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계 형사실은 일층 복도 맨 끝이었다. 담당 형사는 피부색이 검고 어깨가 다부졌다. 목이 굵고 주먹이 컸다. 강력계 형사라면 무술솜씨도 대단할 것이었다. 그에게 잡히던 순간의 철호의 모습이 떠올려지지 않았다.
_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일로 뵙게 되어서 유감입니다만, 경찰관의 직무를 이해해주십시오.
나는 형사와 마주앉았다. 내키지 않으면 답변하지 않아도 좋다고 형사는 나에게 일러주었다. 나의 진술은 철호의 범죄 사건기록에 첨부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배경과 범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서 형사정책연구원에 제출된다고 형사는 말했다. -<손> 중에서 - P51

나는 사내에게 목례를 보냈다. 사내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크고 흐린 눈이 뒤로 물러서는 듯하면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내 눈도 겁에 질려 있을 것이었다. 나는 얼굴의 화장이들뜨는 느낌이었다. 사내는 철호가 강간한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그 사내도 나처럼 참고인으로 불려온 참이었다. 나는 두시까지, 그리고 그 사내는 세시까지 출두해서 강간범의 어머니와피해자의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형사는 시간을배려했는데, 내가 화장을 고치느라고 늦고, 그 사내는 조금 일찍도착해서 결국은 형사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 P53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에게는 휴가를 주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철호가 구속돼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고, 편지도 쓰지 않았다. 철호의 생애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나는 그럴 방법이 없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러서 아파트 열쇠를 맡기고 이사올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철호와 살았던 시간과 공간이 이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P62

겨울에 큰 개 한 마리가 수월천 얼음 위를 건너다가 얼음이떠내려갔다. 개는 땅에 닿지 못했다. 개는 저녁 불빛이 돋아나는 마을을 향해 울부짖으면서 바다 쪽으로 떠내려갔다. 나는 빨래를 걷으러 베란다에 나갔다가 얼음조각에 실려서 떠내려가는개를 보았다. 하늘에는 초저녁 반달이 떠 있었다. 개의 비명은물과 달 사이에 가득찼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개는 천지간에 홀로 울부짖었다.  - P68

강물에 떨어진 연옥이의 몸이 하구쪽으로 떠내려가는 환영이 물 위에서 보였다. 환영 속에서 연옥이의 긴 머리카락이 물결에 너울거렸다. 나는 연옥이가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살아서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내망상 속에서 철호의 정자도 죽지 않고 연옥이의 몸에 들러붙어서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남쪽 항구도시에서 살 때 수월천의 얼음조각에 실려서 바다로 떠내려가던 개의 비명소리가 대교 밑의 물길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때 수월천에 달이 비치었고, 물과 달 사이에는개의 비명소리뿐이었다.  - P79

목수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름을 물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연옥이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는 당신의 말이 맞다고 말해줄까. 아마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목수는 아직도 그 하얀 개를 데리고 있을까.  -<손> 중에서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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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건 어쩌면 그냥 마음이 산산이 흗어지는 건지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처음에 기능을 다하는 건 몸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머물곳이 없어지니까 마음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 그러면 너라고 할 만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거야. 너는 여러 마음들의집합체 같은 거라서. -<내가 울기 시작할 때> 중에서 - P197

삼의 본명은 삼이 아니었지만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삼이 자기를 삼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남자친구를 삼이라고 부르는 건영 내키지가 않아서 웬 헛소리냐고 싫다고 거절했는데 잠이 끈질기게 주장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삼이라고 불러주었고 나중에는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 P200

얼마 뒤 우리는 헤어졌다. 아빠의 조직 검사 때문은 아니고 내가 삼에게 드라이아이스를 먹인 때문이었다. 진짜 먹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눈을 감고 입을 아, 벌린 채 아이스크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삼이 입 앞까지 가까워진 냉기를 느끼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스푼 위의 것을 덥석 삼켰다가 혀가 탈 듯한 통증에깜짝 놀라 뱉어냈다. 눈을 뜬 삼은 드라이아이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았다. 드라이아이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주변의온도에 따라 승화되어 바닥에는 축축한 습기만 남을 것이다. 더나중에는 그런 게 거기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난정말 모르겠어, 하고 삼이 말했다. 그건 당연했다. 영영 모를 거야 라고도 했다. 그건 뜻밖이었다. 그리고 삼은 양손으로 얼굴을감싸며 헤어지자고 말했다. 몇 번이나 참았다가 겨우 말한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212

