고는 육체를 더 많이 담고 있다. 탱고는 몸으로 쓰는 시다. 그러니까 나는 시를 뒷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시를 쓰고 있었다는 건가? 탱고의 힘은 위대하다. 모든 것이 합리화 되다니.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3-04-1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 공주님께 부러움과 흠모의 박수를 보냅니다~~~Estoy enamorado de ti!!!!

반딧불이 2013-04-12 20:06   좋아요 0 | URL
읔...시아님께서도 사전을 찾게 만드시네..고맙습니다.
근데 혹시 나비님이신가요?

수이 2013-04-1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고는 언제나 바라보아도 추어도 좋기만 해서, 살아있는 게 그렇게 좋아지더라구요.
즐거운 봄날 되세요 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3-04-12 20:11   좋아요 0 | URL
앤님..땅고를 추시는 군요^.~ 반가워요. 곧 피어날 아름다운 꽃들과 탱고와 함께 아름다운 봄날이시길 바랄께요.

2016-05-14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한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 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홑치마 같은 풋잠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치자향을 흘리며 오는 사람, 그 사람은 눈뜨면 사라질 사람. '결코 눈뜨지 말라'에 이르러 절로 눈이 감기는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오던 음악이 시에 포개어졌다. 반도네온이 애절하게 음을 끌고 가면 피아노가 스타카토로 뒤를 따랐다. 양철지붕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피아노소리는 시 속의 꿈꾸는 어떤 이와 꿈속의 어떤 이를 어루만지듯 했다. 코끝이 찡하더니 눈시울이 수평선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더 이상 시를 읽을 수 없었다. 눈물이 넘치지 않도록 급히 수습해야했으므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과 애틋한 시의 한가운데서 나는 수평저울처럼 떨었던 것도 같다. 음악의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채로 시간이 제법 흘렀다.

 

누군가와 춤을 추다가 이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몸과 마음에 나도 모르게 파동이 일었다. 음악의 제목을 알게 되었고, 아름다운 그는 내게 못 잊을 사람이 되었다. 음악의 제목은 Lagrimas Y Sonrisas. 슬픔과 기쁨 혹은 눈물과 미소라는 뜻인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음악과 시와 사람.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던 우연의 가면을 벗기면 필연의 맨 얼굴과 맞닥뜨릴 수 있을까

.

http://youtu.be/m809ivwfgyI

 

음악을 들으면서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것이 영화였는지 클래식 음악이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오래 헤맸다. 결국 나는 영화도 클래식 음악도 모두 찾아냈다. 영화는 <번지점프를 하다>였고, 클래식 음악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였던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병을 앓고 있다. 불치병이다. 아무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 자가 진단이지만 어느 전문의보다 정확한 진단이다. 내 몸에 관한한 어느 의사가 나보다 더 정확할 수 있을까. 그런데 최근 이 불치병이 치료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땅고를 접하고 난 후 부터다. 땅고 음악에 취한건지 춤에 취한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 땅고에 취해 있다. 대체 땅고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유혹하는 걸까.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반도네온이 펼치는 하모니는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1930-40년대의 음악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음악에 대해 내가 무얼 말하랴마는, 이 당시의 음악들을 듣다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있다. 땅고 음악에는 슬픔, 비애 같은 것들이 진하게 배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고상한 언어를 동원해서 우아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편하게 내 식으로 말하면 땅고 음악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이상한 청승끼가 배어있는 것 같다. 특히 반도네온은 자신의 몸에 가득한 주름들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다른 음을 내는데, 청승끼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음색으로 사람을 취하게 한다.

 

그런데 이 청승끼에 내 몸이 반응한다. 간신히 파트너의 동작을 따라갈 만큼 스텝을 밟게 되었지만 몸짓은 아무리 예쁘게 해봐야 마네킹이나 로봇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자꾸만 몰입하게 된다. 대체 그것이 무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몇 권의 책을 뒤적였다.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중의 하나다.

 

저자 박종호를 접한 건 오래전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통해서였다. 깊이 있고 아름다운 그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글은 내게 큰 믿음을 주었던 것 같다. 그 믿음 때문인지 땅고 대한 그의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골라야할 만큼 땅고에 대한 책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를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 그의 본업이 클래식 음악 해설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정신과 전문의이면서 클래식 음악에도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정신과와도 클래식과도 무관한 듯 보이는 땅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저자는 클래식 음악이 팬 층을 확충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첫 번째 분야로 땅고를 꼽고 있다. 클래식 음악에서 땅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예술의 전당에 연주를 보러 가면 가끔 탱고 연주를 듣게 되는데 나는 그것이 한국 팬을 위한 이벤트성 연주로 생각했었는데....... 어쨌거나 클래식 음악의 흐름이 이러하니 저자가 땅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2008년 당시 땅고에 대한 책이 단 한권도 없었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정보를 수집하면서 일본의 한 소설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다녀와 땅고에 대한 경험을 소설로 써서 일본에 다시 한 번 땅고에 대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 역시 그 소설가가 머물렀던 호텔을 예약하고 일정도 그녀와 똑같이 2주간으로 잡고 그곳에 머물렀다 다녀와 쓴 글이다.

