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를 같이 건넌 친구와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 더 핀란드에 가고 싶었을 거 같다.
나라도 다시 가고 싶었을 거다!
가슴이 간지럽고 몽글몽글해지는 ... 젊음의 싱그러움으로 빛나던 시간들...!

아... 너무 좋다!

어느 겨울날, 이 호수를 걸어서 횡단한 적도 있었다.
예진이와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걸어서 호수를건너는 것이 목적이었다. 누가 먼저 그러자고 했는지대체 왜 그러기로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마음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 P158

아마도 1월이었을 것이다.
호수를 건넜던 그날도 해가 거의 뜨지 않는 나날 중 하나였다. 간밤에 새로이 내린 눈이 켜켜이 쌓여 
꽁꽁 얼어붙은 호수를 비밀스러운 눈부심으로
가려주고 있었다.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은 군청에서 연보라를 거쳐형광 핑크색으로 이어지는 그러데이션이었다. 뾰족뾰족한 침엽수 모양의 산그림자가 오묘한 그러데이션의 하늘과 눈 덮인 호수의 경계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 P158

그 아래에서 우리는 방수 부츠를 신고, 내복에 스웨터를 몇 겹이나 껴입고, 스키복과 패딩을 차례로 덧입고, 털모자와 장갑을 단단히 착용하고, 목도리를 코끝까지 칭칭 두른 채로 언 호수 위를 냅다 걷기 시작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보송하고 새하얀 눈더미에 다리가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 P159

얼마간 걸었을 때, 마침내 우리는 호수 가운데에 있던 그 정체 모를 쇠기둥을 마주할 수 있었다. 높낮이가 조금씩 다른 가느다란 쇠기둥에는 각각마다 뾰족하고 예리한 삼각형이 대칭으로 달려 있었고 그 높이와 위치가 기둥마다 미묘하게 다 달랐다. 그 간단한 대칭의 삼각형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아, 이건 새다! - P159

왜 그동안 몰랐는지 의아한 일이었다. 호수가 호수인걸 몰랐던 것처럼. 국기 게양대인 줄 알았던 그 가느다란 기둥들은 새를 테마로 한 조각품이었다. 삼각형 한쌍은 분명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조금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면 한 마리의 새가 아래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궤적을 따라 그린 것도 같았다. 시간이 지나 호수가 녹고 나자 호수에 거울처럼 비친 모습 때문에 새떼들이 V 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했다. - P159

그날 예진이와 나는 호수 위 눈밭을 한참이나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호수의 끝이라고 생각했던그 나무 그림자까지 도달했다. 사실 그건 호수의 끝이아니라 호수 속 거대한 섬일 뿐이었지만, 호수는 얼기설기 엮인 그물처럼 여러 섬을 사이에 두고 한참이나더 연장되고 연결되어 있어서 실제 호수의 극히 일부귀퉁이만 건넌 셈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 닿았을 때 다시 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꼈다.
부츠는 이미 푹 젖어 더 걷다간 동상에 걸릴지도 몰랐지만, 몇 번은 미끄러져 온몸을 수영하듯 눈 속에 담그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 P160

다시 뭍으로, 학생회관 앞 잔디밭으로 도착했을 때,
우리는 뒤돌아 우리가 걸어온 눈밭 위 발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아마도 그래서 호수를 건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바로 여기 이곳에, 이 드넓은 지구위에서도 바로 이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저곳은 녹아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만이 이곳에 이렇게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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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핀란드가 선사하는 완벽한 날씨라니...
이런 행운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여행을 떠나보면 금방 깨닫게 된다.
거기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하늘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더더욱 좋다.
거기다 커피가 또 그렇게 맛있단다.

튀르키예 여행 최적기래서 5월 말 6월 초에 갔던건데 여행 내내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카파도키아 하늘은 바람 불고 흐려서 열기구는 타지도 못했고 다음날도 흐렸다 비 왔다..
파묵칼레에선 느닷없이 강풍을 동반한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갑자기 기온까지 떨어져 추위에 덜덜 떨기까지 했다.
안탈리아에서도 흐렸다 해떴다 비와서 습도높고 더운 날씨였고 다음 날 이즈미르에선 땡볕의 습격에 더워 죽을뻔...ㅠㅠ
좀 덥긴 했지만 그나마 이스탄불 날씨가 최적!