삼은 마지막에 나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어째서 그 말에 모든 것이 녹는다는 생각을 했
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로 가는 버스에 앉아서 울고 말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는데 한참 말을 않자 삼이 눈치를 챘는지 혹시 우는 거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삼은 울지 말라고 하지 않고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다울고 난 다음에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삼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삼은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답을 주었는데그러지 못해서 삼에게 미안하다. - P218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영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그야말로 ‘안물안궁‘의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나는 네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네가 자라는 내내 나와의 가정 내 이권 다툼에서 늘 교묘히 우위를 점하던 네가 나와는 접점이 거의 없어 십 분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무리인 네가 나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생각이란 걸 하든 말든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응원이고 나발이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정말 어쩌라고 싶었지만, 내 인생 하나 살기도 벅차다! 하고 외치고도 싶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보여준 하해와 같은 아량에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같은 표정을 짓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일> 중에서 - P235

"근데 있지."
"어."
"나도 사랑 같은 게 뭔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너는 너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해?"
그렇게 묻는 순간 나는 영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알 것 같았다. 나는 영지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영지의 입에서나올 대답이 뭔지는 몰라도 내가 들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얼른영지의 입을 막았다. - P247

"그리고 일찍일찍 다녀요. 말만한 처녀가."
나는 차라리 남자로 오해받는 편이 나았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 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 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 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 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공원에서> 중에서 - P261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을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냐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머리통을 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겁먹고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가 뒷머리를 낚아채 쓰러뜨려서는 운동홧발로 마구 짓이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적이고 싶으니까. 남자는 너도 이렇게 하고 싶었잖아, 힘만 있었으면 이렇게 했을 거잖아, 말하듯이 사정없이 나를차고 밟았다. 마치 우리가 합의하에 링 위에서 서로를 때리며 싸우다가 내가 진 것처럼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것 같았다. 남자가계집년이 어디서 까부냐고 침을 뱉고 떠난 다음에야 나는 공원의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쫓아와 모든 걸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 P267

지독한 악취가 나를 싸고도는 것 같았다. 악취는 그날 남자가뱉은 침이 내 얼굴에 떨어졌을 때, 그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아주 끔찍한 냄새였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것은 절대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처럼 내 몸에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리며 저사람한테서 악취가 나, 하고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 P269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이야기를 아이한테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이 공원에서모르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도 되나. 아주 두들겨맞았다고 말해도 되나. 그야말로………… 인간적인 폭행이었다. 그때문에 자다가 벌떡벌떡 깬다고 말해도 되나. 티브이를 보며 태평하게 웃다가도 문득 몸서리가 쳐진다고 말해도 되나. 애인을 더는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해도 되나. 사실은 그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건 또 어떨까. 아이는 한창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고 해야할 나이가 아닌가. 세상은 굉장히 끔찍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줘도되나.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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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천向의 십삼 킬로미터 유로는 동해에 닿기까지 다섯번을 굽이쳤고, 그 하구에 자리한 어촌마을 이름은 향일포였다.
향일천은 물이 차가워서 언저리가 서늘했고, 흐름이 빨라서 초겨울에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떼들은 아가미를 왈칵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산맥의 가파른 사면을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를 스치고 굽이치는 자리마다 우뚝한 직벽이 들어섰다. - P12

터미널에서 향일포까지는 해안도로로 팔 킬로미터였다. 마을버스가 다녔지만 이춘개는 그 팔 킬로미터를 걸었다. 버스에서 혹시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마주치게 될 일이난감했다. 이춘개의 기억 속에서 향일포는 오래된 그림처럼 얼룩으로 바래있었고 그 향일포를 다시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 P15

이춘개는 아침 아홉시에 북부 제3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간첩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십사 년을 선고받고 십삼 년을 복역한뒤 삼일절 특사로 잔여 형기 십 개월이 사면되었다. 만기 출소나별 차이 없었다. 두 주일 전 교도소 총무과장한테 불려가서 사면출소 통고를 받았을 때 향일포의 어촌마을과 바다가 천장 벽지의 쥐 오줌 자국처럼 흐리게 떠올랐다. 거기서의 밥과 거기서의인연이 결국은 십삼 년 동안의 징역살이로 이어진 것이었다.  - P16

