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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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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관련 서적들을 뒤적이면서 미슐레라는 이름을 자주 접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헤겔, 부르크하르트, 니체, 벤야민 등과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던 참이었는데 『바다』 때문에 미슐레의 글을 생각보다 빨리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것도 인연이라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만 그의 이름을 몇 번 입에 올렸을 뿐인데 그는 이미 내게 와 있었으니 말이다.

1860년에 쓴 그의 글이 150년을 흘쩍 뛰어넘어 나와 조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사』를 비롯해 방대한 역사서들을 남기고 중세사를 다졌다고 하는데 프랑스혁명사도 아니고 중세사도 아닌 바다史를 먼저 접하게 될 줄이야.

어쨌거나 이 책은 미슐레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서른 살이나 아래인 아내와 여기저기를 전전하던 시기에 쓴 책이라고 한다.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가 『바다』에서 보여주는 것들은 참으로 많다.

미슐레는 바다를 다각도로 살피고 있었다. 나는 지름 15cm정도 되는 스텔라노바 지구본과 아메리카 대륙이 오른쪽에 있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이 책을 읽었다. 그가 지구 밖으로 나가서 지구를 바라보면 나는 지구본에 전원을 넣어 그윽하게 빛나는 지구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선 화산들을 더듬었다. 그가 바다 속으로 깊이 침잠하거나 바닷가를 거닐면 나는 세계지도를 더듬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과거 속으로 들어가 인간이 어떻게 바다를 정복해 가는지를 살피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바다의 항로를 알려준 것은 따뜻한 바다를 끔찍이 싫어하는 고래였다. 대서양에서 상처를 입은 고래가 태평양에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북쪽에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발견은 바다의 지리와 지구의 형상에 찬란한 서광을 비추었다.

이어 이탈리아의 유식한 서적상이었던 콜럼버스, 희망봉을 지나 황금사과가 열린다는 신화의 나라 인도로 가고자 했던 바스코 다 가마, 난파와 침몰, 암살위험 등으로 끔직한 삶을 살며 수백 개의 섬 사이를 배회하다가 태평양을 발견한 마젤란 등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물론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했던 이유는 황금 때문이었다. 황금을 찾는 인간들은 인간을 죽여 가면서까지 황금만을 원했다. 콜럼버스는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금은 어디 있지? 누가 갖고 있을까?”라며 끔찍한 솔직함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모두 금의 노예로 만들어버렸고, 12년 뒤 그의 일기에는 그곳 인구의 7분의 6이 감소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고 한다.

미슐레의 바다 이야기는 생생하면서도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다. 그는 바다 생물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인간의 횡포를 고발하는가 하면 진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황홀해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는 어느새 자연보호자가 되어 ‘과거의 낡고 특수한 연안어업 규정은 더는 현대 항해에 쓸모가 없’으며 ‘다자간의 공동규약이 필요’하다고, ‘인간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바다를 모든 생명의 기원으로 보는 그는 ‘우리는 죽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이빨과 위장이 죽음을 필요로 하는 운명’이긴 하지만 바다 자원의 파괴는 모든 것의 조화와 질서에 비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바닷물을 분해하여 얻어낸 중수소로 플라즈마를 만들어 인공태양을 만드는 시대, 예정된 임무시간을 완료한 인공위성이 우주의 쓰레기로 떠도는 시대를 살면서 150년 전 역사학자가 발부한 옐로카드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본다.


사족: 책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마치 바다에 관한 사전을 통째로 한 권 읽은 느낌이다. 정보도 많았고 문장도 아름다웠다. 하나의 글이 시작될 때마다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파란 바탕의 그림은 그 글의 내용에 대해 미리 짐작해보게 해주었다. 오자도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317쪽 아래서 두 번째 줄 ‘천박’은 의미상 ‘척박’이 되어야 할 듯싶다. 366쪽 위에서 세 번 째 줄 ‘바다에’는 ‘바다의’가 맞지 않을까.



