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건 어쩌면 그냥 마음이 산산이 흗어지는 건지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처음에 기능을 다하는 건 몸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머물곳이 없어지니까 마음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 그러면 너라고 할 만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거야. 너는 여러 마음들의집합체 같은 거라서. -<내가 울기 시작할 때> 중에서 - P197

삼의 본명은 삼이 아니었지만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삼이 자기를 삼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남자친구를 삼이라고 부르는 건영 내키지가 않아서 웬 헛소리냐고 싫다고 거절했는데 잠이 끈질기게 주장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삼이라고 불러주었고 나중에는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 P200

얼마 뒤 우리는 헤어졌다. 아빠의 조직 검사 때문은 아니고 내가 삼에게 드라이아이스를 먹인 때문이었다. 진짜 먹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눈을 감고 입을 아, 벌린 채 아이스크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삼이 입 앞까지 가까워진 냉기를 느끼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스푼 위의 것을 덥석 삼켰다가 혀가 탈 듯한 통증에깜짝 놀라 뱉어냈다. 눈을 뜬 삼은 드라이아이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았다. 드라이아이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주변의온도에 따라 승화되어 바닥에는 축축한 습기만 남을 것이다. 더나중에는 그런 게 거기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난정말 모르겠어, 하고 삼이 말했다. 그건 당연했다. 영영 모를 거야 라고도 했다. 그건 뜻밖이었다. 그리고 삼은 양손으로 얼굴을감싸며 헤어지자고 말했다. 몇 번이나 참았다가 겨우 말한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212

삼은 마지막에 나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어째서 그 말에 모든 것이 녹는다는 생각을 했
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로 가는 버스에 앉아서 울고 말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는데 한참 말을 않자 삼이 눈치를 챘는지 혹시 우는 거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삼은 울지 말라고 하지 않고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다울고 난 다음에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삼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삼은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답을 주었는데그러지 못해서 삼에게 미안하다. - P218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영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그야말로 ‘안물안궁‘의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나는 네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네가 자라는 내내 나와의 가정 내 이권 다툼에서 늘 교묘히 우위를 점하던 네가 나와는 접점이 거의 없어 십 분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무리인 네가 나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생각이란 걸 하든 말든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응원이고 나발이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정말 어쩌라고 싶었지만, 내 인생 하나 살기도 벅차다! 하고 외치고도 싶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보여준 하해와 같은 아량에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같은 표정을 짓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일> 중에서 - P235

"근데 있지."
"어."
"나도 사랑 같은 게 뭔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너는 너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해?"
그렇게 묻는 순간 나는 영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알 것 같았다. 나는 영지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영지의 입에서나올 대답이 뭔지는 몰라도 내가 들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얼른영지의 입을 막았다. - P247

"그리고 일찍일찍 다녀요. 말만한 처녀가."
나는 차라리 남자로 오해받는 편이 나았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 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 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 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 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공원에서> 중에서 - P261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을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냐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머리통을 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겁먹고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가 뒷머리를 낚아채 쓰러뜨려서는 운동홧발로 마구 짓이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적이고 싶으니까. 남자는 너도 이렇게 하고 싶었잖아, 힘만 있었으면 이렇게 했을 거잖아, 말하듯이 사정없이 나를차고 밟았다. 마치 우리가 합의하에 링 위에서 서로를 때리며 싸우다가 내가 진 것처럼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것 같았다. 남자가계집년이 어디서 까부냐고 침을 뱉고 떠난 다음에야 나는 공원의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쫓아와 모든 걸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 P267

지독한 악취가 나를 싸고도는 것 같았다. 악취는 그날 남자가뱉은 침이 내 얼굴에 떨어졌을 때, 그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아주 끔찍한 냄새였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것은 절대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처럼 내 몸에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리며 저사람한테서 악취가 나, 하고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 P269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이야기를 아이한테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이 공원에서모르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도 되나. 아주 두들겨맞았다고 말해도 되나. 그야말로………… 인간적인 폭행이었다. 그때문에 자다가 벌떡벌떡 깬다고 말해도 되나. 티브이를 보며 태평하게 웃다가도 문득 몸서리가 쳐진다고 말해도 되나. 애인을 더는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해도 되나. 사실은 그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건 또 어떨까. 아이는 한창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고 해야할 나이가 아닌가. 세상은 굉장히 끔찍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줘도되나.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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