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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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산티페를 위한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법정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변론으로 읽혀진다. 그는 남들이 부와 명성을 얻으려 노력할 때 지혜와 진리를 얻으려 노력했고, 사람들이 몸과 재산보다 최선의 혼의 상태에 관심을 쏟도록 설득하는데 자신의 생을 탕진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현혹(?)한 결과 그는 아내 크산티페를 세계3대 악처 중 한명으로 등극시키고 당대의 소피스트와 권력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소피스트들이 사회적 출세를 빌미로 수사학을 내세워 고액과외를 일삼으며 실용주의 노선을 탈 때 그는 무료봉사를 일삼는 거리의 철학자가 되어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가장 남자다운 남자로 인정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칠십이었으니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진 크산티페에게는 가슴에 보듬고 있을 정도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젊거나 잘생겨서 성적매력이 넘쳐나는 것도 아닌데다 나이 칠십의 추남인데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거기다 자식은 셋씩이나 슬어놓고 툭하면 제자들을 끌고 새벽이슬을 밟고 오는 남편을 세상의 어느 여자가 공경하겠는가. 그러므로 부디 결혼하시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해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나쁜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철학하느라 철이 없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크산티페는 악처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던 듯싶다. 사형집행일 날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한 크산티페의 마지막 말이다.

 

여보! 소크라테스, 당신 친구들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이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에요.” 어린 것들과 나는 어찌 살라고를 외치며 목청을 높일 수 있을 법도 하건만 그녀의 관심은 남아있는 자식과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자신이 아니라 남편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나는 밥을 빌어먹어도 좋으니 당신 좋아하는 을 더 하기 위해서라도 제발 살아달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이혼법정에 섰더라면 아마도 독배를 마시듯 크산티페의 이혼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2500여 년 동안 악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크산티페는 세계3대 악처의 위치에서 강등되어야 함이 마땅하려니와 남편을 인류 사상의 아버지로 만드는데 세운 공로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2. 직접민주주의에서의 웅변술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제점 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 할 듯싶다. 고대 그리스는 촌락단위인 폴리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스파르타와 아테네였고 아테네는 민주정치가 가장 발달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은 민회였다. 부녀자와 아이, 노예 등은 민회에 참석할 수 없었고 군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에게만 개방되었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중요한일에 대해 연설을 하거나 정책사안에 대해 토론하였고 정책이나 관리 선출 등을 투표로 결정하였다. 당연히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설능력은 정치의 핵심이 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의 웅변술이 가지는 중요성이나 달변가들에 의해 변질되거나 궤변으로 빠질 가능성, 기타 직접민주제의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시대의 등에가 되기를 자처하여 웅변술로 잘 포장된 거짓들을 끊임없이 파헤쳤고 시민들을 각성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반면 사과나무 줄기에 마치 나뭇가지처럼 붙어 영양분을 빨아먹은 자벌레 같은 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 소피스트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틈새시장을 노려 고액과외로도 모자라 특강료까지 챙겨가며 큰돈을 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부의 축적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었고 민주정치가 발달한 아테네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시민 양성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 같다.

 

이것 보세요! 당신은 아테나이인이오. 당신의 도시는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오. 하거늘 부와 명예와 명성은 되도록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당신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부끄럽지 않소.”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 대한 일갈이면서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고 행한 일에 대한 변론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에게는 통렬한 자아비판의 지침이 될 말이기도 하다.

 

3. 지혜와 미덕에 대한 순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신탁을 부정하고 반박하려 한다. 그는 명망 높은 정치가, 시인, 장인 등을 찾아다니며 이를 증명하려 하지만 가장 명망 높은 사람이 실은 가장 결함이 많고 시인이나 장인들도 그들의 전문가적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일로 사람들의 미움을 산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 반면 자신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신탁을 부정하려 했던 그는 결국 가장 지혜로운 자는 지혜에 관한한 자신이 진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신탁의 의미였다고 재해석한다.

 

사람들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이와 같은 행동은 결국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이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며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품는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 고소내용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이 두 고소내용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이다. 나는 당시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이 변론을 토대로 살펴보면 당시에는 증거나 증인을 내세우기보다 오직 변론으로써 500명이나 되는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원고의 고소장 접수 - 피고인의 자기변론 - 배심원의 판결 - 피고인의 최종 진술 등의 순서를 거치는 것 같다. 변론의 내용과 주석을 참고하여 보면 원고는 고소장과 함께 형량을 청구할 수 있었고 피고 역시 자신의 죄에 해당하는 형량을 청구 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행동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시청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식사라고 청구한다. 시청사라고 하지만 이곳은 폴리스의 귀빈이나 올림픽의 우승자 등 국빈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던 듯하다. 철학에 생활고의 방망이를 들이대는 크산티페가 아닌 이상 누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맞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세계철학의 아버지도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귀머거리거나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 아닌가. 모종의 정치적 꼼수가 있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정치적 배경이 있음을 알고 정계진출을 포기하고 철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로 한 플라톤의 행보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쾌락, 고통, 두려움 등 이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동전은 지혜뿐이라던 그는 죽음까지도 지혜와 맞바꾸었다. 그의 죽음은 지혜와 미덕을 위한 순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잘 사는 것은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

 

불교에서의 윤회설과도 비슷한 그의 죽음에 관한 사유는 <파이돈>에 잘 나타나 있다. 육체와 혼을 분리하고 죽음은 곧 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서로 대립되는 쌍의 생성과정을 예로 들며 죽음이 곧 생성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는 죽음을 불행의 최종심급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이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몸, 쾌락, 욕망을 지나치게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말로 철학하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로 받아들인다면 달리 반론의 여지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원형인 듯싶기도 하다.

 

그 외에도 가장 일반적이고 쉬워서 누구나 이해 가능한 예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제되는 사안에 까지 접근해가며  관념적인 문제까지 추론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 언제나 긍정의 답이 나올 수 있도록 질문을 던져 끝내는 답하는 자가 스스로 자기논리에 말려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대화법이 흥미 있었다. 당사자는 괴로웠겠지만 그것이 어떤 이익을 추구하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앎에 대한 어떤 불가능의 상태로 이끌어가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결국에는 앎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다르게 유도하는 질문이었으므로 그와 대화한 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을 것 같다. 열광하거나 고소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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