밑줄 긋기

세상의 큰 운명인 굶주림은 육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바다에서 굶주림은 예방되므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식량을 찾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삶은 마치 꿈처럼 떠다닌다. 그런 힘을 무엇에 쓸까? 힘의 소진을 불가능하다. 그 힘은 사랑을 위해 비축한다. -103


사랑은 자기 존재를 넘어, 또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존재하려는 노력이다. -111


진주는 하렘의 여인이 속옷으로 걸치는 비단 속치마 같다. 다 해져 떨어질 때까지, 힘을 잃고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면, 결코 이 애첩을 떠나지 않는다.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의 자극이자 부적이다. -178


아이를 학교에 가두어놓지 말고 어려서부터 일과 운동과 항해를 시켜야지, 앉은뱅이처럼 책상 앞에 앉혀 공부나 하게 해서는 안 된다. -310


여자들은 얼마나 남자를 모르는지! 여자들이 모르는 것은 사랑의 가장 큰 특징, 가장 생생한 자극은 미모가 아니라 격정이라는 사실이다.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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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2-26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여기저기서 리뷰를 보게 되는데, 이 리뷰는 새로운 관점인걸요.
전 불어는 까막눈인데, 어디선가 주워들은 '라 메르'는 너무 예쁜 것 같아서, 자꾸 발음해 보게 되거든요~

1860년에 쓰여진 글이라니, 진짜 바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겠는걸요~^^

반딧불이 2010-12-26 10:08   좋아요 0 | URL
비행기도 없었던 당시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게 놀라웠어요.

비로그인 2010-12-26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의 리뷰 덕분에 미슐레의 책도 욕심이 나지만 갑자기 지구본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반딧불이 2010-12-26 10:16   좋아요 0 | URL
후와님.제가 갖고 있는 건 요거에요.

http://gift.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7060910155

저는 큰것도 싫고 바다가 시퍼렇게 나오는건 천박해보이더라구요.

제 맘에는 들지만 글씨가 작은 게 흠이라면 흠이에요. 전원을 넣으면 별자리가 뜨는 것도 있어요. 저는 가끔 어스름이 생각나는 저녁이면 대신 이녀석을 돌리기도 해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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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행한 강연을 속기한 것이다. 당시에 사르트르가 발표한 소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사르트르를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라고 비난했고, 사르트르가 가까이 하고자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역사적 요구에 일치하는 인간, 현실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인간에 대해 정의하기를 원했으나 사르트르의 소설 속 인물들과 그의 실존주의는 당시 사람들의 관심에 역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르트르에 대해 안티휴머니스트가 되어버렸다. 사르트르가 이 강연을 행한 것은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기 철학의 정합적이고 보다 올바른 개요를 대중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정의, 실존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에 대한 반박 그리고 실존주의야 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는 부분이다.

사르트르는 우선 실존주의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기독교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그것이다. 양자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평가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선험적인 본질이 있고 그에 따라 신은 창조자로서 자신의 기술과 개념으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전대(前代)의 철학자들이다. 18세기의 무신론 속에서 신의 개념은 제거되었지만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개념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전대의 철학이나 무신론과는 다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만약 신이 없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는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으로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부르며 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인간은 먼저 실존한다는 사실을 즉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요, 미래 속에 스스로를 기투하는 일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대신한다.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투로서의 인간에게는 선택과 책임 그리고 자유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은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신이 없다면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결코 응고된 채 주어진 그 어떤 인간 본성에 의존하여 설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초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이란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의 자유란 나의 자유를 원하는 동시에 타인들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타인들의 자유를 목적으로 취할 경우에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신을 부정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은 매순간 선택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가치창조의 장본인이며 인간 공동체의 창조 역시 가능하다.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실존주의는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사르트르는 이 비난에 대해 그가 말하는 실존주의는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독트린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모든 진리와 행위가 그 어떤 환경과 인간적인 주체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휴머니즘을 고전적 휴머니즘과 실존적 휴머니즘으로 나눈다. 고전적 휴머니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며 사람들이 행한 고귀한 행위에 비추어서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만들어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이런 종류의 모든 판단을 배제시켜버린다. 실존적 휴머니즘은 인간 그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가 없다는 사실, 인간은 자기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결정한다는 사실, 인간은 자신 밖에 있으면서 자유이자 특수한 실현인 어떤 목표를 찾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이 실존은 결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며 인간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관점에 맞춰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꾸만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벤야민은 역사속의 불연속성에 주목하면서 ‘성좌구조’로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인간은 천둥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글이 더해지자 자기연민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면서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는, 햇빛 한 오라기 들지 않는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떠오르면서 가엽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어느새 그렁그렁 눈에 수평선이 차오른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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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12-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하여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경계에서 엄청난 고민과 사색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던 것 같아요. 결국 약간 무신경한 교조적 결론으로 끝을 맺지만요. 반딧불이님이 인용하신 무신론이 가지는 도덕적 한계를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나요. 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끌립니다. 신을 믿어도 인간은 어차피 내던져진 존재인 것 같아요. 선택하고 만들어 가고. 근데 요새는 이 과정도 하나의 숙명으로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반딧불이님이 느끼는 연민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아요. 저도 자꾸 요새 그런 감정에 젖어요. 나도 불쌍하고 다들 불쌍해요--;;
저는 아직도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반딧불이님의 페이퍼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믿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12-23 00:58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의 초기사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곡해된 경향도 있고 한계도 있다고 해요. 요약하느라 가능하면 사르트르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고 말이 많았지만 어렵지는 않았어요.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하면서 낙관주의라는 말도 덧붙여두었어요. 이사도 있고...분주하실텐데..나중에 시간되시면 봐도 좋으실듯해요.

