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역사

                   이현승

악을 쓰고 역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얼굴로

꽃은 핀다. 실핏줄이 낱낱이 터진 얼굴로 아내는

산모휴게실에 혼자 차갑게 식어 누워 있었다

죽자고 벌인 사투의 끝은 죽음 같았다.

있는 힘을 다 뽑아낸 몸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뼈마디까지 낱낱이 헤쳐진 몸으로 까맣게 가라앉았다.

백일홍 백일동안 핀다고 누가 그랬나.

백일홍은 백일동안 지는 꽃이다.

꽃은 떨어져 내려 시나브로 색이 시들고

그 곁에서 매미가 악을 쓰고 우는

백일은 얼마나 긴가.

어혈이 빠지기도 전에 다시 어혈을 입는

백일은 얼마나 더딘가.

먼 바다는 아이들이 가라앉아 아직 시퍼렇고

사람죽은 소리에 질린 하늘 아래

백일동안 멍든 얼굴로 누운 그늘을 보면서

생각한다. 용서가 먼저인지 망각이 먼저인지.

견디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견딤에 대해.

사람들이 곡기를 끊고 시나브로 제 생을 말리는

이곳은 어디인가.

죽은 사람이 떠나지 못하는 세상은 구천 같다.

세월은 더 흘릴 눈물도 없는 사람들을 울려서 눈물을 짜낸다.

사람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얼굴로 간신히.

 

 

 

 

 

 

 

 

 

 

 

현대시학 2014.10 -

현대시학사 편집부 엮음/현대시학사(월간지)

 

 편집주간이 쓴 권두시론의 제목이 '혁신호를 펴내며'다.  어떤 혁신일까. 편집진과 표지가 모두 바뀌었다. 장기적인 기획도 보인다. 이번 혁신호에서는 <우리 시의 미래를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기획특집을 꾸렸다. 평론가 및 시인들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실었다. 그 질문 중의 하나가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시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다.  당연히 답은 모두 다르다. 예술에 문학에 시에 어떤 정답이 있으랴. 수학문제를 풀어 정답을 얻듯이  시의 답이 하나라면 어떻게 될까? 수학문제의 답이 하나이듯이  유일무이한 오직 한 작품만이 시로 남게되나?  어쨌든 저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이현승 시인의 시를 꼽았다.  물론 현시시학 10월호에 실린 시 중에서 골랐다.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가 하나로 여며지며 문장마다 콕콕 찍힌 마침표가 아프다. 시인의 환하고 선한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시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10명중 두명이 이영광 시인을 꼽았다. 그의 첫시집을 만났을때 서점에서 선채로 통독하고는 다른 책은 보지도 않고 사서 돌아와 며칠을 끼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두권의 시집을 더 내는동안 그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내 눈썰미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내 몸도 모르는 영역에 가서 낯선 말을 영접하는 모험'을 매편마다 감행하는 시인이 존경스럽다.

파장 짧은 햇살은 시들어 가고, 차가운 바람은 목덜미를 파고들고, 초록이 지쳐가는 10월, 오후의 들길을 걷다가 울컥했다. 슬프다는 느낌도 들기전에 눈물부터 먼저 차오르는 이 난관은 아마도 이 모든 사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에서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사적으로는 오감이 반응하면서 사회적 일에서 똑같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부끄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한 시인이 있었다. 그 섬은 어떤 섬이었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쉬이 드나들지 못하는 섬이었을 것이다. 그 섬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래도 였을 것이다. 이렇게써도 저렇게 써도 말장난 같은데 말장난으로 끝낼 수 없는 마음 아픈 섬.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도에 나도 가끔 슬픔의 닻을 달고 간다. 그래도에서 만나는 당신은 그래도 다행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인 맹인 안마사

심재휘

상해의 변두리 시장 뒷골목에

그의 가게가 있다

하나뿐인 안마용 침상에는 가을비가

아픈소리로 누워 있다​

주렴 안쪽의 어둑한 나무 의자에 곧게 앉아

한 가닥 한 가닥

비의 상처들을 헤아리고 있는 맹인 안마사

곧 가을비도 그치는 저녁이 된다

간혹 처음 만나는 뒷골목에도

지독하도록 낯익은 풍경이 있으니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아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들아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그의 가게가 있다

지난 7월 마지막주를 방콕에서 보냈다. 관광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태국엔 음식점 만큼이나 마사지 샵이 널려 있다. 그러나 시에서 보이는 풍경을 방콕에서는 보지 못했다. 대부분 기업화 되어 있어 메머드급 건물 전체가 마사지샵인 곳도 있었다. 난생 처음, 남자의 손을 빌려 전신 오일 마사지를 받았다.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함께간 일행이 저녁마다 마사지를 예약해 놓는 바람에 살이 아프도록 마사지샵을 전전하다보니 맨처음 몸을 맡겼던 그 마사지사가 새로새록 사무친다. 몸 구석구석에 젖어들던 지극한 정성. 내가 무슨 복을 지어 이런 황송한 손길의 마사지를 받았는가 싶다.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큰 빚이 있다.

