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루가 본가에 가 있는 사이, 도쿄에 있던 나의 마음속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서 뻔뻔한 구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있었다. 이미 오륙 년 전부터 제주4.3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증언을 조금씩 촬영하면서 어떻게 영화로 만들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그 일에 대해 말해야만 데뷔작인 <디어 평양>을 겨우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 뿌리를 둔 부모님이 한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지지하며살아온,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거기 있을지 모른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 P167

어머니와 카오루가 처음 만나는 순간은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그대로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카오루를 환영했고, 카오루는 존경을 담아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로를 존중하는 두 사람의 하모니에서 캠코더를 들고 관찰하던 나는 배움을얻었다. 어머니가 직접 만든 닭 백숙이 훌륭한 중개 역할을 완수했다는 사실은 구태여 덧붙일 필요도 없다. - P170

오사카 집에 방문해서 환대를 받은 카오루는 어머니가 만든닭 백숙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다섯 시간이나 우려낸 수프(국물)의 맛도 맛이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어머니의 따스한 응대에도 감격한 것 같았다. ‘미국 놈, 일본 놈은 안 돼!‘라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단호한 신념은 물론, 늘 아버지 의견이 우선인 어머니의 성정 또한 내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소금을 뿌리시면 어쩌나,
김치를 던지실지도 모르겠다며 농담 섞인 불안을 내비쳤으니 그만큼 긴장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웃으며 환대를 해주셨다고무척이나 기뻐했다. - P171

카오루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에서도 홀로 사는 이의 외로움을 감지했다.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 대신 가족사진에 둘러싸여 사는 어머니가 안됐다고, 자신이 네 번째 아들이 되겠다고 시간을 내서 오사카를 오갔다. - P172

어머니와 카오루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함께 장을 봐온 마늘껍질을 벗기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목격했을 때, 이 장면이 작품의 핵심이 되리라 확신했다. 이데올로기가 달라 서로 탓하고 싸우고 죽이는 세상에서,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밥을 해서 나눠 먹는다는 사실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생각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와 카오투가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영화의 제목이
<수프와 이데올로기> 인가보다.
요즘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긴한데, 보고 싶지만...
상영관도 멀고 시간 맞추기도 너무 힘들다. - P174

오사카에 가기 전 재일코리안의 역사와 제주4.3사건에 관한 책을 탐독한 그의 적확한 질문에 어머니는점점 적극적으로 자신에 대해 털어놓았다.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어린 시절부터 이야기하던 어머니는 제주4.3사건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기억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안에는 오랜 세월 봉인해온 기억, 말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 만큼 비장한 기억도 있었다.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무거운 돌을 여럿 올려두었던 기억의 뚜껑을 카오루와 내가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족이란 혈연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믿게 되었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기능하는 관계성이 있어야 집합체가 비로소 가족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억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비록 당사자는 될 수 없지만,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윤곽정도는 앍고 싶다는 겸손한 노력 말이다. 그러기 위해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건과 사실을, 감정과 감상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상상과 망상까지도. - P175

사랑하는 내 동생 영희에게.
놀라지 말고 들으렴. 건오 형이 죽었다. 심장마비로 쓰러져서그날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어. 이미 장례식도 다 치렀다. 우편보다 빠를 거 같아서 평양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K씨에게 이 편지를 맡긴다. 이 소식을 들으면 오사카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지, 평양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네게 전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오빠를 용서해주면 한다. 
그리고....... - P178

어머니의 증언은 일본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오사카 대공습을 피해 제주도로 간 데서 시작되었다. 열다섯부터 열여덟까지3년간의 제주도 생활과, 열여덟 제주의 4월 3일에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이야기했다. 한라산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본 일, 의사였던약혼자가 무장대에 참가했다 산에서 죽은 일, 친한 친구와 가솔린을 옮긴 일,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온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 P190

일주일 후부터 어머니가 변해갔다. "아버지! 건오! 상철이!
어디 있니?" 어머니는 이미 죽고 세상에 없는 가족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 장남, 당신의 남동생을 부르며 2층 계단을 올라가방안을 둘러봤다. 눈빛이 멍해졌고 말도 바로 나오지 않았다. 검사 결과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기 상태에 어머니 스스로도 당황스러운것 같았다. 나와 카오루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어머니가 말하는 내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 P192