비로그인 2010-12-23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참 정갈하게 정리된 느낌입니다. 좋은 강의를 들은 것 같달까요. '실존'해야만 하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 공감하지 않을 수 없군요. 또 배우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12-23 10:58   좋아요 0 | URL
배우시다니요. 후와님은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신걸요.

cyrus 2010-12-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책에서 사르트르의 책이 소개된 글이 있었는데, 사르트르의 사상은
저에게는 좀 어려운거 같습니다. 뭐부터 읽어야할지 모르겠지만, 먼저 이 책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12-23 23:35   좋아요 0 | URL
학부때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었는데 아무 기억이 없구요. 얼마전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은 재미있게 봤어요. 짧지만 사르트르의 일생이 집약적으로 쉽게 설명된 책이에요.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가끔 들여다봐요.

2010-12-2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조금만 잘 생겼었더라면, 아니 구멍 난 양말에 슬리퍼를 신지만 않았어도 국사든 세계사든 내가 역사에 이렇게 무관심한 채로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국사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은 나는 분필가루가 앉은 선생님의 낡은 슬리퍼와 구멍 난 양말 그리고 도저히 선생님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하얗고 깨끗한 발가락을 신기하게 바라보아야했다. 가끔은 내 앞에서 한참씩 머물렀기 때문에 말씀 중에 침이 튀기도 했고 담배 댓진 내 때문에 호흡을 참고 견뎌야 하는 날도 많았다. 내가 무언가를 외우지 못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것도 한 몫을 했겠지만 역사라는 단어자체를 싫어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선생님 때문이다.


최근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과목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없게 가르칠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새삼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다. 긴즈부르크가 말하는 '무지가 주는 행복감'이란 것이 이런 걸까? 어쨌거나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접하면서 조국의 역사나 내 짧은 삶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면서 자랐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고 광주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격변기를 살았지만 이것은 내게 역사라기보다 삶 그 자체였다. 

 
인류의 역사, 조국의 역사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의 역사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 걸까? 나는 헤겔이 말하는 '세계사적 개인'도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인물은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꼭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인물들은 많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이런 인물들은 많다. 그러나 내 삶에 있어서의 위대한 인물은 나 이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오롯하게 내 삶이 돋을새김 되는 이 아이러니라니! 어쩌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거리를 확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각주나 부록조차도 되지 못하는, 그러니까 아무도 써주지 않을 나의 역사를 내가 쓰는 것. 이 쓸쓸한 작업에 발을 담근 셈이다.



         

 

 

헤겔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이성으로 내세웠듯이 찌질한 내 삶을 관통하는 어떤 정신이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한 걸까? 부르크하르트가 국가와 종교, 문화의 상호작용이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내 삶은 어떤 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그것들의 어떤 작용으로 지금 여기의 내가 있는 것일까? 또 이것은 어떻게 순환 반복되는 걸까? 사회의 전형이 다른 전형으로 바뀌는 발전과정에 주목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내 삶의 전형이나 양식이 바뀌었을까? 바뀌었다면 그것은 언제이고 어떻게 바뀌었을까? 카를로 긴즈부르크가 주목했던 중세의 한 방앗간집 주인 메노키오처럼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생명을 걸고 항변해야할 신앙 같은 무엇을 나도 가졌을까?


