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조금만 잘 생겼었더라면, 아니 구멍 난 양말에 슬리퍼를 신지만 않았어도 국사든 세계사든 내가 역사에 이렇게 무관심한 채로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국사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은 나는 분필가루가 앉은 선생님의 낡은 슬리퍼와 구멍 난 양말 그리고 도저히 선생님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하얗고 깨끗한 발가락을 신기하게 바라보아야했다. 가끔은 내 앞에서 한참씩 머물렀기 때문에 말씀 중에 침이 튀기도 했고 담배 댓진 내 때문에 호흡을 참고 견뎌야 하는 날도 많았다. 내가 무언가를 외우지 못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것도 한 몫을 했겠지만 역사라는 단어자체를 싫어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선생님 때문이다.
최근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과목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없게 가르칠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새삼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다. 긴즈부르크가 말하는 '무지가 주는 행복감'이란 것이 이런 걸까? 어쨌거나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접하면서 조국의 역사나 내 짧은 삶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면서 자랐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고 광주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격변기를 살았지만 이것은 내게 역사라기보다 삶 그 자체였다.
인류의 역사, 조국의 역사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의 역사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 걸까? 나는 헤겔이 말하는 '세계사적 개인'도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인물은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꼭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인물들은 많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이런 인물들은 많다. 그러나 내 삶에 있어서의 위대한 인물은 나 이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오롯하게 내 삶이 돋을새김 되는 이 아이러니라니! 어쩌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거리를 확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각주나 부록조차도 되지 못하는, 그러니까 아무도 써주지 않을 나의 역사를 내가 쓰는 것. 이 쓸쓸한 작업에 발을 담근 셈이다.
헤겔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이성으로 내세웠듯이 찌질한 내 삶을 관통하는 어떤 정신이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한 걸까? 부르크하르트가 국가와 종교, 문화의 상호작용이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내 삶은 어떤 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그것들의 어떤 작용으로 지금 여기의 내가 있는 것일까? 또 이것은 어떻게 순환 반복되는 걸까? 사회의 전형이 다른 전형으로 바뀌는 발전과정에 주목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내 삶의 전형이나 양식이 바뀌었을까? 바뀌었다면 그것은 언제이고 어떻게 바뀌었을까? 카를로 긴즈부르크가 주목했던 중세의 한 방앗간집 주인 메노키오처럼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생명을 걸고 항변해야할 신앙 같은 무엇을 나도 가졌을까?
이런 끝도 없는 질문에 어떤 대답이 놓일지 알 수 없지만 질문은 이미 그 안에 대답을 내재하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부르크하르트는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많은 분야에 아마추어가 되는 일은 자신의 인식을 넓히고 관점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부르크하르트의 딜레탕티슴에 힘입어 그리고 모든 책을 詩論으로 읽어야겠다는 다짐대로라면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창작을 통해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