십삼 년 만에 보는 새똥섬은 이춘개의 눈 속으로 뛰어들어올듯이 확실했다. 여기가 거기로구나, 여기가 바로 새똥섬이 있는향일포로구나. 새똥섬을 바라보면서, 이춘개는 마을로 들어가기를 머뭇거렸다. 향일포와의 연고는 십삼 년의 복역 중에 모두증발해버린 것이어서 새똥섬의 확실성은 오히려 환각 같았다. - P19

방향은 미리 정해놓지 않았으나 저절로 정해졌다. 피란민 사태는 북쪽에서 밀려내려왔다. 이춘개는 남쪽으로 휩쓸렸다. 어래포구에서는 열자짜리 전마선에까지 피란민들이 매달렸다
전마선엔 엔진도 돛도 없고 노 한 쌍만 달려 있었다. 이춘개는어래호에 가족과 피란민들을 태우고 포구를 떠났다. 피란민들은 이춘개가 골라서 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배가 시동을 걸고후진으로 출발할 때, 뱃전을 잡으려던 피란민 몇 명이 물에 떨어졌다. 이춘개는 물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널빤지를 던져주고 배를 돌렸다. - P27

이춘개가 조업중에 군사분계선 북쪽 어래진 포구로 흘러들어가 체포되기 전날은 오후에 안개가 끼었고 저녁에 안개가 걷히면서 보름달이 떴다. 겨울 바다에 안개가 끼는 것은 찬물과 더운물이 원양에서 부딪치기 때문이며, 이때 깊이 내려갔던 명태가수면 쪽으로 올라온다고 늙은 어부들은 말했다. 이춘개는 어렸을 때부터 명태와 더불어 살았다. 명태를 잡는 일은 논농사나 밭농사와 같았다. 포구마을과 사람들의 생애는 명태 냄새에 절여졌다. 아이들은 명태를 먹으면서 자랐고 명태를 팔아서 학교에다녔다. 마을의 개들과 갈매기들은 명태 대가리와 내장을 먹어서 발육이 좋았다. 겨우내 명태는 조류처럼 몰려왔다. 어부들은명태잡이를 나갈 때 ‘명태 건지러 간다‘고 말했다. - P30

어래호에서는 어구 취사도구 항해장비 이외의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래호 나포는 정보 가치가 낮은 사건으로 분류되었다. 이춘개 일행은 억류 육 개월 만에 송환되었다. 선원들은공해상에서 남북 경비정 간에 인계되었다. 배는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송환되던 날이춘개 일행은 향일포선착장에서 합동조사단에 인계되어 도청 소재지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뿐 아니라 여러 정보기관의 수사관들이 번갈아서 심문했다. 수사관들은 월경경위와 해성 조건, 선박상태, 그리고 북쪽에서 무슨 내용을 조사받았고 거기에 뭐라고 진술했는지를 반복해서 물었다. - P36

공작원들은 어래진에서 출발했다. 공작원들은 이춘개가 어래진에서 심문받을 때 그린 향일포 해안의 약도를 들여다보면서새똥섬과 바위들의 위치를 숙지했다고 심문 과정에서 진술했다. 공작원들의 소지품에서 비닐 코팅한 약도의 사본이 나왔다.
수사관들이 약도를 들고 향일포에 와서 현장과 대조했다. 모든시설물들이 약도와 같았고, 새똥섬과 그 주변 바위들의 위치도틀리지 않았다. 이춘개는 송환 후 남쪽에서 조사받을 때, 북쪽에서 약도를 그린 사실을 진술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약도를 그렸나? 라고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 똑같은 어촌마을의 생김새를 그려 냈다고 여겼다. 수사기관은 이춘개가 지령을 받고 내려와서 공작원의 상륙을 인도한 것이라고 혐의를 설정했다. 이춘개는 체포된 지 한참 후에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혐의를 감지할 수 있었다. 혐의는 굳어져갔고, 마련된 결론을 향해 심문은 진행되었다. - P40

흰겨울 산맥이 뼈를 드러내며 이춘개의 화폭 위쪽으로 흘러갔다. 아침 바다는 빛과 어둠이 섞여서 출렁거렸다. 빛 한 가닥이 향일천 물줄기를 거슬러서 상류로 올라가며 고래 그림이 새겨진 바위쪽을 향했다. 화폭에 보이지 않지만, 바위 속의 고래들이 깨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이춘개의 화폭 가장자리에서, 작살을 쥔사내가 고래 등 위에 올라서서 일출의 바다로 나아갔다. 작살은사내의 키보다 크게, 길게 그려져 있었다. 고래떼의 항적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길게 이어졌고, 마을이 시간 위로 말갛게 떠오르고 있었다. - P45

이춘개가 죽은 해 겨울에 명태가 많이 잡혔다. 명태는 물결처럼 밀려내려왔다. 먼바다에서 고래들이 솟구치며 연안으로 다가왔다.