다음 튀르키예 여행은 일정을 당겨서 5월 초 정도에 떠나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열기구는 꼭 타고 싶었는데...
아참 튀르키예는 커피보단 차이를 마신다.
하루에 보통 7-8잔 마시는 튀르키예 사람들~~
가운데가 잘록하고 갸름한 유리잔에 유리받침이 있는 ... 홍차...










1년 전부터 기대했던 자전거 타기는 허무하게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예진이도 나도 걷는 걸 좋아했다. 특히 이런 날씨라면 더더욱 걷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늘은 더없이 쾌청했고, 햇살은딱 기분 좋게 내리쬐며 온 세상의 표면에 기분 좋은 반짝임을 선물 포장처럼 한 겹 더 감싸주고 있었다. - P134

평소에 미세먼지에 민감한 편도 아니고, 이제는 거의 무감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서 오히려 그 부재를 통해 미세먼지의 존재를 역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미세먼지라는 게 없는 공기란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말이다. - P134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너무 습하지도 너무
건조하지도 않았다. 신기하게 바람조차 거의 불지 않았다. 상쾌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머리를 흩날릴 정도의 바람은 아니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날씨였다. 단언컨대 이런 날씨는 어느 곳에서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여행자에게 이렇게 멋지고 완벽한 날씨가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북유럽 여행은 추울것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여름의 북유럽, 여름의 핀란드 여행은 이토록 근사한 날씨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알려졌으면 한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내내 계속 들었다. - P135

열흘간의 여행 내내 예진이와 내가 도합 백 번쯤 했던 말, 우리의 유행어는 바로 이거였다.
"아니, 서유럽을 왜 가? 파리를 왜 가? 여름에는 무조건 핀란드야!" - P135

우리는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마실 커피를 사기로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자전거 못탄게 오히려 좋은 것 같아. 막상 거기 가면 우리 마실 게 없잖아. 사실 호수에서 커피 마시면 딱좋겠다 생각하긴 했거든." - P135

어느새 우리는 신발까지 벗어두고 피크닉 타월 위에거의 눕다시피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고 구름이 이동하는 것만이 느껴졌으며 이따금 호숫가의 이름 모를 진분홍색 풀꽃들이 조금씩 흔들리며 공기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 P140

"내가 지난 세월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호수만큼은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잊히지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찍은 이 호수 사진을 자주, 오래 봐서 그런것 같아.‘
"나 그 사진 뭔지 알아. 호수 위에 별 박힌 것 말하는거지?"
예진이도 그 사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그때부터 거의 10년 동안 그 사진을 컴퓨터바탕화면으로 해놨거든."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윤슬이 너무나 명확하게찍힌 사진이었다. 네 귀퉁이의 모서리가 날렵하게 뾰족한 마름모 스티커를 수백 개 갖다 붙인 것처럼 찍혀서 처음 모니터로 사진을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예진이의 표현처럼 별을 박아둔 것만 같았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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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첸쉐 소설
<2. 이상한 집> 읽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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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 꼭 가고 싶다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에세이... 실제로 갈지는 미지수지만...
내년 2월 결혼을 앞둔 딸램은 처음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를 간대더니 뉴질랜드를 거쳐 급기야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핀란드로 바뀌어 버렸다.
딸램이 먼저 읽고 내게 빌려 주었는데 얼른 읽고 돌려주면 자기 남자친구에게도 꼭 읽혀야겠다고 말했다. 자기처럼 생각이 바뀔 거라 자신한다나~~~^^
딸이나 나는 작가인 장류진의 감정에 깊이 동화되어 버린 거 같다!

