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구름이 반달을 가리자 잠시 사방이 캄캄해졌다. 달이 다시 나타난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의 정원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귀부인이 서 있었다. 나풀거리는 흰색 비단 겉옷은 소매가 펑퍼짐했고, 폭이 넓은 허리띠는 은색이었다. 얼굴은 눈처럼 하얬고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늘어진 머리카락은 숯처럼 새카맸다. 그 자태가 내게는 유랑극단의 무대 주위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당(唐)나라 시대 절세미인들과 비슷해 보였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달빛을 받은두 눈이 일렁거리는 연못처럼 반짝였다. 그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그 여자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9
염은 어머니를 위해 바닥에 남겨 둔 닭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내 생각엔 이 땅에서 요술의 힘이 빠져나가는 중인 것 같아." 나 역시 무언가 잘못됐다고 의심하던 터였지만, 그 의심을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사실이 되어 버릴 것같아서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염은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의 소리를 열심히 탐지했다. 그러다가 일어서서는 내 손을 잡고 본당의불상 뒤로 나를 끌고 갔다. - P88
염의 목소리는 잔잔한 가을 연못처럼 담담하고 냉정했지만, 말자체는 정곡을 찔렀다.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이 점점 뜸해지는 와중에 짐짓 기운 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문을 외우는 연습이나 춤추듯이 검 휘두르는 연습을 하며 보낸 세월은 다 헛수고였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산속에 혼자 살면서 요술에 필요한 식량조차 제대로 사냥하지 못하는 염의 처지를 생각하며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염의 목소리는 한순간 떨리는 듯하다가, 다시 도도해졌다. 연못의 수면에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처럼. 이내 돌아선 염의 표정은 앞서처럼 차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 - P92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방 천장의 대들보에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다.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을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 P95
고된 작업을 하는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 센트럴 거리에 늘어선 술집에서는 기계 팔이 손님에게 음료를 제공했고, 신계(新界)의 공장에서는 기계 손이 신발과 옷을 바느질했다. 빅토리아피크의 저택에서는 내가 설계한 자동 빗자루와 자동 걸레가 조심스레 복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다(직접 볼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장치들은 바닥을 청소하다가 벽에 부딪히면 부드럽게 튕겨난다고 했다. 하얀 증기를 빠끔빠끔 뿜는 기계 요정처럼. 이로써 외국인들은 마침내 중국인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필요 없이 이 열대의낙원에서 즐겁게 살 수 있었다. - P103
마침내 그날이 왔다. 창문을 통해 비친 달빛이 아파트 바닥에 희끄무레한 마름모꼴을그렸다. 염은 그 마름모 한복판에 서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새 얼굴을 움직여 보았다. 매끈한 크롬 살갗 아래에는 수많은 초소형 압축 공기 구동 장치가 숨어 있었다. 저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그 구동 장치들 덕분에 염은 원하는 표정을 자유자재로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두 눈이 달빛 속에서 흥분을 머금고 반짝였다. "준비됐어?" 내가 물었다. 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 P107
나는 염이 그린 도안을 발전시켜 크롬 살갗이 접히는 정교한 구조와 금속 뼈대의 복잡한 연결 부위를 설계했다. 경첩 하나하나를결합하고, 톱니바퀴 한 개 한 개를 조립하고, 모든 전선을 납땜질하고 이음매를 용접하고 구동 장치 하나하나에 윤활유를 발랐다. 그렇게 염의 몸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 눈앞에서 염은 마치 은빛 종이접기 구조물처럼 접혔다가 펼쳐지기를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곳적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처럼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크롬 여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중에서 - P108
그리고 지금, 만약 저 늙은 물소를 탈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때의기분을 다시 만끽하고 남은 하루를 후련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릴리는 얕은 진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늙은 물소는 여전히아무것도 모른 채 우물우물 되새김질만 했다. 진창 가장자리에 도착한 릴리는 물소의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44
"중국인은 점술의 일환으로 문자를 발명했어. 그래서 모든 한자는 그 속 깊숙한 곳에 마법이 깃들어 있지. 나는 한자를 토대로 사람의 고민을 읽어 내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네. 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줌세. 낱말을 하나 떠올려 보게. 아무 낱말이나." - P148
테디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유리 조각을 꺼냈다. 커다란 거울을깨뜨려서 만든 조각이었고, 날카로운 가장자리에는 접착테이프가둘러져 있었다. 테이프에는 먹물로 적은 한자 몇 글자가 보였다. "중국에서는 수천년전부터 거울로 재앙을 쫓아냈다네. 이 조그만 거울을 무시하면 안 돼. 이 안에는 굉장한 마법이 깃들어 있거든. 다음에 또 아이들이 자네를 괴롭히면 이 거울을 꺼내서 얼굴 앞에들이대게." - P153
화창한 가을날 오후였지만, 릴리는 한기를 느꼈다. 릴리의 상상 속에서 주위의 들판은 이 아열대의 섬을 꽁꽁 얼어붙게 한 백색 테러의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freeze(얼어붙다)‘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릴리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단어를 적어 보았다. 간 선생이 했을 법한 방법으로단어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알파벳들이 흔들리며 서로를 쿡쿡 찔러 댔다. ‘z‘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e‘는태아처럼 옹송그린 죽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내 ‘z‘와 ‘e‘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free (자유롭다)‘만이 남았다. 괜찮아, 릴리 양, 테디와 나는 이제 자유롭다네. 릴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 선생의 미소와 따뜻한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자네는 정말로 영리한 아가씨야. 자네 또한파자점술사가 될 운명이라네. 미국에서.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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