 

책의 내용은 주로 땅고 음악에 관한 것이다. 땅고의 중심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더 나아가 남미의 문화 전반에 관해 사진을 곁들여 개괄했다. 카를로스 가르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에비타, 피아졸라, 마라도나, 체게바라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부담 없이 펼쳐놓았다.

 

땅고 춤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그는 땅고를 출줄 모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땅고 카페를 순례하면서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그 분위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가 땅고 춤에 대해 내린 정의는 아래와 같다.

 

 

그들의 춤은 3, 그들의 사랑은 3. 3분 동안 그들은 울부짖듯이 모든 열정을 다하여 춤을 춘다. 그러므로 탱고의 춤사위는 그들의 몸부림이며, 탱고의 음악은 그들의 절규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면 탱고는 영혼을 위로한다. 그래서 탱고는 슬프다. 섹스가 육체의 위안이라면, 탱고는 영혼의 섹스다.”

 

일반적으로 땅고는 한 곡만을 추지 않는다. 보통 분위기가 비슷한 곡이 서너 곡 연주되고 이것을 한 딴따라고 부른다. 파트너가 정해지면 한 딴따를 함께 추게 되는데 한 곡의 연주시간이 3, 4분 정도라면 10 - 15분 정도 함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리드를 받게 되므로 남성이 어떻게 음악을 해석하고 어떤 동작을 하느냐에 따라 춤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서로의 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고? 잘 모르겠다. 탱고가 영혼을 위로한다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탱고가 슬프다고? 동의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땅고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유혹하는지 그 해답을 이 책에서 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땅고 음악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변천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땅고 음악에 흐르는 청승끼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문화의 전반을 맛볼 수 있는 건 커다란 덤이었다. 내 질문의 답은 책을 통해 구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나에게서 찾아야할 숙제일 것이지만, 아마도 청승끼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은 내면의 깊은 욕망 같은 건 아닐까 자문해본다.

 

 

사족.

유럽에서 처음 연주된 아르헨티나 땅고 음악, El Choclo(엘 쵸클로)는 원래 옥수수나 나막신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남자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이 음악은 우울할때 들으면 위로가 되었는데 자꾸 듣다보니까 이젠 음악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우울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용인문학 2012년 하반기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섬머셋 모옴의 <인생의 베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서도 결혼을 선택한 여자,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노력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무모한 남자의 이야기다. 불행을 잉태한 채 결혼한 아내는 곧 불륜을 출산한다. 아내의 출산을 조용히 받아들인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콜레라가 번지고 있는 중국의 오지 마을로 의료 봉사를 자청하여 떠난다. 부부간의 불화,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 거기에 창궐하는 콜레라까지....... 불행의 한계령에서 그들이 선택한 자발적 고립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그들은 서로에게서 없는 것만을 찾다가 마침내 한 생명을 불행의 제단에 바치고서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의 중국 장가계가 배경이다. 인간의 근접을 사양한다는 듯 수직에 가까운 산봉우리들과 계곡을 흐르는 깊고 푸른 물이 음양의 조화는 이런 것이라는 듯 화면을 가득 채운다. 주인공들의 불화가 깊어질수록 자연은 상대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영화 속의 그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갔다. 팔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땀은커녕 서늘한 기운에 수시로 겉옷을 챙겨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인상 깊었던 풍경은 생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영화 속 풍경이 훨씬 아름다웠던 까닭은 비록 엇갈린 사랑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못 잊을 사람을 가진 시 속의 화자는 폭설에 갇히는 고립을 꿈꾼다. 발이 묶이고 동시에 운명이 묶이는. 한계령에서 만난 뜻밖의 폭설에서 화자는 상상의 한계령을 넘는다. 온통 흰 것뿐인 동화 속 나라가 공포의 나라로 변해도, 조난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나타나도, 포탄을 뿌려 살상을 일삼던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짐승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뿌리며 생명을 구하는 헬리콥터로 상황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끝내 손 흔들지 않고 옷자락도 보이고 싶지 않다.

