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0년대 10 년 동안 젠더 구분을 허무는 소송이 잇달아 제기되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 때문이 아니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움직였고, 법원은 반응하는 기관이다. 법원은 길을 이끌지는 못하지만 변화의 방향을 가속할 수는 있다. ㅡ2016년 9월 14일, 기업법률고문협회 (99쪽)



그러니까 말이다. "법원이 길을 이끌지는 못해도 변화의 방향을 가속할 수는 있다"는 생각을 이미 대법관이 되었던 1970년대에 했었고, 그러한 신념을 판결에 적극 도입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을 읽다 갑자기 생각하게 된건데, 우리나라의 법원은 국민의 법 감정에 맞추기는 힘들다 해도 반응은 좀 했으면 싶을 때가 요 근래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제발 잘 따라오기라도 했으면 싶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어제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어야지 했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판결이 여럿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미국 페미니스트 법과 관련된 사건을 계속 접하다 보니 익숙한 사건명이 눈에 들어오고 두 권의 책에서 자꾸 보게 되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반복 학습하는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2. 

리드 (대 리드) 사건에서 문제가 된 아이다호주 법은 유산을 "관리할 자격이 동등하게 주어진" 사람 중에서 "남성을 여성보다 선호해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비극적 상황에서 10 대 아들을 잃은 샐리 리드는 자신이 아들의 유산 관리인으로 지정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들의 친부가(부부는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뒤늦게 신청서를 냈음에도 아이다호 법원이 남성을 선호하는 주 법에 따라 친부를 유산 관리인으로 결정하자 샐리는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이다호주 법이 법의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샐리 리드에게서 박탈했다고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순간, 대법원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ㅡ2002년, <예일대 법과 페미니즘 저널>서문 (97쪽)


샐리 리드 사건, 그것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만장일치 결정이었고 대법원이 법 속에 존재하는 젠더 구분을 위헌으로 판단한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ㅡ2016년 9월 7일, 조지타운대학교 법률센터,  리드 대 리드 사건에 대해 (97쪽)



헌법상 평등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이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다(similarly situated)"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므로 WRP(여성 권리 프로젝트 Women's Rights Project)는 법적 관점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1971년 Reed v. Reed(리드 대 리드) 사건에서 WRP는 유언 집행인의 자격과 관련하여 남녀는 아무런 차이도 없으므로 유언 집행인 후보 간 언제나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하도록 정한 법률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30쪽)



리드 대 리드 사건에 대한 글은 『긴즈버그의 말』 말미에 나온 연보 및 주요사건에 또 나온다.

이 정도면 양성평등을 향한  발걸음의 첫 판결이었던 리드 대 리드 사건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리드 대 리드 사건의 판결에서 대법관들이 사건을 심리하는 동안 읽을 수 있게 샐리 리드의 변론 취지서를 작성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 젠더 차별에 맞서 싸우는 동안 이 사건을 판례로 활용한다.




3.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변론 취지서를 타이핑해주는, 일을 아주 잘하는 비서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타이핑하다 보니 온통 '섹스sex'라는 단어예요. 판사님들에게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그 단어가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그거는 아니지요? 그러니까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시는 게 어때요? 문법책에 나오는 근사한 단어잖아요. 연상 작용으로 정신이 산만해지지도 않을 거고요."(94쪽)



재미있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하고 시의 적절한 멋진 표현을 추천해주는 유능한 비서도 멋져서 기분 좋게 웃었다. 설마 이 비서 당연히 여자겠지!  분명히 그럴거야!



4.

이 밖에도 연방정부 대 버지니아(1996), 그리고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1973) 사건도 양성평등과 관련 있는 판결이었다.

연방정부 대 버지니아 사건 : 미국 연방 정부의 명문 주립대학인 버지니아 군사대학교가 여성 지원자를 받아야 한다면서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낸 사건이었는데, 긴즈버그가 작성한 판결문은 법 앞에 평등을 주장하며 평생을 싸워온 긴즈버그  경력의 최정점으로 평가 받는다.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의 판결 : 여군인 샤론 프론티에로는 남편이 피부양자 혜택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군인의 아내나 부부 수입의 절반 이하를 버는 남편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대법원에서 변론한 첫 사건으로, 긴즈버그는 피부양자 혜택과 관련된 군대의 법령이 부당하게 임금노동자로서의 여성을 차별한다면서 수정 헌법 제 5조의 적법절차 조항을 위배한다고 주장한다. 대법원은 긴즈버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군 정책에 존재하는 성별에 근거한 구분은 젠더 차별을 인지하고 제거하기 위한 엄격한 검토 기준을 필요로 한다고 결정한다.(긴즈버그의 말, 172~173쪽) 



