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있다.
p28. 김지하 선생을 추억한다.
"지하 선생의 담시 ‘오적’과 첫 시집 ‘황토’가 세상에 나온 것은 내가 사병으로 군복무를 할 때의 일이다.....‘황토’는 우리 부대에 유신체제를 홍보하러 나온 정훈장교의 가방 속에서 나왔다. 내가 그 책에서 눈길을 때지 못하자 장교는 그것을 내 책상머리에 놔두고는 다시는 찾지 않고 가바렸다. 나는 몸을 떨면서 지하 선생의 시를 읽었다."
소생이 고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80년대에는 김지하에 대한 뭐랄까 우상화 같은 것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풍문에 의하면 김지하가 정보국 요원들의 수배를 피해 도망다닐 때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번쩍번쩍 홍길동도 아니고 하여튼간에 그 사라짐과 나타남이 신출귀몰하였다는 둥 마치 지리산 빨치산 대장 이현상이 축지법을 쓴다는 등의 이야기와 비슷한 그런 이야기들이 횡횡했다.
더불어 학문적 깊이에 대한 경외도 있었다. 학계의 연로한 인사로부터 “젊은 사람이 언제 이렇게 한문 공부는 많이 했나?” 고 감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니 이것이 인사치례든 뭐든 김지하가 서른에 쓴 오적 같은 담시를 읽어보면 그것이 그리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이나 무심한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집에 있는 김지하의 시집 <황토>를 찬찬이 보고 있자니 문득 옛 가곡의 애잔한 곡조가 떠오른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라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료”
p.80 죽은 시인의 사회
"진이정 시인이 유명을 달리한 것은 지난 1993년의 일이다. 그는 출판사에서 편집중이던 자신의 첫 시집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폐결핵 말기 환자였던 시인은 변변하게 식사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의 유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연작이나 <아트만의 나날들><엘살롱 드 멕시코>같은 뛰어난 시편들은 그렇게 2000년대에 젊은 시인들이 벌인 새로운 서정시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견문이 일천한 불초한 소생은 역시 진이정 시인을 모르다. 알라딘에 검색을 해보니 요절시인 시전집 시리즈라는 것이 나온다. 김민부, 임홍재, 김만옥, 이경록, 이비호, 송유하, 김용직, 박석수, 원희석, 진이정 이렇게 10명이다. 부끄럽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소생이 아는 유일한 요절 시인 기형도는 없다. 그는 이미 전설의 문턱에 다가가 있기 때문인가.
시리즈의 10권이 진이정의 <나는 계집 호리는 주문을 연마하며 보냈다>라는 제목의 시집이다. 현재 절판이다. 정가는 11,000원인데 중고가 239,000원에 나와있다. 게다가 배송비도 2500원이다. 허허허. 혹시 중고책 주인이 이 시집 속에 정말로 계집 호리는 주문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설의 무공비급 규화보전을 익히는 자는 천하를 얻을 것이요, 계집호리는 주문을 연마한 자는 삼천궁녀를 거느릴 것이라. 뭐 그런....세계사에서 나온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역시 절판이다. 정가는 5500원인데 중고는 52,500원에 나와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본 진이정의 시 한편 소개한다.
<시인> - 진이정
시인이여,
토시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