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은 아내가 야심차게 백선생표 뽁음밥인지 뭔지를 만들었다. 나는 그냥 그저 그런데 혜림씨는 입맛에 딱!!!! 맞는 모양이다. “엄마!! 정말, 정말 맛있어요”를 연발한다.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우쭐해져서는 “고래?? 그럼 또 만들어줄게..호호호... 역시 백선생이 뭐가 있긴 있어...” 어쩌고 하며 좋아한다. 소생은 백선생 뽁음밥을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얻어먹는 주제라 그냥 가만 있었다. 이렇게 분위기 좋을 때는 개인적인 소수의견을 표명하면 안된다. 나도 이제 그정도는 안다.
아내는 조리원 계 모임이 있어 아침을 먹고는 혜림씨와 바로 집을 나가셨다. 나는 어제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처자가 집 나간 이참에 그동안 못본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다. 두 편을 골랐다. 하루에 두편을 보기는 처음이다. 외화와 방화 사이좋게 각 한편씩!! 선정된 영화는 〈인턴〉과 〈사도〉다. 글자 수가 두자씩이고 하나는 영어 하나는 한문, 한편은 현대물 한편은 역사물, 짝이 짝짝 맞다. 쿵짝짝~ 쿵짝짝~ 뭐 이런 것까지 다 신경쓴 것은 아니지만 선정하고 보니 그렇다. 탁월한 선택인 모양이다.
이건 본론과는 뭐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방화라고 하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적어본다. 방화란 나라 방(邦)자를 써서 방화(邦畵)인데....불싸지르는 방화(放火)가 아니다. 옛날에는 방화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같은 어른들이 애들 몰래보는 성인영화를 방화라고 하는 줄 알았다. ‘국산영화’ 혹은 ‘국내영화’라고 하면 무슨 쇠고기 원산지 표시 같아 좀 이상하긴 하다. 글자 수로는 외화에 방화가 딱 어울리긴 한다.
각설하고(소생은 항상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해서 문제다. 핵심이 없고 맥락을 찾지 못한다. 한창 이야기하다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린다. 한심하다.) 〈인턴〉은 짐작했듯이 무난한 휴먼드라마다. 인터넷 통신판매로 크게 성공한 젊은 여성이 정부 정책상 어쩔 수 없이 늙은 인턴을 채용한다. 처음에는 퇴물 늙은이 취급하다가 점차 그 경륜에 도움을 받아가면서 쿵짝이 맞아간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약간 지루한 면도 있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젊은 여사장에게는 어린 딸과 전업 남편이 있다.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영화는 공식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 결말이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만족하니 다행이다. 물론 영화 안에서 이야기지만...
앤 헤서웨이 출연하는 영화 중에 소생이 본 영화는 〈인터스텔라〉와 이 영화 밖에 없다. 헤서웨이는 뇌쇄적인 미인도 쭉빵의 육감적인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눈길을 끄는 용모다. 약간 처졌지만 큰 눈과 엄청나게 큰 입이 매력적이다. 웃을 때는 정말 입이 귀에 걸린다.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 자연스럽고 또 아름답다.......뭐랄까 하여튼 해서웨이는 눈과 입으로 연기하는 배우같다. 슬픔과 기쁨, 놀람 등 모든 감정을 눈과 입으로 표현한다. 헤서웨이의 눈과 입만 쳐다보다 보니 어느듯 영화가 끝나버렸다. 〈인터스텔라〉에서 이름모를 행성에 홀로 남겨진 헤서웨이의 그 서늘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아아!!!! 나라도 어떻게 로켓타고 가서 빨리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눈빛이었다.
다음은 사도 이야기. 사도세자에 대한 다소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드라마나 소설도 많다. 원래는 영민하고 뛰어난 재목(백성을 내 몸같이 생각하고 언월도를 휘두르는 무술에도 능한 분명히 성군이 되었을 그런) 이었는데, 권력에 눈이 먼 아비의 욕심과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사리사욕과 당리당략 뿐인 사대부들의 당쟁 틈바구니에서 안타깝게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다. 세자가 광증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등 해괴한 짓을 해서 결국은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한중록’의 기록은 노론 홍봉한의 여식인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당리당략을 대변하고 변명하기 위한 기록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꾸는 나라〉가 대표적이다. 예전에 이덕일의 책을 읽었을 때는 햐 이게 진실인가??? 이런 생각을 했다.
영화 〈사도〉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저런 신문기사나 인터넷의 책 소개 등을 보면 아비가 자식을 죽인 것은 비정하기는 하지만 자식이 이미 미쳐서 영 못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부가 아닌 임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한중록’은 승정원 일기나 왕조실록 등 여러 사료와 일치하는 점이 많아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걸 보니 이게 또 맞는 거 같다. 이덕일은 사학자이긴 하나 들에 있고, 정병설은 한중록을 깊이 연구하긴 했지만 국문학자다. 양측의 논리가 식민사관이니 친일사관이니 어쩌고 하는데까지 뻗어나간다.
문제 학생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 부모의 역할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 부모 밑에 자란 문제 학생이 모두 자살하거나 미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성장한 뒤에는 학생에게도 부모를 극복할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도저히 극복하지 못하여 심연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힘들게 극복하여 성취를 이루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평생을 상처와 싸우며 고단하게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책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비극은 모두의 잘못이고 모두의 책임이다. 말하자면 운명이다.
소생이 영화는 잘 모르지만 소생이 보기에〈사도〉는 꽤 잘 만든 영화다. “그렇다면 그 사유를 조목 조목 대보시오” 라고 한다면 소생 답변은 역시 궁색하다. “하여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유....” 라고 할밖에....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사극치고 ‘사도’처럼 칼싸움 안나오는 영화도 드물지 싶다. 영화의 처음과 중간에 등장하는 봉사가 까만 눈동자도 없는 허연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부르는 노래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강력했다. ‘옥추경’이라고 한다. 듣고 있자니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면서 몸에 소름이 돋는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다.
사도를 보면서 두 번 울었다. 어린 정조가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 그릇도 못 드린단 말입니까? 하는 대목에서 주책없이 눈물이 질질 흘렀다. 또 한 대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울긴 울었는데 왜 울었는지도 모르니 한심하다. 늙어서 눈물이 많아졌나....요즘 아내는 성격이 좀 괄괄해져서 한번씩 가차없이 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 그래놓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늙어서 남성호르몬이 분비되어 그러니 이해하라고 한다. 그러면 소생은 요즘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지 옛날 같으면 그냥 웃어넘길 소리에도 상처를 입는다. 늙으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