충성의 노래
기억을 잃어가던 어머니가 김일성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잔혹하고 순수하고 활기차고 사랑스럽고가엾고 성숙한 소녀 같았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모가 응축된 이장면은 <수프와 이데올로기> 118분 중에도 가장 보는 이의 마음을사로잡는다. 떠올릴 때마다 숨이 답답해질 정도다.
살아가다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픈 상황들을 조우한다. 그순간을 카메라가 포착할 때 기적 같은 장면이 탄생하고, 그 작품을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잔인한 이야기다. 이제 와 무슨 말인가 싶지만. - P194

어떻게든 초상화를 치우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 넣어야 했다.
나 자신과의 결별로서, 새롭게 걸어나가기 위한 생의 마디로서.
낡은 시대에 고하는 결별이자 가족과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런시대는 이제 끝냅시다!‘ 하는 결별. 평양에 있는 가족이 걱정되지않을 리가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에 가족이있어서 아무 말 못 했던 시대를 끝내고 싶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무엇보다 나는 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P198

어머니가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과 관객을 향해 던지는 시선. 그 장면을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장면으로 정한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꿀짱아는 유아차도 아기띠도 격렬히 거부하며 오로지 내 두 팔로 안고 다닐 것만 요구했다. 피부의 80퍼센트 이상 나와 접촉되어 있지 않으면 발작하듯이 울어댔다. 한 시간쯤 동동거려 기껏 재워놓으면 5분 만에 눈을 반짝 떠버렸다. 나는 거의 언제나 녹초였다. 엄마가된다는 건 심신이 피폐해지는 일이었다.


--- 휴우... 생각만해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이 팍팍 온다. 비슷한 아기를 나두 키웠으니까. 난 업고 있느라 허리가 끊어질듯 아프고 손목도 아파서 손에 힘을 줄수 없을 정도였었다. 아이를 키운다는건 정말 심신이 피폐해지는 일이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산후우울증도 엄청 심했을 시기인데 그걸 몰랐다. - P36

"네가 어릴 때 한 짓을 생각하면 네 딸이 낮을 가리는 건 당연하지. 너처럼 심하게 낮을 가린 아이가 세상에 또 있었을라고?"
엄마 말이 옳았다. 사실 딸더러 뭐라고 할 수도 없는게, 꿀짱아의 낯가림은 유전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낮가림으로 악명 높았다. 삼촌들이나 고모부처럼 남자 목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기겁을 하고 자지러져서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숨어야 했다.

---음...
유전 맞는걸거야^^ - P44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큰일이 아니구나. 괜찮구나. 세상은 여전히 좋은 곳이구나. 나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시 병아리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인생의 첫 기억이다. 할머니는 내 기억의 시초부터 오늘까지 늘 그런 식으느 존재했다. 그 분은 내 눈 앞에 얼굴을 들이밀거나 나를 둘러싸고,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않는 목소리로 나를 둘러싸고, 괜찮다고, 예쁘다고,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했다.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그로부터 몇 주 뒤 거의 8월 말이었다-그가 밤중에전화를 걸어 로이스 부바, 자신의 이부누이인 그 여자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 연락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서로 핏줄이니 연락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녀가 그를 미워할지 몰라서 꺼려진다고 말했다. 그녀는 분명 그의 어머니를 미워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루시." 그가 말했다. - P11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항에서 기다리는 동안 딸들은 찡얼거렸고, (내 기억에) 아이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비행기에 타자나는 딸들 사이에 앉아 아이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애썼지만, 종종 화가 났다. 한 아이라도 울면 승객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보았고, 윌리엄과 그의 어머니는 비행기의 다른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 P117

그때 이후로 나는 내 일 때문에 세상을 돌아다녔고-책이 출간되자 외국 출판사들이 나를 초대했고 세상 곳곳에서 페스티벌이열렸다-그러니까 그때 이후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비행기일등석에 탔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칫솔과 치약과 안대가 들어있는 작은 키트를 준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숱하게 경험했다.
삶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 P117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뉴욕은 내가 오래 살아온 곳이고, 익숙한 곳이다. 내 아파트, 내 친구들, 경비원,
정류장마다 한숨을 토하는 도시 버스들, 내 딸들……… 그 모든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은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나는 그게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데, 겁이 난다고말할 만큼 내가 그를 충분히 잘 아는 건 아니라고 문득 느꼈기때문이다. - P140