이런 끝도 없는 질문에 어떤 대답이 놓일지 알 수 없지만 질문은 이미 그 안에 대답을 내재하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부르크하르트는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많은 분야에 아마추어가 되는 일은 자신의 인식을 넓히고 관점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부르크하르트의 딜레탕티슴에 힘입어 그리고 모든 책을 詩論으로 읽어야겠다는 다짐대로라면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창작을 통해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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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대해서 독서를 통해서 공부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덕분에
반딧불이님이 소개하신 좋은 책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엥겔스 평전>을
이번 신간도서 페이퍼에 후보로 소개하고 싶은데, (이 책이 선정될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공산당 선언>을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12-08 16:23   좋아요 0 | URL
엥겔스 평전이 겹치는 책중의 하나군요. 기대해봐야겠는걸요.

비로그인 2010-12-1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됩니다. 반딧불이님이 얻을 답.
아니 바꿔 말해야겠네요. 반딧불이님의 예리한 질문이 가 닿게 될 그곳, 이라고 말이죠^^

반딧불이 2010-12-10 01:52   좋아요 0 | URL
질문을 할때는 몰랐는데 해답을 구하려고보니 예리한 칼에 베인듯 마음이 쓰립니다. 덕지덕지 딱지가 앉거나 벚꽃같은 새살이 돋거나....겠죠?

2010-12-14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2-14 00:48   좋아요 0 | URL
제게는 다른것과 같은 크기로 보이는데요..어떻게 해결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네요.

blanca 2010-12-2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반딧불이님 진짜 멋있어요. 정말.

반딧불이 2010-12-21 14:17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눈이 높으시군요~ ㅋㅋ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릴때부터 보고 듣고 읽은 옛이야기들은 그 재미에 힘입어 우리를 권선징악으로 인도해왔다. 착한 것을 권하고 악한 것을 징벌한다는 이런 이야기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재해석으로 보여진다. 심청의 희생에서 효 이데올로기를, 춘향전에서 도덕의 폭력 등을 이끌어낸다. 

책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내 의식이 개조될지는 의문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길이 가장 먼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또 다른 생각을 엿보는 것조차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최근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이성(정신)의 역사로 본 헤겔과는 달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여기에서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으로 구분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이 탄생한다.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르조아 계급에 속한 이들이 관계성을 강조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을 주장한 것은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이들의 이러한 이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 평전으로 가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평전이나 자서전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내 독서편력을 고치는  계기가 된 것은 발자크 평전과 융 자서전 때문이었다.  

작가를 알고 작품을 읽는 것이 작품의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평전과 자서선의 리스트는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두었지만 아직 시작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앙드레 지드의 이 책이 선정된다면 평전읽기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읽어야할 요네하라 마리의 책이 자꾸만 쌓여가고 있다. 이 책은 <전을 범하다>와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같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 보이는 것 이면에 이미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생각해보게 만들어 줄 듯싶다. 

 

 

 

 

   

  

자유를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조지 레이코프의 책이다.  

 “자유에는 동의하는 완전히 합의된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애매하다. 다른 중요한 부분들은 모두 채워야 할 여백으로 남아 있다. 자유에 대한 해석은, 이 여백을 진보주의자가 채우는가 아니면 보수주의자가 채우는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르게 도출된다. 바로 여기서 전쟁이 시작된다." 

"여백이 진보적인 방식으로 채워지는가 아니면 보수적인 방식으로 채워지는가에 따라 ‘자유’라는 동일한 낱말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백 때문에, 자유라는 개념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치열한 개념 쟁탈전이 벌어진다." 는 소개글을 본문을 읽으면서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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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페이퍼 도서들 중에 저도 제 페이퍼에 꼭 소개하고 싶은 책이 무려
세 권이나 있네요.^^

반딧불이 2010-12-08 16:22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인지 궁금해지는 걸요.~
 
완역 이옥전집 2 :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 완역 이옥 전집 2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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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전집 2,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에는 문여, 전, 이언, 희곡과 함께 부록으로 이옥의 친구 김려의 제후 11편이 실려 있다. 카프카의 글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 친구 브로트 때문이었다면 김려는 이옥의 브로트다. 김려는 이옥이 짧았던 성균관 시절 만났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김려는 당시의 문학동인집이라 할 수 있는 <담정총서>에 이옥의 글 11편을 모아 두었다. 이옥의 글은 그가 죽은 지 2백여 년 동안 한 번도 인쇄된 적이 없었는데 <담정총서>의 글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들을 모아 이 전집이 묶인 것이다.

