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용인문학 2012년 하반기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섬머셋 모옴의 <인생의 베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서도 결혼을 선택한 여자,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노력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무모한 남자의 이야기다. 불행을 잉태한 채 결혼한 아내는 곧 불륜을 출산한다. 아내의 출산을 조용히 받아들인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콜레라가 번지고 있는 중국의 오지 마을로 의료 봉사를 자청하여 떠난다. 부부간의 불화,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 거기에 창궐하는 콜레라까지....... 불행의 한계령에서 그들이 선택한 자발적 고립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그들은 서로에게서 없는 것만을 찾다가 마침내 한 생명을 불행의 제단에 바치고서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의 중국 장가계가 배경이다. 인간의 근접을 사양한다는 듯 수직에 가까운 산봉우리들과 계곡을 흐르는 깊고 푸른 물이 음양의 조화는 이런 것이라는 듯 화면을 가득 채운다. 주인공들의 불화가 깊어질수록 자연은 상대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영화 속의 그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갔다. 팔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땀은커녕 서늘한 기운에 수시로 겉옷을 챙겨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인상 깊었던 풍경은 생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영화 속 풍경이 훨씬 아름다웠던 까닭은 비록 엇갈린 사랑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못 잊을 사람을 가진 시 속의 화자는 폭설에 갇히는 고립을 꿈꾼다. 발이 묶이고 동시에 운명이 묶이는. 한계령에서 만난 뜻밖의 폭설에서 화자는 상상의 한계령을 넘는다. 온통 흰 것뿐인 동화 속 나라가 공포의 나라로 변해도, 조난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나타나도, 포탄을 뿌려 살상을 일삼던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짐승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뿌리며 생명을 구하는 헬리콥터로 상황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끝내 손 흔들지 않고 옷자락도 보이고 싶지 않다.

 

그것은 행복의 한계령에 갇히는 눈부신 고립! 차라리 구조되고 싶지 않은 사랑의 조난. 결과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짧지만, 아니 짧아야 할 아름답고도 행복한 이 조난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일. 그건 나도 마찬가지. ‘못 잊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 역시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겠지. 하지만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나는 마음 쓰지 않겠다. 아니 온 마음을 다해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기꺼이 묶이겠다. 그리하여 인간의 몸을 빌어 잠시 왔다 가는 필멸의 생을 절감하기로 하자. 여력이 닿는다면 태양으로 향하는 창을 하나 내야지. 못 잊을 사람과 나는 세상의 볼록렌즈가 되어 빛을 수렴하겠지. 마음에 창궐하던 고드름도 녹이고 아마도 이 눈부신 고립으로 인해 한계령의 겨울도 녹아내리겠지.......

 

속절없는 꿈인 줄 알면서도 이런 감정은 피임하지 않기로 한다. 그건 어느 누구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는 이 겨울을 견디는 셀프 힐링 프로젝트의 하나니까. 더불어 이것이 지도상의 한계령뿐만 아니라 생의 굽이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한계령을 넘을 때도 유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이 시인이 바라는 일이고 이 시를 쓴 이유이기도 할 테니까

 

《문학과 의식》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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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4-0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의식,을 가끔 보는데 봄호에 실린 반딧불이님의 글인가봐요. 글이 참 반갑습니다. 인생의베일도 페인티드 베일도 만났었는데 이렇게 님의 좋은 글로 떠올려보게 되네요. 이 봄 어찌 지내시는지요^^

반딧불이 2013-04-05 01: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역시 프레이야님도, 댓글도 반가워요. 여전하시지요? 쉬지 않고 읽으시고 차분하게 쓰시고....하시는 일도 열심히 하시고....언제부터인가 한결같은 분들이 제일 부러워요. 저도 알라딘에 자주 못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지낸답니다. 댓글은 못남기지만 책주문 하러 올때면 즐찾해놓은 서재들은 꼭 둘러보고 간답니다. 봄내음 가득한 시간이시길....

blanca 2013-04-06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인티드 베일의 배경이 장가계였군요. 예전에 읽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반딧불이님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나타나시다니요^^;;

반딧불이 2013-04-08 11:5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주말을 이용해 담양에 다녀오느라 답글이 늦었어요. 죄송~
블랑카님 잘 지내시지요? 따님도 많이 컸겠네요.
저는 예전처럼 책을 가까이하지는 못하지만 잘 지내고 있답니다. 가끔 인사 여쭐께요. 남쪽에 벚꽃이며 매화, 동백이 절정입니다..블랑카님 일상에도 봄빛이 가득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