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뭐니뭐니해도 역시 고사성어 정치의 진정한 달인은 김종필이다. 영원한 2인자로 오랜 정치여정 동안 파란곡절의 굽이굽이마다 시의적절한 사자성어로 혹은 시대를 평하고 혹은 울분을 토하고 혹은 자신의 심정을 애둘러 전하기도 했다.   

우선 신년휘호를 살펴본다.
1994년 상선여수(上善如水·물과 같이 순리에 따라 산다)
1995년 종용유상(從容有常·무슨 일이 있어도 어긋나지 않게 산다)’
1996년 부대심청한(不對心淸閑:대꾸하지 않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1997년 줄탁동기((啐啄同機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설명)
1998년 사유무애(思惟無涯:생각하는데 막힘이 없다),
1999년 일상사무사(日常思無邪:매일 나쁜 생각을 버려야 한다),
2000년 양양천양 유유고금(洋洋天壤 悠悠古今:우주는 한없이 넓고 역사는 아득히 멀다),
2001년 조반역리(造反逆理:뒤바꾸는 것은 세상이치를 거역하는 것),
2002년 이화위존(以和爲尊:화합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다).  

JP가 선정한 고사성어에는 운치와 멋이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좋아 요즘 개그맨의 유행어 못지않게 히트친 사례도 많았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시 JP는 "한국에는 지금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꽃이 피어날 봄인지 겨울 속으로 돌아갈 봄인지 알 수 없다. 춘래불사춘의 정국이다"라고 했다. 요즘도 가끔 들먹이는 유명한 춘래불사춘의 유래다.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결별하며 민자당을 탈당할 때에는 '토사구팽(兎死拘烹: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삶는다.)' 당했다고 말해 인구에 회자된 경우도 있다. 일반인들도 누구로부터 조금 섭섭한 일을 당하면 “팽”당했다“ 고 줄여서 쓰기도 했다. 내각제 개헌을 빌미로 삼당합당후 내각제 개헌이 좌절되자 ‘소이부답’으로 심경을 나타내기도 했다. 토사구팽을 말할 때는 분노와 울분이 있었지만 소이부답에 와서는 체념과 초탈의 감상이 느껴진다.  

3김 중에서 줄기차게‘대도무문(大道無門)’만 열심히 썻던 YS나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천애인(敬天愛人)’ 등 교과서적인 문구만 선호했던 DJ에 비하자면 JP의 사자성어에는 확실히 글하는 선비의 풍류와 멋이 있었고 여운과 깊이가 있었다. DJ도 박학다식이지만 아무래도 인문학적인 특히 한학적인 소양에 있어서는 역시 JP만한 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JP는 5살 때부터 부여 서당에서 천자문으로 기초부터 익혔다고 한다.여기에 인전 신덕희에게 배운 필법을 더했고 일중 김충현,여초 김응현 등 대가들과의 친분도 있었다. JP는 예서를 즐기는데 굵고 반듯한 서체인 만큼 강한 힘이 느껴진다는 평이다.80년 신군부에 의해 연금당했을 때는 붓을 잡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적소의 긴밤을 버티기에는 역시 독서와 서예. 즐겨 쓰는 글씨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5·16 이후 좌우명으로 삼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도 자주 쓴다.술집에서 기분이 좋으면 치마폭에 글씨를 써주는 멋을 부리기도 하고 친한 기자에게는 일필위공(一筆爲共)이라는 휘호를 선물하기도 했다 한다.JP는 대표적인 한자병용론자다.총리 시절 카드형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질 때 이름에 한글만 사용키로 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한자를 병용토록 지시한 일화는 유명하다.  

JP가 1997년에 쓴 줄탁동기(啐啄同機)가 십년지나 다시 등장했다.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도 하는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가 신년휘호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JP는 세상 일에는 때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했지만  2008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영자대상 사이트인 SERICEO가 국내 CEO 307명을 상대로 불황대처를 위한 사자성어를 조사한 결과 줄탁동시란 응답이 21.6%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알을 쪼아야 하듯 기업이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사 간 이해와 협조가 최우선이다.’는 해석이다.   

‘줄탁동시’란 중국 송대 선종(禪宗)의 화두를 모은 공안집(公案集)인 ‘벽암록’에 나오는 화두다.‘줄탁동기( 啄同機)’라고도 한다. 알 속의 병아리가 밖으로 나가려고 안에서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줄’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이에 맞춰 밖에서 껍질을 깨주는 것을 ‘탁’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아들은 수레를 앞에서 끌고 아버지는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는 형국이라 할까 뭐 그런 의미다. 어려운 한자인 탓인지 일상에서 잘 안 쓰이는 사자성어다.  

지난날 3김의 영토는 그리 무성하고 울창했건만 지금은 그 언저리 어디에 쓸쓸한 풀 몇 포기만 남아 있는 듯하다. 3김시대. 무슨 삼국시대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 말투가 마치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무상함을 안타까워 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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