다시 돌아보았을 때도 윌리엄은 여전히 그 사진을 쳐다보고있었다.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말했다. "그가 맞아,
루시." 그러고는 더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아버지가 맞아." 나는 다시 사진을 보았고, 윌리엄의 아버지 얼굴에 떠오른표정은 다시 봐도 인상적이었다. 모든 남자가 야위어 보였지만, 윌리엄의 아버지는 눈썹이 짙고 눈동자도 색이 짙었으며,
경멸적인 태도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 P155

캐서린과 나 사이에 리듬이 생겼고, 딸들이 종일 캠프에 가 있는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병이 깊어지면서 그녀는 침대에 더 많이 누워 있었고, 침대 근처에 큰 의자가 있어서 나는 거기 앉았다. 그건 내게 힘든 일이 아니었고, 힘들었다는 인상을주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 여인을 사랑했으며, 밤에 내 딸들이돌아와 함께 있으면 그곳이 정확히 내가 있어야 할 장소라고 느꼈다. "아이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 마." 임종을 앞두고 의료장비를 방으로 들여올 때 캐서린이 내게 말했다. "아이들이 이걸 가지고 놀게 해." 그리고 (내 생각에) 아이들은 할머니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혹은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방에 들인 산소호흡기에 적응했고, 마지막이 다가와 간호사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적응했다. - P181

그들이 모르핀을 주었지만-캐서린은 그것을 정말 마지매이 오기 전까지는
거부했다. 그날도 그녀는 여전히 아주 고통스럽고 불안한모습을 보였다. 내가 살피러 들어갔을 때 캐서린은 침대보를 잡아 뜯으며 거친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고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말이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점점 불편해하는 것이 너무나 잘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캐서린을 지켜보다가, 내손을 그녀의 팔에 얹고 이렇게 말해버린 것이다. "오, 캐서린, 얼마안 남았어요. 약속할게요."
그러자 그 여인이 나를 쳐다보았고,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캐서린은
침을 뱉고-뱉으려고 했고- 말했다.
 "여기서 나가!" 그녀가 한쪽 팔을 들어올리자 원피스 잠옷의 소매통을 통해
맨팔이 드러났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나가. 너 -이 몹쓸 계집애 같으니! 넌 쓰레기야!"
내가 입에 담으면 안 되는 말을 했다는 걸 대번에 깨달았다.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암시하는 말을 해버린 것이었다. 캐서린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나조차 (어느 정도는) 모르고있었다는 생각이 (그 당시에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 P182

시간이 좀 걸렸지만, 크리시는 회복되었다. 심리치료사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는데, 윌리엄과 내가 상담을 받았던 그 끔찍한치료사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성공회 신부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말했다. "네가 크리시를 위해 올린 기도가 왜 그애에게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 P1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월

1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

집에 돌아오니 언니의 방문 앞에 이런 글귀가쓰인 진노랑 포스트잇이 떨어져 있었다. 어쩌다여기까지 굴러온 모양이다. 누군가 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구나. 안도하는 밤. 어쩌면 언니가쓴 소설의 한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문틈 새로는작은 빛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포스트잇을 주워언니의 방문에 다시 붙였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겉모습:
최근에 윌리엄의 실험실 조교가 윌리엄을 ‘아인슈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윌리엄은 그걸 정말로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윌리엄이 아인슈타인처럼 생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않지만, 그 젊은 여자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알 것 같다. 윌리엄의콧수염은 회색이 섞인 흰색으로 풍성하지만 잘 손질되어 있고,머리칼도 숱이 많고 흰색이다. 커트를 했는데, 일부 머리칼은 삐죽삐죽 뻗쳤다. 그는 키가 크고 옷을 아주 잘 입는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은 묘하게 광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윌리엄은 그렇지 않다. 윌리엄의 얼굴에는 보통 유쾌한 표정이 고집스럽고 폐쇄적으로 떠올라 있지만, 아주 드물게 한 번씩은 고개를뒤로 젖히고 진짜로 껄껄 웃는다. 나는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의 눈은 갈색이고 한결같이 크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은 뒤에도 큰 눈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윌리엄은 그렇다. - P11