 

그것은 행복의 한계령에 갇히는 눈부신 고립! 차라리 구조되고 싶지 않은 사랑의 조난. 결과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짧지만, 아니 짧아야 할 아름답고도 행복한 이 조난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일. 그건 나도 마찬가지. ‘못 잊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 역시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겠지. 하지만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나는 마음 쓰지 않겠다. 아니 온 마음을 다해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기꺼이 묶이겠다. 그리하여 인간의 몸을 빌어 잠시 왔다 가는 필멸의 생을 절감하기로 하자. 여력이 닿는다면 태양으로 향하는 창을 하나 내야지. 못 잊을 사람과 나는 세상의 볼록렌즈가 되어 빛을 수렴하겠지. 마음에 창궐하던 고드름도 녹이고 아마도 이 눈부신 고립으로 인해 한계령의 겨울도 녹아내리겠지.......

 

속절없는 꿈인 줄 알면서도 이런 감정은 피임하지 않기로 한다. 그건 어느 누구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는 이 겨울을 견디는 셀프 힐링 프로젝트의 하나니까. 더불어 이것이 지도상의 한계령뿐만 아니라 생의 굽이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한계령을 넘을 때도 유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이 시인이 바라는 일이고 이 시를 쓴 이유이기도 할 테니까

 

《문학과 의식》 2013년 봄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13-04-0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의식,을 가끔 보는데 봄호에 실린 반딧불이님의 글인가봐요. 글이 참 반갑습니다. 인생의베일도 페인티드 베일도 만났었는데 이렇게 님의 좋은 글로 떠올려보게 되네요. 이 봄 어찌 지내시는지요^^

반딧불이 2013-04-05 01: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역시 프레이야님도, 댓글도 반가워요. 여전하시지요? 쉬지 않고 읽으시고 차분하게 쓰시고....하시는 일도 열심히 하시고....언제부터인가 한결같은 분들이 제일 부러워요. 저도 알라딘에 자주 못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지낸답니다. 댓글은 못남기지만 책주문 하러 올때면 즐찾해놓은 서재들은 꼭 둘러보고 간답니다. 봄내음 가득한 시간이시길....

blanca 2013-04-06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인티드 베일의 배경이 장가계였군요. 예전에 읽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반딧불이님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나타나시다니요^^;;

반딧불이 2013-04-08 11:5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주말을 이용해 담양에 다녀오느라 답글이 늦었어요. 죄송~
블랑카님 잘 지내시지요? 따님도 많이 컸겠네요.
저는 예전처럼 책을 가까이하지는 못하지만 잘 지내고 있답니다. 가끔 인사 여쭐께요. 남쪽에 벚꽃이며 매화, 동백이 절정입니다..블랑카님 일상에도 봄빛이 가득하시길 바래요.
 
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크산티페를 위한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법정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변론으로 읽혀진다. 그는 남들이 부와 명성을 얻으려 노력할 때 지혜와 진리를 얻으려 노력했고, 사람들이 몸과 재산보다 최선의 혼의 상태에 관심을 쏟도록 설득하는데 자신의 생을 탕진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현혹(?)한 결과 그는 아내 크산티페를 세계3대 악처 중 한명으로 등극시키고 당대의 소피스트와 권력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소피스트들이 사회적 출세를 빌미로 수사학을 내세워 고액과외를 일삼으며 실용주의 노선을 탈 때 그는 무료봉사를 일삼는 거리의 철학자가 되어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가장 남자다운 남자로 인정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칠십이었으니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진 크산티페에게는 가슴에 보듬고 있을 정도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젊거나 잘생겨서 성적매력이 넘쳐나는 것도 아닌데다 나이 칠십의 추남인데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거기다 자식은 셋씩이나 슬어놓고 툭하면 제자들을 끌고 새벽이슬을 밟고 오는 남편을 세상의 어느 여자가 공경하겠는가. 그러므로 부디 결혼하시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해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나쁜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철학하느라 철이 없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크산티페는 악처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던 듯싶다. 사형집행일 날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한 크산티페의 마지막 말이다.

