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깊은 밤, 가끔 누워서 창문으로 스며드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모든 게 불분명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살아온 절반의 인생도 흐릿해질 때가 많다. 하물며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란. - P17
나도 어려서 그 일을 모두 봤다. 어머니가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의 바로 그 문장을 쓸 때, 비록 자기는 울지 않은 것처럼 짐짓 아버지 얘기만 했지만 이덕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덕무의 어머니 반남박씨가 돌아가신 것은 이덕무의 나이 스물세살이 되던 1765년의 일이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수질상복을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과 요대를 풀지 않고 조석으로 슬피 우니 이웃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귀를 가렸다고 연암 박지원은 벗 이덕무를 기리는 글에 썼다. - P22
하지만 집에 돌아와 다시 앉혔더니 고분고분히 앉는 것이었다. 조금 달려보니 소리를 지르고 연신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로와 부딪히는 바람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내친 김에멀리까지. 그러니까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논둑길까지 달렸다.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 첫번째 여름을 열무는 누워서 보냈고 두번째 여름에는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초록색 그늘 아래를 달렸다. 세번째 여름은 또 어떨 것인가? 지금 내가 가진 기대 중 가장 큰 기대는 그런 모습이었다. - P25
고향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 나 역시 그처럼유배됐다고 생각했다. 매일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출퇴근하다보니 바닷가에 나와 앉아 물을 그리워하는 눈을 거둬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현산어보』를 쓰는 정약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현산어보』란, 그 책에 등장하는 각종 물고기들의 생김새와 생태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뭘 그리워했던 것일까? 나처럼 화려한 서울의 일을? 혹은 앞으로 자신이 할 일들을? 혹시흑산도에 갇힌 몸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신의 영혼을? - P27
유배 16년 동안, 겨우 몇 권의 책만 낸 정약전 그가 뭍이 아니라 아우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물고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집을 떠나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사랑이 내리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 P29
봄을 기다릴 때, 내가 읽는 책들은 주로 시집들이다. 봄에 읽는시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당시다. 시인들이란 모자란 것, 짧은 것, 작은 것들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니 계절로는 덧없이 지나가는 봄과 가을을 지켜보는 눈이 남다르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가을에 당시를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을에는 뭔가를기다릴 일이 없으니까 책을 들여다보는 일은 없는 것이다. 당시라면 내게는 임창순 선생의 [당시정해]다. 소리내 읽다 보면 입에서 향기가 날 것 같다. 세상 살아가는 데 그런 향기 입에 담고 친구와 술 마시는 일보다 윗길인 일이 없다. - P35
아마도 같은 해 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소설가 김소진 선배가 암으로 죽었으니 문상가자고 말했다. 절대로 가면 안돼!‘라는 문장이 온몸으로 육박해왔다. 왜 가면 안되는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그 느낌에 반항하듯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 책 날개에 실린 사진을 확대해놓은 영정에 두 번 절한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간 앓았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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