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 30대 중반이었다. 아이가 미술학원에 있는 동안 나는 같은 건물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수영장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니 수영복은 없고 스케치북만 들고 있었다. 아이에게 수영복을 주어서 학원에 보냈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준답시고 수영복과 아이는 집에 두고 스케치북만 들고 갔던 것이다.
쓰레받기나 무선전화기를 냉장고에 넣어두는 일은 사건도 아니었다. 공과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 가던 날, 가는 길에 버리겠다고 쓰레기 봉지를 같이 들고 나갔는데 은행에 도착해보니 지갑은 온데간데없고 쓰레기봉투만 들고 있었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것이 지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내게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고 나름 심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한바탕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치명적이 아니었던 탓인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내 머리 속에 무슨 벌레가 한 마리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던 건 단어들이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때였다. 딸아이 이름을 부르는데 갑자기 아이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나도 모르게 아들이름을 부른다거나 동생들 이름을 다 부르고 나서야 아이 이름이 떠오르는 식이었다. 더 심각한건 책을 읽어도 읽을 때 뿐 책을 덮으면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전에서 찾은 영어단어의 해석을 보고 읽던 책으로 옮겨오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수준까지 가버렸다. 거리상으로는 불과 10cm도 안되고 시간상으로 겨우 2,3초 걸린 경우인데도 말이다. 나는 이것이 내 관자놀이 주변에서 펄떡거리는 편두통 때문이라 여겼다.
나는 메모를 시작했지만 메모한 사실을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 까먹듯 까먹었다. 소형이를 준형이로 부른다고 아이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 냉장고 속 전화기는 꺼내면 그만,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지갑도 사다리타고 들어가 건져오면 그만이다. 밑줄은 좍좍 그어져있는데도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읽은 책에 대한 아무런 기억 없음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 시작한 것이 리뷰쓰기였다. 리뷰는 써보니 쓴 것만큼 딱 그만큼만 내 몫이라는 것이다. 리뷰를 쓰기 위해 이런 저런 노트들을 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대학노트, 삼공노트, 스프링노트, 가네쉬 데일리 노트, 옥스포드 프리미엄 노트 등의 순으로 진화해왔다.
집에 굴러다니는 대학노트 두어 권을 쓰고는 새로 사야했을 때 삼공노트를 준비했다. 분량이 많아지면 파일링을 할 수 있어서 편했지만, 크기가 너무 큰 것이 단점이었다. 다음으로 쓴 것은 스프링 노트. 밤늦은 시간, 집중이 잘 안되거나 눈 아플 때 만년필로 좋은 글귀를 옮겨 적거나 뭔가를 끄적일 때 만년필촉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스프링 노트는 한참 쓰다보면 스프링에 손이 걸려 불편하다. 그리고 사이즈가 좀 큰 편이어서 핸드백에 잘 안 들어가는 단점이 있다. 한 권 쓰고 가네쉬 데일리 노트로 건너뛰었다. 이 노트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어디를 펴도 180도로 완벽하게 펼쳐져 손에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없다는 것. 360도로 펴도 마찬가지. 겉표지도 단단하고 핸드백에도 속속 들어간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줄 간격이 좁다는 것.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요즈음은 두 칸에 걸쳐 써야 할 판이다.
옥스퍼드에서 나오는 프리미엄 노트북은 착한 가격에 사이즈 알맞고 180도로 완벽하게 펼쳐지고 줄 간격도 적당하다. 굳이 아쉬움을 찾자면, 자주 쓰다 보니 노트 귀퉁이가 뒤집어진다.
최근 받은 캡슐 노트북. 공교롭게도 가네쉬 노트북과 색깔도 크기도 비슷하다. 다만 가네쉬의 커버가 가죽느낌이 난다면 캡슐노트는 양장본 책 커버의 두꺼운 종이 느낌이 난다는 것이 다르다. 이 캡슐노트는 오직 독서노트로 쓰도록 만들어졌다. 읽어야할 책 목록과 읽은 책의 목록을 적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제목, 지은이, 옮긴이, 출판사 등 책에 대한 기본정보를 적는 칸을 포함, 책 50권을 읽고 정리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번호도 매겨 두었다.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것은 노트 뒤쪽에 있는 대한민국 지역별 도서관 리스트다. 도서관의 주소와 전화번호, 인터넷 싸이트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다. 절판된 책을 구해야 할 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책읽기에 도전하는 사람이나 청소년들에게 선물로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