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는 매년 12월 12일에 응모를 통해 '올해의 한자'를 선정 발표한다. ‘올해의 한자’가 결정되면 교토에 있는 유명사찰인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주지스님이 직접 대형붓으로 가로 1.3m 세로 1.5m 정도 크기의 종이에 ‘올해 한 해를 나타내는 한자’를 써서 본당에 봉납하는 행사를 갖는다. 이 행사는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한자를 상용문자로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한자보다 외국어를 일본식으로 바꾸어 사용하기 때문에 한자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한자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매년 12월 12일을 한자의 날로 정하여 이런 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를 본받았는지 어쨋는지 주간 교수신문에서 2001년도부터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 발표하고 있고 또 2005년도부터인가는 ‘새해 희망의 사자성어’라는 것도 선정하고 있다. 각종 한자관련협회에서 시행하는 한자능력검정시험이 대단히 인기다. 나도 작년에 3개월 공부하고 1급 시험 치러 갔는데 보기좋게 낙방했다. 무척 어렵다. 한자 조금 안다고 쉽게 생각했고 덤볐다가는 코깨지 십상이고 잘못하면 코피가 터지는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머리 까만 어린 학생들이 1급에 소홀찮게 합격하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자나 사자성어를 무슨 영어 단어 외우듯이 줄줄 외워서 공부하는 데는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다. 특히 사자성어는 고전속에서 읽어야 그 의미와 뜻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동양 고전에 대한 폭넓은 독서가 한자 이해의 깊이를 더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 선정 방식에서도 국민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일본은 달랑 한자 한개를 선정하는 방식을 택한 반면 우리는 사자성어를 선택했다. 우리 씨름은 삼판양승제이지만 그들의 스모는 한판승부다. 과거의 정치적인 싸움도 우리는 상소를 올리고 비답을 내리고 주리를 틀어라 살을 지지고, 위리안치니 중도부처니 귀양도 여러 종류고 어쩌고 구구절절 복잡하다. 일본은 대충 할복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글과 칼의 차이인 것 같다. 우리는 글로 하고 그들은 칼로 한다. 글로는 일도양단이 안되지만 칼로는 쾌도난마가 가능한 것이다.
올해의 한자로 같은 한자가 두 번 선정된 경우는 없지만 2위 이하도 모두 포함해서 볼 때는 난(亂), 식(食), 진(震), 핵(核), 재(災), 戰(전) 등이 2번 이상 지목되었다. 일본은 지진이 불쑥불쑥 자주 일어나고 - 그것도 큰 지진이 - 화산도 가끔 들썩들썩한다. 난(亂), 진(震), 재(災) 등이 자주 뽑힌 까닭이다. 좋은 의미의 한자보다는 나쁜 의미가 글자가 많이 선정된 것 같다. 아마도 가슴 아픈 사건은 오래 가슴에 남아있고 기쁘고 즐거운 일들은 금새 잊어 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피부에 새겨진 상처는 언젠가는 아물고 굳어지기 마련이지만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는 법이다. 좋은 일들도 자주 돌이켜 생각해보고 웃고 흐뭇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한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이중적이 아니라 다중적이라 할 만하다. 조금 복잡하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따른 피해의식(저놈들이 언제 또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지 모른다는)과 소중화의식에 바탕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쪽발이 넘들은 옛날에 불알 두쪽만 달랑거리며 나다니는 야만인이었는데 우리가 문화를 전파해서 다소나마 예의도 차리며 인간답게 살게 되었다든지 일본 천황은 백제인 이라든지), 일본의 경제적 발전에 대한 선망과 우리가 영원히 일본을 따라잡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우리가 일본을 이긴 건 이순신 이후로는 축구와 야구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 일본전 축구 혹은 야구에는 굉장히 열광한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혼동하기도 하고 어느날 갑자기 일본이 대지진으로 태평양에 수몰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일본 침몰을 이야기하니 문득 생각나는데 일전에 이른바 강호 동양학을 표방하는 조용헌의 《조용헌 살롱》이라는 책을 읽다가 당대의 고승인 탄허스님이 일본침몰을 예언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탄허같은 고승대덕이 어찌 그러 혹세무민하는 말씀을 하셨는지 필자같은 아둔한 중생은 모두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일본 침몰》이라는 일본 영화도 있었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은 수억년이 흐른 뒤에야 일본 아니라 중국대륙이라도 언제 수장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말하자면 뭐든지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경우는 스포츠 경기에서 다른 나라에게는 져도 큰 문제가 없지만 대 일본전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한국은 많은 나라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일본을 경쟁상대로 여기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쟁상대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같은 빅 세븐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조국 대한민국은 끼워주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도 대 한국전 스포츠 경기의 경우 경기중에는 물론 열렬히 응원하고 흥분하기도 하지만 그때 뿐이다. 경기가 끝나면 그만인 것이다. 반면 우리는 대 일본전에 패했을 때는 머리풀고 석고대죄라도 해야하는 분위기다. 손자병법에도 나오듯이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했으니 무턱대고 덤벼드는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경제 등 여러 방면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극일을 위해서는 친일부터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