Rrontiero v. Richardson(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에서 WRP는 군에 소속된 여성은 군에 소속된 남성과 동등한 가족 복지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정 조언자(amicus bfief) 의견을 제출했다. 이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은 군에 복무하는 남성의 아내는 모두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추정하면서 반대로 군에 복무하는 여성의 남편에 대해서는 같은 추정을 적용하지 않는 군의 가족복지제도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브레넌 대법관은 "미국은 불행히도 길고 긴 성차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이를 '낭만적 후견주의(romantic paternalism)'로 합리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여성들을 꽃가마에 태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새장 속에 가두는 것이다"라고 썼다.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30~31쪽) 



2015년 진행되었던 오버게펠 대 호지스Obergefell v. Hodges 판결은 동성 커플의 결혼을 금지한 각 주의 법이 평등보호조항에 위배된다고 보았고 동성커플의 결혼을 인정한다. 긴즈버그는 다수 의견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게이와 레래즈비언에게도 평등한 권리와 존엄을 인정한 기념비적인 사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반대 진영에서도 "혼인 허가서 발급을 거부하거나, 공무원이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 허가서 발급 업무에서 회피하 수 있는 내용의 주 법률을 제정하거나, 공공시설차별금지법에 저촉되지 않고 동성커플에게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방식을 인터넷에 공유하는 등 연방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다."(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242쪽) 




이러한 판결이나 법의 이론들을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다시 읽기 하다 보니 뭔가 너무 재미있단 생각이 든다.  이다혜 기자가 쓴 해제를 보니까 긴즈버그가 쓴 '변론'과 대법관으로 일하며 쓴 '반대의견서'의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어보기를 권하길래 그렇게 해보고 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목소리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세상을 바꾼 언어들을 말하고 들어보기를 원한다. 한국은 미국만큼이나 더 나아져야 할 여지가 많은 나라이고, 이상하고 불평등한 듯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헷갈리던 개념을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말은 힘이 세다...."(이다혜 기자의 해제의 말 중에서)



세상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여자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부러우면서도 자랑스럽고 이런 글들을 읽는 나 자신이 너무 좋다....힝....



이 책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를 계속 가지고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나는 오늘 책을 반납해야 한다...ㅠ.ㅠ  벌써 이틀이나 늦어버렸고 오후엔 상갓집 갔다 장지까지 갔다와야 하니까 반납은 하염없이 늦어지겠지...  반납하고 나면 『긴즈버그의 말』 읽다 익숙한 사건명이 나올 때마다 아쉬울 거 같지만... 어쩔 수 없다고 나를 설득해 버렸다.  왜냐하면 책값의 압박에서 헤어나올 수 없고... 난 또 오늘 한국문학 2 권과 고예스카스의 2LP를 주문해버렸기 때문에...  고예스카스 들으면서 책 읽으면 또 죽이겠지!  심지어 백건우 연주인데.. 말해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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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03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긴즈버그의 말> 펼쳤다가 두 장 읽고 덮었거든요. 인터뷰 … 가 아니더라고요? 당황했어요. 그렇지만 은하수 님 재미있게 읽으신 걸 보니 저도 다시 도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빠샤!!

은하수 2023-07-03 13:14   좋아요 1 | URL
처음에만 그래요~~
뒤로 갈수록 공감되면서 아는 내용이 나오니 급 재밌어졌어요!
꼭 읽으세요~~^^

유수 2023-07-03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긴즈버그의 말>만 읽었을 때는 뿌옇던 것들이 <긴즈버그의 차별 정의>와 같이 읽었을 때 구체화되고 법리이해나 제 상식의 구멍들이 조금씩 채워지면서 독서가 재밌어지더라고요. 은하수님 이 리뷰를 읽으니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도 언젠가는 읽어보리라~ 생각이 듭니다! 교차해서 읽으신 기록 남겨주셔서 잘 보고 가요.

은하수 2023-07-03 13:18   좋아요 2 | URL
<긴즈버그의 말>만 읽을 땐 잘 이해 안됐을거 같아요
그래서 ‘말‘만 있어서 첨엔 당황스러웠거든요. 다행히 뒤로 갈수록 아는 판결이 나오고 그러면서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와 비교하니 급 재밌어졌거든요~~ 저도 <긴즈버그의 차별 정리> 찾아봐야겠어요~~^^*

책읽는나무 2023-07-03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저도 이 두 권을 다 읽었습니다.^^
<긴즈버그의 말> 재밌었어요.
은하수 님 리뷰 읽으니 다는 기억나진 않아도 저도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를 읽으면서 줄곧 긴즈버그 대법관의 판례나 노력했던 내용들이 좀 떠올랐던 것 같아요.^^

은하수 2023-07-03 20:56   좋아요 2 | URL
나무님 읽으신거 저도 봤죠~~^^
모든 판결이나 사건이 다 중복되는건 아녀도 아는 내용이 또 반복적으로 나오니까 재밌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긴즈버그의 말> 재밌게 읽고 있답니다. 두 책이 다 넘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