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밥  식  

오사카 교외 사카이 지역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집단 식중독 사태'가 발생했다. 식중독의 원인은 병원성 대장균인 O-157균으로 주로 장출혈 설사, 복통 등 식중독 증상을 일으킨다.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무려 9,500여 명의 초등학생이 식중독을 일으키고 10여명이 숨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학교급식은 완전 탈바꿈되어 급식의 질이 수업의 질을 넘어선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본 학교급식에는 두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냉동식품 불가이고 다른 하나는 당일 조리의 원칙이다. 

O-157은 1982년 미국에서 햄버거에 의한 식중독 사건으로 처음 학계에 보고되었다. 안과의사 출신인 로빈쿡은 이 사건을 소재로 의학 추리소설 《독, O-157》을 쓰기도 했다. 이 소설은 전형적 미국 음식인 햄버거에 들어가는 쇠고기를 O-157균의 감염 매개체로 설정하고, 균에 감염된 한 아이의 죽음을 중심으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는 쇠고기 업계와 이윤추구에만 급급한 병원의 비합리적 경영 현실을 파헤치면서, O-157균이 어쩌면 인간의 방만과 부주의로 생겨난 재앙일지 모른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알라딘>에 소개되어 있다. 한국인은 유난히 O-157균이나 이질균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당시 O-157균이 전국적으로 퍼졌을 때에도 제일교포가 감염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치, 마늘, 고추 등 매운 음식에 든 항균성분이 살균작용을 한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가설이다.  

3월에는 영국에서 소의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전해지며 시작된 광우병 파동은 영국산 쇠고기의 최대수입지역인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유럽연합(EU)은 영국산 쇠고기 수입금지조치를 취한 뒤 영국에 대해 소의 대량도살을 요구, 영국과 외교마찰을 빚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은 7월부터 조어도(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열도) 영유권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본 우익단체가 현지에 새 등대를 설치함으로써 불붙은 이 분쟁은 대만, 홍콩, 마카오도 가세했다.  

페루의 좌익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소속 무장 게릴라들이 12월17일 리마주재 일본대사관에 난입, 이원영 한국대사 등 각국 외교관과 페루 정치인 기업가 등 400여명을 억류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게릴라들은 후지모리 대통령의 좌익게릴라에 대한 강경책에 항의, 투옥된 조직원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인질극은 126일을 끌어오다가 1997년 4월 22일 페루 특수부대원들의 기습작전으로 인질범 14명은 모두 사살되고 남아있던 인질 72명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구출됐다. 일부 인질들의 증언에 따르면 상황이 그렇게 살벌하지는 않았을 뿐만아니라, 인질범들의 교육수준이 상당해서 법률과 요리 등 다양한 주제로 자주 토론을 벌이기도 했으며 인질범들이 인질의 교양에 점차 동화되더니 가족과의 편지교환, 미식의식 등도 허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인질이 인질범의 상태에 동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칭되는 용어로 ‘리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거사를 도모함에 있어서는 역시 인정(人情)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물론 인질극이 성공해서도 안되겠고, 인질극이 성공한 사례도 극히 드물지만 어쨌든 자신의 신념하에(그 신념이라는 것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하고를 떠나서 말이다) 목숨을 걸고 거사를 감행한 인질범의 입장에서 보자면 리마 인질극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리마증후군 때문일 것이다. 인질들에 동화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의 여러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인질의 요청으로 들어온 보온병 등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사관 내부사정을 훤히 파악한 진압군이 방심하고 해이해진 인질범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덕분에 인질극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는 ‘강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후지모리 역시 숱한 부정을 저지르면서 장기집권을 도모하다가 결국 실각했다. 집권 10년만이었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2000년 일본으로 도주하여 일본에서 5년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5년에 페루를 들어가기 위해 칠레 입국을 시도하다가 칠레 경찰에 체포되었다. 2009년에 페루 특별재판부는 인권침해 등의 혐의로 그에게 2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인생사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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