그러다 어느순간 윌리엄이 나를 쳐다보더니 "버튼,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있어" 하고 말했다. 그가 몸을 잠시 앞으로 숙였다. "요즘 한밤중에 끔찍한 공포를 느껴.
윌리엄이 나를 과거의 애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그가 이 순간 여기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그는 그렇지 않을 때가많기에 나는 윌리엄이 그렇게 부르면 늘 가슴이 뭉클하다.
내가 말했다. "악몽을 꾼다는 거야?"
그는 내 말을 생각해보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대답했다. "아니. 깨어 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 어둠 속에서뭔가가 나를 찾아와." 그가 덧붙였다. "이런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정말 무서워, 루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서워."
윌리엄은 다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 P17

"필" 내가 말했다. "이것만 물어볼게. 요즘은 밤에 어때? 그러니까, 당신이 느낀다던 악몽 같은 공포 말이야."
그리고 윌리엄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것이 그가 내게 전화한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 루시." 그가 말했다. "지난밤에도 그랬어-새벽 세시쯤이었을 거야. 캐서린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말로 이상했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캐서린이 거기 서성이고 있는 것 같았어." 윌리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약을 먹어야 할까봐. 정말로 점점 더 힘들어져." 그가 덧붙였다. "캐서린이 나하고 같이 있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캐서린의 존재감이 느껴져. 그건・・・그건 정말 좋지 않아, 루시."
"오 필리." 내가 말했다. "어쩜 좋아. 정말 힘들겠다."
우리는 잠시 좀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전화를 끊었다. - P43

내 남편은 그해 이른 여름에 병에 걸렸고, 11월에 죽었다. 그결혼이 윌리엄과의 결혼과는 아주 달랐다는 점 외에는 그것이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내 남편의 이름은 데이비드에이브럼슨이었고, 그는-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그였다! 우리는 우리는 정말로서로에게 잘 맞는 상대였고, 이런 표현은 정말로 진부한것 같지만-오, 지금은 더 말할 수 없다. - P45

도시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열린 데이비드의 장례식-당시에도, 지금도 내게는 흐릿할 뿐이다-에서 베카가 내게 속삭인 말이 기억난다. "아빠도 여기 와서 같이 앉고 싶어했어요.‘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그애를 돌아보며 물었고, 그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불쌍한 윌리엄. - P47

그렇게 새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소 빠르게 연이어서, 윌리엄에게 두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먼저 몇 가지 더 말해두
겠다. - P48

나는 눈알을 굴렸고, 물론 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오 필, 제발 그만. 출생증명서를 조작하진 않아. 캐서린은 아이를 낳았던 거야!"
"좀더 조사해봐야겠어." 윌리엄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소리 내서 말했다. "이 바보야. 캐서린은 아이를 하나 더낳았다니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묘하게 말이 되는 것 같았다. - P71

우리는 그날 밤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스토랑은 오래되고 편안해 보이는 곳이었고 연중 그 시기에는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어서, 우리는 안쪽 깊숙이 들어가 앉아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영 착잡했다. 한때 남편이었던 이 남자 때문에 영착잡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에스텔과브리짓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 딸들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다. 그는 에스텔이 떠난 것을 크리시와 베카에게 자기가 직접 알려야 하는지 물었고,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윌리엄이 빵 한 조각을 집으면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캐서린이 낳은 아이가 있었어" 하고 말했고, 나는 "그건 알아"
하고 답했다. - P93

내가 그 자리에서 함께 어울리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운일이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한순간 같았고, 우리 넷은 가족이었을 때 만들어진 지난날의리듬 속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이것도 내가 하려는 말의 일부다. 나머지 세 사람도 그런 것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럴 수 있는지 놀라웠다. 나는 세사람 모두를 보았고, 그들의 얼굴은 행복에 젖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 이혼한 부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이 쉬운건 아닐텐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편으론 부럽네. 만약 남편과 이혼했다고 가정해봐도 ...
아이들과 함께 만난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와 감정은 가지지 못할거란걸 확실히 알겠다.^^ - P1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