오늘 읽었던 구절에 ‘만인의 권리‘라는 개념이 있었다.
˝일종의 관습법인데, 핀란드에 거주하는 사람이든 방문한 사람이든 누구나 사유지를 포함한 모든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로, 핀란드 ‘신뢰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핀란드의 국토는 75퍼센트가 숲, 10퍼센트가 호수와 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누구나 자연에서는 소유주의 허가 없이도 야생 열매, 버섯, 꽃을 채집할 수 있다. 누구나 캠프를 세워 야영할 수도 있고 자유로이 사유지를 통과해도 되고 자전거나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다. ...(105쪽)˝

작년 겨울에 만난 예능 프로그램 중에 ‘핀란드 셋방살이‘가 있었다. 배우 이제훈, 이동휘, 곽동연,차은우 4사람이 핀란드 오지의 숲과 호수에서 집을 얻고 가스없이 자연에서 얻은 것들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컨셉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깊이 각인되었던 말이 오늘 읽었던 이 ‘만인의 권리‘였다. 땅 소유주가 있지만 허락없이도 블루베리를 비롯한 열매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고 자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졌었다.
오늘 장류진 작가의 글을 읽다보니 그 내용이 다시 생각이 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든 길에 소유주가 있겠지만 우린 평소에 그런 생각은 딱히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재산상의 불이익과 연관이 되기 전까지는...





핀란드에는 ‘만인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있다. 일종의 관습법인데, 핀란드에 거주하는 사람이든 방문한 사람이든 누구나 사유지를 포함한 모든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로, 핀란드 ‘신뢰 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핀란드의 국토는 75퍼센트가 숲, 10퍼센트가 호수와 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누구나 자연에서는 소유주의 허가 없이도 야생 열매, 버섯, 꽃을 채집할 수 있다. 누구나 캠프를 세워 야영할 수 있고 자유로이 걸어서 사유지를 통과해도 되고 자전거나 말을 타고 다닐수 있다. 심지어는 스키를 탈 수도 있다. (살던 집의 창문 밖으로 눈 쌓인 언덕에서 스키를 타는 사람을 처음 봤을때, 시내의 눈길을 크로스컨트리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는 무척 놀랐으나 이내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호수나 강에서 간단한 낚싯대로 물고기를 잡거나 보트를타거나 수영하거나 목욕을 할 수도 있다. - P105

물론 너무 어리거나 번식기에 있는 동물과 새를 방해하면 안 된다거나, 함정과 그물, 릴과 미끼를 이용한낚시는 안 된다거나, 타인의 사생활을 침범하거나 불을 피우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거나 하는, 선을 넘는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 역시 함께 마련되어 있다. - P105

이 ‘만인의 권리‘ 개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네모난 ‘박스‘가 떠올랐다.
교환학생으로 쿠오피오 대학교에 발 디딘 첫날, 학생회관에서 ‘서바이벌 키트‘라는 것을 지급해주었다.
양손으로 들어야 하는 크기의 커다란 종이박스였는데, 이제 막 타국에 도착한 외국인 학생이 그야말로 ‘생존‘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스푼과 포크와 컵과 접시가 하나씩, 프라이팬과 냄비를 비롯한 각종 조리도구들도 하나씩 그리고 이불 커버와 베게 커버 같은 침구류가 들어 있던 걸로 기억한다. - P106

사회복지 수업에서 배웠던 또 다른 박스도 떠올랐다. 그건 바로 핀란드의 모든 예비 부모에게 지급된다는 ‘베이비박스‘였다. 친환경 기저귀, 담요, 턱받이, 각종 목욕 용품 그리고 실내복과 외출복, 방한복 등을 비롯해 아기 옷도 개월 수 별로 차곡차곡 들어 있다고 했다. 마분지로 만들어진 베이비 박스의 바닥에는 적절한 탄성의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서 아기침대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나 ‘소유‘한 상태로 태어났는지에는 관계없이이 세상에 나온 순간, 누구나 ‘기본‘적인 것들은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나는 이 ‘박스‘들 역시 누구나 자연을 마땅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만인의 권리‘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고 이 숲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어렴풋이 생각했다. - P106

뒤이어 이 숲을 나도 반년이나마 누릴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공연한 행복을 느끼곤 했다. 그건 마치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은 행복이었다. 살갗에 닿아 금방 녹아내릴 테지만 내려오는 동안만큼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래서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고 싶어지는 그런 눈송이.