-<명태와 고래> 중에서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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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구름이 반달을 가리자 잠시 사방이 캄캄해졌다.
달이 다시 나타난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의 정원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귀부인이 서 있었다.
나풀거리는 흰색 비단 겉옷은 소매가 펑퍼짐했고, 폭이 넓은 허리띠는 은색이었다. 얼굴은 눈처럼 하얬고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늘어진 머리카락은 숯처럼 새카맸다. 그 자태가 내게는 유랑극단의 무대 주위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당(唐)나라 시대 절세미인들과 비슷해 보였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달빛을 받은두 눈이 일렁거리는 연못처럼 반짝였다.
그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그 여자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9

염은 어머니를 위해 바닥에 남겨 둔 닭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내 생각엔 이 땅에서 요술의 힘이 빠져나가는 중인 것 같아."
나 역시 무언가 잘못됐다고 의심하던 터였지만, 그 의심을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사실이 되어 버릴 것같아서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염은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의 소리를 열심히 탐지했다. 그러다가 일어서서는 내 손을 잡고 본당의불상 뒤로 나를 끌고 갔다. - P88

염의 목소리는 잔잔한 가을 연못처럼 담담하고 냉정했지만, 말자체는 정곡을 찔렀다.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이 점점 뜸해지는 와중에 짐짓 기운 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문을 외우는 연습이나 춤추듯이 검 휘두르는 연습을 하며 보낸 세월은 다 헛수고였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산속에 혼자 살면서 요술에 필요한 식량조차 제대로 사냥하지 못하는 염의 처지를 생각하며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염의 목소리는 한순간 떨리는 듯하다가, 다시 도도해졌다. 연못의 수면에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처럼.
이내 돌아선 염의 표정은 앞서처럼 차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 - P92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방 천장의 대들보에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다.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을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 P95

고된 작업을 하는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 센트럴 거리에 늘어선 술집에서는 기계 팔이 손님에게 음료를 제공했고, 신계(新界)의 공장에서는 기계 손이 신발과 옷을 바느질했다. 빅토리아피크의 저택에서는 내가 설계한 자동 빗자루와 자동 걸레가 조심스레 복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다(직접 볼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장치들은 바닥을 청소하다가 벽에 부딪히면 부드럽게 튕겨난다고 했다. 하얀 증기를 빠끔빠끔 뿜는 기계 요정처럼. 이로써 외국인들은 마침내 중국인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필요 없이 이 열대의낙원에서 즐겁게 살 수 있었다. - P103

마침내 그날이 왔다.
창문을 통해 비친 달빛이 아파트 바닥에 희끄무레한 마름모꼴을그렸다. 염은 그 마름모 한복판에 서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새 얼굴을 움직여 보았다.
매끈한 크롬 살갗 아래에는 수많은 초소형 압축 공기 구동 장치가 숨어 있었다. 저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그 구동 장치들 덕분에 염은 원하는 표정을 자유자재로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두 눈이 달빛 속에서 흥분을 머금고 반짝였다.
"준비됐어?" 내가 물었다.
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 P107

나는 염이 그린 도안을 발전시켜 크롬 살갗이 접히는 정교한 구조와 금속 뼈대의 복잡한 연결 부위를 설계했다. 경첩 하나하나를결합하고, 톱니바퀴 한 개 한 개를 조립하고, 모든 전선을 납땜질하고 이음매를 용접하고 구동 장치 하나하나에 윤활유를 발랐다. 그렇게 염의 몸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 눈앞에서 염은 마치 은빛 종이접기 구조물처럼 접혔다가 펼쳐지기를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곳적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처럼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크롬 여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중에서 - P108

그리고 지금, 만약 저 늙은 물소를 탈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때의기분을 다시 만끽하고 남은 하루를 후련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릴리는 얕은 진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늙은 물소는 여전히아무것도 모른 채 우물우물 되새김질만 했다. 진창 가장자리에 도착한 릴리는 물소의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44