 

여보! 소크라테스, 당신 친구들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이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에요.” 어린 것들과 나는 어찌 살라고를 외치며 목청을 높일 수 있을 법도 하건만 그녀의 관심은 남아있는 자식과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자신이 아니라 남편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나는 밥을 빌어먹어도 좋으니 당신 좋아하는 을 더 하기 위해서라도 제발 살아달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이혼법정에 섰더라면 아마도 독배를 마시듯 크산티페의 이혼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2500여 년 동안 악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크산티페는 세계3대 악처의 위치에서 강등되어야 함이 마땅하려니와 남편을 인류 사상의 아버지로 만드는데 세운 공로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2. 직접민주주의에서의 웅변술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제점 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 할 듯싶다. 고대 그리스는 촌락단위인 폴리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스파르타와 아테네였고 아테네는 민주정치가 가장 발달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은 민회였다. 부녀자와 아이, 노예 등은 민회에 참석할 수 없었고 군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에게만 개방되었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중요한일에 대해 연설을 하거나 정책사안에 대해 토론하였고 정책이나 관리 선출 등을 투표로 결정하였다. 당연히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설능력은 정치의 핵심이 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의 웅변술이 가지는 중요성이나 달변가들에 의해 변질되거나 궤변으로 빠질 가능성, 기타 직접민주제의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시대의 등에가 되기를 자처하여 웅변술로 잘 포장된 거짓들을 끊임없이 파헤쳤고 시민들을 각성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반면 사과나무 줄기에 마치 나뭇가지처럼 붙어 영양분을 빨아먹은 자벌레 같은 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 소피스트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틈새시장을 노려 고액과외로도 모자라 특강료까지 챙겨가며 큰돈을 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부의 축적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었고 민주정치가 발달한 아테네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시민 양성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 같다.

 

이것 보세요! 당신은 아테나이인이오. 당신의 도시는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오. 하거늘 부와 명예와 명성은 되도록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당신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부끄럽지 않소.”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 대한 일갈이면서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고 행한 일에 대한 변론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에게는 통렬한 자아비판의 지침이 될 말이기도 하다.

 

3. 지혜와 미덕에 대한 순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신탁을 부정하고 반박하려 한다. 그는 명망 높은 정치가, 시인, 장인 등을 찾아다니며 이를 증명하려 하지만 가장 명망 높은 사람이 실은 가장 결함이 많고 시인이나 장인들도 그들의 전문가적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일로 사람들의 미움을 산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 반면 자신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신탁을 부정하려 했던 그는 결국 가장 지혜로운 자는 지혜에 관한한 자신이 진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신탁의 의미였다고 재해석한다.

 

사람들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이와 같은 행동은 결국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이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며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품는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 고소내용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이 두 고소내용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이다. 나는 당시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이 변론을 토대로 살펴보면 당시에는 증거나 증인을 내세우기보다 오직 변론으로써 500명이나 되는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원고의 고소장 접수 - 피고인의 자기변론 - 배심원의 판결 - 피고인의 최종 진술 등의 순서를 거치는 것 같다. 변론의 내용과 주석을 참고하여 보면 원고는 고소장과 함께 형량을 청구할 수 있었고 피고 역시 자신의 죄에 해당하는 형량을 청구 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행동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시청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식사라고 청구한다. 시청사라고 하지만 이곳은 폴리스의 귀빈이나 올림픽의 우승자 등 국빈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던 듯하다. 철학에 생활고의 방망이를 들이대는 크산티페가 아닌 이상 누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맞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세계철학의 아버지도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귀머거리거나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 아닌가. 모종의 정치적 꼼수가 있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정치적 배경이 있음을 알고 정계진출을 포기하고 철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로 한 플라톤의 행보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쾌락, 고통, 두려움 등 이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동전은 지혜뿐이라던 그는 죽음까지도 지혜와 맞바꾸었다. 그의 죽음은 지혜와 미덕을 위한 순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잘 사는 것은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

 

불교에서의 윤회설과도 비슷한 그의 죽음에 관한 사유는 <파이돈>에 잘 나타나 있다. 육체와 혼을 분리하고 죽음은 곧 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서로 대립되는 쌍의 생성과정을 예로 들며 죽음이 곧 생성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는 죽음을 불행의 최종심급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이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몸, 쾌락, 욕망을 지나치게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말로 철학하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로 받아들인다면 달리 반론의 여지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원형인 듯싶기도 하다.

 

그 외에도 가장 일반적이고 쉬워서 누구나 이해 가능한 예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제되는 사안에 까지 접근해가며  관념적인 문제까지 추론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 언제나 긍정의 답이 나올 수 있도록 질문을 던져 끝내는 답하는 자가 스스로 자기논리에 말려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대화법이 흥미 있었다. 당사자는 괴로웠겠지만 그것이 어떤 이익을 추구하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앎에 대한 어떤 불가능의 상태로 이끌어가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결국에는 앎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다르게 유도하는 질문이었으므로 그와 대화한 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을 것 같다. 열광하거나 고소하거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