중국인 맹인 안마사 -

심재휘 지음/문예중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흔 살의 인터뷰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현대시학> 2014.7​

시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또 거부할 수도 없다. '일흔'이라는 숫자가 믿기지 않아 확인해보니 시인이 1942년 출생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 일흔의 나이로 요약한 생이 담담한듯 하면서도 절절하다. 연을 나누지 않고 빼곡히 적은 형식이 목울대를 넘어오는 눈물을 꾸욱 꾸욱 누르고 있는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lanca 2015-01-0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찡 `울림이 있어요.

반딧불이 2015-01-12 19:01   좋아요 0 | URL
네..한살 한살 더할 때마다 울림이 배가 될 것 같아요. 답이 늦어 죄송해요 블랑카님.
 

 

 

지난 51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는 “2013 서울 탱고 페스티벌이 열렸다. 나는 처음 경험하는 국제적인 행사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쌍의 마에스트로가 왔고 많은 외국인들이 오직 춤을 추기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날아들었다. 뉴질랜드, 하와이, 대만, 베이징, 일본, 홍콩 등에서 온 다양한 외국인들을 접하면서 그들에게 서울 탱고 페스티벌이 상당히 인기 있는 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얼마나 나이를 먹었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아무런 편견 없이 오직 탱고라는 세계 공용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을 새워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마에스트로들의 모든 동작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웠고,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공연을 하거나 강습을 할 때 그들은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고 때문에 얼굴에서는 행복한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춤이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쪽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하고, 엉덩이나 따귀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해서 보는 이들도 즐거웠다. 세 쌍의 마에스트로들은 성격이 모두 달라보였다.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중후하면서도 친근한 호르헤와 마리아 (Jorge Dispari &Maria del Carmen Romero), 춤은 물론이려니와 몸매며 얼굴까지 아름답고 우아한 하비에르와 노엘리아(Javier Rodriguez &Noelia Barsi), 귀여운 악동 커플 같은 옥타비오와 꼬리나(Octavio Fernandez &Corina Herrera). 그들의 춤은 그들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호르헤의 강습 두 개(Milonga con Traspie, Giro Combination), 하비에르의 강습 두 개(Milonga con Traspie, Adornos)를 들었다. 예민하면서도 상냥하고 섬세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하비에르는 밀롱가를 출 때는 탱고를 잊어버리라는 말로 두 춤의 변별성을 확실히 해주었다.

 

마에스트로들 중 가장 연장자인 호르헤 디스파리 (Jorge Dispari)는 살사나 재즈의 동작이 탱고에 묻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그가 한 말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 누구나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며 놀았다는 것, 그때는 틀린다는 것을 몰랐으며 설사 틀렸다고 해도 즐거웠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틀릴까봐 걱정되어 즐기지도 못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네 차례의 강습과 두 번의 밀롱가에 참여하면서 나는 체력적 한계와 더불어 노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슨 수영을 독립운동 하듯이 하느냐고 말하던 수영코치도 떠올랐고, 자기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으니 다른 사람한테 배우라던 스키 코치, 도대체 몇 남자를 상대해야 직성이 풀리겠냐며 내가 포핸드로 공을 받아내는 동안 팔굽혀 펴기를 몇 개씩 하던 스쿼시 강사도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노는 일을 절체절명의 일을 하듯이 해왔던 것 같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세대였던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나 쾌락보다 역사적 사명이 우선이라고 배웠고, 몸을 쓰는 일을 경멸하는 정신적 우월주의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즈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파트너가 설명을 듣는 동안 쿠션을 껴안고 춤을 추는 사람, 음악이 흘러나오면 온몸으로 반응하며 흥겨워 하는 사람, 동작 하나하나가 분명하고 단정한 사람, 춤추고 있는 동안 얼굴이 행복으로 물드는 사람. 이렇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은 목련이 벙글 듯이 사랑스러움으로 뻐근해진다. 아마도 나는 오래 이런 사람의 주위를 공전할 것이다. 태양계에서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춥고 어두워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