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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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행한 강연을 속기한 것이다. 당시에 사르트르가 발표한 소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사르트르를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라고 비난했고, 사르트르가 가까이 하고자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역사적 요구에 일치하는 인간, 현실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인간에 대해 정의하기를 원했으나 사르트르의 소설 속 인물들과 그의 실존주의는 당시 사람들의 관심에 역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르트르에 대해 안티휴머니스트가 되어버렸다. 사르트르가 이 강연을 행한 것은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기 철학의 정합적이고 보다 올바른 개요를 대중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정의, 실존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에 대한 반박 그리고 실존주의야 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는 부분이다.

사르트르는 우선 실존주의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기독교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그것이다. 양자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평가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선험적인 본질이 있고 그에 따라 신은 창조자로서 자신의 기술과 개념으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전대(前代)의 철학자들이다. 18세기의 무신론 속에서 신의 개념은 제거되었지만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개념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전대의 철학이나 무신론과는 다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만약 신이 없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는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으로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부르며 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인간은 먼저 실존한다는 사실을 즉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요, 미래 속에 스스로를 기투하는 일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대신한다.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투로서의 인간에게는 선택과 책임 그리고 자유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은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신이 없다면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결코 응고된 채 주어진 그 어떤 인간 본성에 의존하여 설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초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이란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의 자유란 나의 자유를 원하는 동시에 타인들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타인들의 자유를 목적으로 취할 경우에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신을 부정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은 매순간 선택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가치창조의 장본인이며 인간 공동체의 창조 역시 가능하다.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실존주의는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사르트르는 이 비난에 대해 그가 말하는 실존주의는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독트린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모든 진리와 행위가 그 어떤 환경과 인간적인 주체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휴머니즘을 고전적 휴머니즘과 실존적 휴머니즘으로 나눈다. 고전적 휴머니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며 사람들이 행한 고귀한 행위에 비추어서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만들어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이런 종류의 모든 판단을 배제시켜버린다. 실존적 휴머니즘은 인간 그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가 없다는 사실, 인간은 자기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결정한다는 사실, 인간은 자신 밖에 있으면서 자유이자 특수한 실현인 어떤 목표를 찾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이 실존은 결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며 인간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관점에 맞춰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꾸만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벤야민은 역사속의 불연속성에 주목하면서 ‘성좌구조’로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인간은 천둥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글이 더해지자 자기연민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면서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는, 햇빛 한 오라기 들지 않는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떠오르면서 가엽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어느새 그렁그렁 눈에 수평선이 차오른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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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12-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하여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경계에서 엄청난 고민과 사색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던 것 같아요. 결국 약간 무신경한 교조적 결론으로 끝을 맺지만요. 반딧불이님이 인용하신 무신론이 가지는 도덕적 한계를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나요. 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끌립니다. 신을 믿어도 인간은 어차피 내던져진 존재인 것 같아요. 선택하고 만들어 가고. 근데 요새는 이 과정도 하나의 숙명으로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반딧불이님이 느끼는 연민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아요. 저도 자꾸 요새 그런 감정에 젖어요. 나도 불쌍하고 다들 불쌍해요--;;
저는 아직도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반딧불이님의 페이퍼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믿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12-23 00:58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의 초기사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곡해된 경향도 있고 한계도 있다고 해요. 요약하느라 가능하면 사르트르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고 말이 많았지만 어렵지는 않았어요.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하면서 낙관주의라는 말도 덧붙여두었어요. 이사도 있고...분주하실텐데..나중에 시간되시면 봐도 좋으실듯해요.

비로그인 2010-12-23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참 정갈하게 정리된 느낌입니다. 좋은 강의를 들은 것 같달까요. '실존'해야만 하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 공감하지 않을 수 없군요. 또 배우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12-23 10:58   좋아요 0 | URL
배우시다니요. 후와님은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신걸요.

cyrus 2010-12-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책에서 사르트르의 책이 소개된 글이 있었는데, 사르트르의 사상은
저에게는 좀 어려운거 같습니다. 뭐부터 읽어야할지 모르겠지만, 먼저 이 책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12-23 23:35   좋아요 0 | URL
학부때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었는데 아무 기억이 없구요. 얼마전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은 재미있게 봤어요. 짧지만 사르트르의 일생이 집약적으로 쉽게 설명된 책이에요.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가끔 들여다봐요.

2010-12-2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