"중국인은 점술의 일환으로 문자를 발명했어. 그래서 모든 한자는 그 속 깊숙한 곳에 마법이 깃들어 있지. 나는 한자를 토대로 사람의 고민을 읽어 내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네.
 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줌세. 낱말을 하나 떠올려 보게. 아무 낱말이나." - P148

테디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유리 조각을 꺼냈다. 커다란 거울을깨뜨려서 만든 조각이었고, 날카로운 가장자리에는 접착테이프가둘러져 있었다. 테이프에는 먹물로 적은 한자 몇 글자가 보였다.
"중국에서는 수천년전부터 거울로 재앙을 쫓아냈다네. 이 조그만 거울을 무시하면 안 돼. 이 안에는 굉장한 마법이 깃들어 있거든.
다음에 또 아이들이 자네를 괴롭히면 이 거울을 꺼내서 얼굴 앞에들이대게." - P153

화창한 가을날 오후였지만, 릴리는 한기를 느꼈다. 릴리의 상상 속에서 주위의 들판은
이 아열대의 섬을 꽁꽁 얼어붙게 한 백색 테러의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freeze(얼어붙다)‘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릴리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단어를 적어 보았다. 간 선생이 했을 법한 방법으로단어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알파벳들이 흔들리며 서로를 쿡쿡 찔러 댔다. ‘z‘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e‘는태아처럼 옹송그린 죽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내
‘z‘와 ‘e‘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free (자유롭다)‘만이 남았다.
괜찮아, 릴리 양, 테디와 나는 이제 자유롭다네. 릴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 선생의 미소와 따뜻한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자네는 정말로 영리한 아가씨야. 자네 또한파자점술사가 될 운명이라네. 미국에서.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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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십 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는 이유로 정은이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때 혜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지갑을 연 것이었다. 정은은 그런 혜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건 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줬다니 제정신이야? 너야말로 너무 야박한 거 아냐? 정은은 혜수와 오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보다 서로자주 만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중고 시절 이미평생의 우정을 모두 나누었기 때문이라고도 그 시절에 서로의 아주 깊은 데까지 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해도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런 나약한 말들> - P136

"그 부장이라는 사람도 그래. 당연히 회사 비품인 줄 알았겠지.
그 돈이 충분하냐고? 너무 과하게 준 거 같은데. 사진들 좀 없어진게 대수야? 부장도 알고 있어? 그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네가 스토킹하던 사람이라는 거."
"뭐? 스토킹?"
"일방적이었잖아. 너 혼자 좋아한 거고."
"뭐? 나랑 선생님은 진짜 친했어. 너도 잘 알잖아."
"애들은 다 수군거렸어. 정은이 걘 아직도 선생님 쫓아다니냐고, 중딩도 아니고 왜그러냐고, 친구없어서 선생님이 챙겨주던시절은 그만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고. 난 차라리 잘됐다 싶어. 그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도 없지. 너 혼자 과도하게부여한 의미밖에 없지. 그건 진작에 버렸어야했어. 네 손으로 직접 삭제했어야 했다고. 끝을 냈어야 했어. 근데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영영 청승 떨겠지."
<그런 나약한 말들> - P138

정은은 더는 화를 참지 못했다. 정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던혜수가 "맞아, 난 널 잘 모르지" 하고 시인했을 때, 정은은 혜수가그렇지 않다고 자신에게 맞서 소리쳐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았다. 난 너를 알아, 내가 왜 몰라?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아, 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혜수는 자신을 잘 모른다고 말했고 정은은 마치 이세상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나약한 말들>
- P143

승호가 애써주었지만 이번에도 잘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신청일 기준으로 생일이 보름 정도 지나버려 더는 만 삼십오 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담당자를 붙들고 공고일 기준이 아니었느냐고 거의울다시피 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하여튼 쉬운게 없었다. 그래도 식당은 계획대로 열기로 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 - P163

내가 취업에 실패할 때마다 아빠는 "남들 하는 것 좀 봐봐라. 사람이어떻게 저 좋은 것만 하고 살겠노?"라고 했다. 그런 게 삶인가? 모욕을 견디는 것......그렇다면 나는 이제야 겨우 살아가는 흉내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 <마음에 없는 소리>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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