자전거를 무겁게 끌고 천천히 눈길을 오르던 그때와는 달리,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차창 밖 숲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마치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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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7-02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은하수 2025-07-03 10:10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작가와 절친의 추억, 그리고 작품이 함께 해서 더 좋아요~~
 

대만 작가 천쉐陳雪의 《악녀서》를 읽는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어제 받아왔다.

천쉐 작가는 1995년 데뷔작 《악녀서》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중화권의 대표적인 퀴어 문학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을 처음 발표한 30 년 전부터
자신의 성적취향을 숨긴 적이 없는 동성애자이다.
성소수자 인권향상과 대만의 동성결혼 법제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앞장서며, 자신의 삶과 목소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산문집 등을 통해 공유해왔다.


지난 22일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을 계기로 처음 한국을 찾은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볼 수 있었다.









1.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

처음 아쑤阿蘇를 만났을 때, 그녀와 내가 같은
유형이라는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날개 잃은 천사였다. 우리 눈은 비상을 갈망했다.
그래야 일정한 고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맨발은 뜨겁고 단단한 대지 위를 걸었지만 인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다. - P21

그런데 왜 10년 전에 출간된 책을 다시 출판하는 걸까?
이 책은 일찌감치 절판되어, 시중에 돌아다니는 것은 대부분 복사판이고 더 많은 각종 동성애 혹은 비동성애 소설집이 약속이나 한듯이 내가 가장 먼저 발표한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를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무상의 소홀함 탓에 나는 영문으로 가득한 그 빽빽한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고 서로 다른 두 권의 영문 선집에는 서로 다른 번역으로 이 작품을 수록하고 있었다. 독자들은 수시로 내게 편지를 보내 악녀서와 절판된 나의 또 다른 작품들을 사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징징서고晶晶書庫서점 주인인 아저阿哲는 내게 "적지 않은 독자가 서점으로 직접 돈을 보내오면서 책 좀 구해달라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부 젠더 연구 학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합법적인‘ 『악녀서 원고를 살 수 없느냐고 물어오기도했다. 나의 충실하고 열정적인 독자들은 헌책방을 뒤지기도 하고 친구에게서 빌려 읽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도서관에 가서
‘훔치기도‘ 했다. - P15

긴 시간의 세례를 거치면서 나는 악녀서』가 나 자신에게, 내가 존재하는 사회와 1990년대의 전 지구적인 젠더 연구에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녀서」에 대한 관심과 논쟁은 내게 개인적으로 초조감을 유발하긴 했지만 글을 계속 써나가도록 엄청난 힘을 주기도 했다. - P15

한 소설가의 첫 번째 작품이 이처럼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던 것에 대해서는 분명 애증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더 많은 작품으로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하여 출판사와 내가 받은 신호는 수많은 독자가 어떻게든 이 책을 읽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독자들의 열정과 성의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재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판자서 소설의 운명 중에서 - P16

얼마나 많은 날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낮에는 항상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모든 사람의 몸에서 아쑤의 그림자를 찾다가 밤이 오면 침대 위에서 아쑤의 호흡을 복습했다.
그러나, 점점. 내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아니면 한바탕 꿈이었는지조차 확정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답은 이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그곳이 어디일까?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곳을 찾기 위해 나는 수없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 심지어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다. 어떤 방법들을 써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떤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점점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 P50

문득 내가 어느 묘지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덤인가? 알고 보니 내가 찾으려 애쓴 것은 무덤이었다.
우리 아빠의 무덤 옆에 또 다른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똑바로 서서 대리석 묘비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쑤칭위蘇靑玉...."
쑤칭위, 그건 우리 엄마 이름이었다.
엄마, 내가 돌아왔어요. 여러 해 엄마를 떠났다가 결국 돌아왔어요.
나는 엄마의 무덤 앞에 누워 엄마의 자궁 속인 것처럼 몸을 말았다. 그러고는 중얼중얼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쏟아냈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말이 너무 느리고 힘들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떠돌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땅이 충분히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 P51

"엄마 사랑해요. 더없이 확실하게 진심으로 사랑해요."
희미하게 아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끝에서 들려오는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위의 구름이 점점 뭉쳐 익숙한 형상을 만들고는 좌우로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은……………

한쌍의 날개였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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