이옥은 북학파이자 사검서의 한사람이었던 유득공과는 이종사촌이고 충군의 명을 받고 경상도 삼가로 내려가는 길에 당시 안의현감이었던 박지원과도 만난 적이 있는 듯하다. 박지원이 중국에서 보고 온 벽돌을 재현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안의 관아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이옥은 신축한 하풍죽로당을 구경하고 <집에 대한 변>을 지었다. 그러나 박지원과 이옥이 신문체를 유행시킨 인물로 정조에게 지목당한 것은 같지만 빼어난 가문 출신이고 본령을 고문에 두었던 박지원과는 달리 한미한 가문 출신의 이옥은 고문을 배우면 허위에 빠진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으니 각자의 환경이나 추구한 미의식은 판이하게 달랐던 셈이다.

김려가 <담정총서>에 ‘봉성필’이라는 이름으로 이옥의 글을 모으면서 그것의 형식을 ‘문여(文餘)’라 불렀다. ‘문의 정체(正體)는 아니지만 기실 문의 나머지(文餘)이다’라는 것이 김려의 변이다. 이옥은 기이한 이야기를 즐겼던 듯 싶다. <봉성문여> 67편과 잡제(雜題)에 실린 17편은 도둑, 아홉 명의 지아비 무덤을 쓴 과부, 간통의 누명을 쓴 여자의 진술서 등 기이하면서도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는 글들이 많다.

전(傳)의 형식으로는 25편이 실렸는데 충, 효, 열을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과거를 대신 봐주는 사람, 의협심이 강한 창기, 호랑이를 잡은 아낙, 고양이를 탄핵하는 글 등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도 있고 보고들은 기인에 관한 글도 있다.

내가 재미를 느꼈던 글은 이언(俚諺)이다. 이언은 민간에서 쓰는 속된 말 또는 속담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속된 말도 속담도 아니다. 이것은 이옥이 한대의 악부나 송대의 사곡에 빗대어 자신을 글을 낮춰 부른 것 같은데 민중언어를 구사해서 글을 지어야한다는 강경한 이옥의 문학론이다. 글짓기의 어려움에 대해 세 가지를 일난, 이난, 삼난이라 이름 하여 밝히고 그 이론에 따라 직접 글을 지어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뒷받침하는 글은 아조(雅調), 염조(艶調), 탕조(宕調), 비조(悱調) 등의 제목을 붙였는데 사람의 정리(情理)의 상태를 사설시조 같은 형식으로 드러내었다.

전집2권에는 희곡도 한편 실려 있는데 나이 삼십이 가까워오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 노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관청에서는 이렇게 나이가 먹어서도 혼자 있는 처녀 총각을 모아 짝을 지어준 모양인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혼례 풍습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랑신부가 입은 옷과 음식 주변의 분위기 등이 마치 전통혼례식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특히 빨래방망이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며 주워섬기는 사설들이 입담 좋은 판소리 한마당을 듣는 기분이다.

부록으로 실려 있는 김려의 제후들은 책의 앞 혹은 뒤에 붙여 쓴 글들을 모았다. 이 많은 글들이 지칭하는 이옥의 글이 다 전해지는 것은 아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글쓰기에 전념했기 때문에 이같이 많은 글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한 이옥의 글을 읽으면서는 지금의 우리는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세분화 되어 있어 오히려 글쓰기의 장벽이 되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소설가는 소설만을, 시인은 시만을 써야지 그 장르를 넘나들면 오히려 홀대받은 지금의 문화와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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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3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권을 읽으면서 희곡이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언 역시
재미있었고요. 반딧불이님 덕분에 이옥이란 사람의 글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글들에서
인상 깊은 구절들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반딧불이 2010-12-04 15:51   좋아요 0 | URL
꾸준히 읽고 계시는군요. 이 책의 리뷰도 좀 올려주시잖구요? 저는 이제 3권을 절반쯤 남겨두었어요.

cyrus 2010-12-0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이 먼저 읽고 리뷰를 쓰고 계신 것도 있고, 저는 반딧불이님이 소개하신
좋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습니다. 읽다가 좋은 구절을 따로
노트에 적곤 했었는데, 페이퍼 형식으로 올릴까 생각중입니다.

반딧불이 2010-12-05 23:40   좋아요 0 | URL
네에..아직 이옥의 글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싸이러스님께서 리뷰를 올려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보시게 되지 않을까요.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