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우리의‘ 모든 흐름이 자유로운 세계화와 ‘우리‘ 지리적 경제권을 등장시켰다. 그 바람에 국가간 금융 거래가 놀랍도록 빠르게 이루어지고, 무역과 투자가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며, 자본주의적 자유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는 둥의 말이 많이 나왔다. 고전적 냉전 군사기술의 산물인 인터넷으로 인해 1990년대부터 실시간의 통신, 가상공간의 거래, 데이터 전송이 가능해졌다. 기존의 (모든 것을 선악의 대결로 치환해 버렸던) 이분법적 지정학은 묘비명으로전락하는 신세가 되었고 "민주적 규범과 진보적 가치로 하나 된 온라인 커뮤니티의 힘으로, 전 세계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고삐가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EU(유럽연합)는 새 회원국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정부가 멕시코, 캐나다와 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메르코수르(Mercosur, 남부공동시장)가 새로운 무역 블록이 되면서 이전의 권위주의 군부정권들이 이제는 더 국경지대의 땅과 자원을 갖고 서로 다투지 않고 공동의 경제 미래를 열어갈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소련 이후의 러시아에 대해서도 불안감과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유럽은 에스토니아나 폴란드 같은 나라들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국으로 받아들여 추가적인 안전 보장을 받도록 했다. 폴란드는1999년 NATO에 가입한 데 이어 2004년 EU에 가입했다. NATO의 1949년 조약 제5조는 어느 회원국에 대한 공격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P11

9.11 의 유산은 계속해서 오늘날의 지정학에 대해 알려주고, 그것을 전 세계의 국경지대마다 울려 퍼지도록 한다.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진행한 ‘전쟁비용‘ 프로젝트는 2001~2009년 동안 미국이 테러 전쟁에 들인 돈을 6조 4천억 달러로 추산했다. 또 아프가니스탄, 예멘, 이라크 같은 곳에서 이 전쟁으로 빚어진 폭력에 직접 사망란 사람이 80만 명을 넘는다고도 보았다. 여기에 2천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이런 나라들에서 정치•경제•사회적 진동은 계속되고 있다.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파키스탄에서의 미군의 드론 공격이.큰 인명 손실과 분노를 불러올 때마다 국경은 침범된다. - P13

한편,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체첸, 크림, 조지아 일부를 각각 침공하고, 합병하고, 점령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대테러 전쟁의 와중에 많은 나라가 기회주의적으로 테러리즘과 제3자의 위협을 이용해먹었는데, 고질적인 자국의 지정학적 난제를 해결하고 어떻게든 군사전략적 우위를 점하려는 속내였다. 국경은 어디서는 터지고, 어디서는 꽁꽁 싸매졌다.
‘국경 개방‘은 안보 위협의 의미로 새로 인식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민주화 압력에 직면했던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과 다른 국경관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대규모 토착 무슬림 소수집단이 극단주의와 분리주의의 혐의를 뒤집어쓴 채 정부의 억제와 감시 아래 놓여야 했다. 1,100 만의 위구르인이 사는 중국 서북단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천연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몽골 사이의 전략적 요지임은 그냥 흘려버릴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자국의 틀을 깨는 어떤 시도도 단호히 막으려 했고, 위구르인은 그런 시도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러시아 정부도 분리주의자들의 땅이라고 선포한 체첸 같은 곳에서 전쟁을 벌였다.
미국이 일으킨 대테러 전쟁은 이들 두 나라에도 세계적으로팽배한 테러리즘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들의 영토 보존을 ‘위협‘하는 소수민족과 분리주의자들을 억압할 수 있겠다는 힌트를 주었다. - P14

국경 문제의 네 가지 추진력

지난 15년 동안 국경은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것은 군사주의, 테러, 기후변화, 이민 그리고 가장 최근의 팬데믹 등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국경 문제는 네 가지 추진력에 따라 움직인다. 제한하기(constriction), 확장하기(expansion), 따돌리기 (deflection), 내쫓기 (expul-sion)이다. 전 세계의 정부들도 적대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있어서 이민자나 난민에게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첫 번째는 제한하기. 외부자에 대한 적대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것이 특별한 까닭은 국내 기관, 공무원, 민간인이 한 팀이 되어 이 국경 문제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작용하고있기 때문이다. 인종과 주택 관련 차별은 이미 만연해 있다. 영국에서 택지 소유자는 셋집을 찾는 ‘불법 이민자‘를 내무부에 신고하지않으면 무거운 벌금을 물 수 있다. 대학의 입학사정관은 임용되기 전에 자신의 시민권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 - P16

 인도의 모디 정부는 개정된 시민법과 시민등록법을 통해 토착 주민 및 비힌두계 시민에게 ‘국경전쟁‘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민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며, 그들의 가진 것을 짜내는 일이 시민법 개악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이 모두가 ‘조국 인도‘를 지킨다는 이름으로이뤄진다.
제한하기는 법률-행정 체제에 그리고 일상생활에 적대적 환경을 구축한다는 뜻이다. 언제나 취업 비자와 그에 따르는 증빙 서류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부담을 크게 늘린다는뜻이다. 나이러 유발 데이비스(Nira Yuval Davis) 같은 사회학자들은이런 ‘내재화된 국경‘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그런 일과 행동이 최근 급속히 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식의 국경 만들기는 아웃소싱되기도 한다. 그래서 동료 시민들이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그들의 비자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하도록 만든다. 예술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제작자, 전직 국경수비대원, 이민자, 사회운동가들은 이렇게 적대적 환경에 내몰린 일상의 국경을 글과 다큐 영상으로 생생하게 전한다. 한편 특권층에게국경이란 그들의 삶에서 대체로 눈에 띄지 않으며, 단지 팬데믹, 사회혼란, 전쟁 등의 긴급 상황에만 겨우 인식될 뿐이다.
- P17

두번째는 확장하기..... EU에서 ‘경계지역‘은 자체적으로 1단계에서 3단계까지 구분해 놓은 EU 확장 개념의 한 단위다. 3단계가 경계지역으로, EU의국경들 그리고 그 국경의 25킬로미터 안쪽 지역에 국민의 절반이 사는 지역을 말한다. 이런 시스템은 언뜻 비정치적으로 보이는데,
EU가 스스로 ‘우호적 국가들의 국경 없는 블록‘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은 국경에 관한 생각이 이와 다르다. 미국-멕시코,
인도-파키스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계지대는 ‘국경 이야기‘
를 찾는 리포터들과 예술가들에게 늘 풍부한 ‘꺼리‘를 제공한다. 크게 보아, 이쪽에 관심이 한껏 높아진 까닭은 그런 국경이 몰려드는 이민 희망자들을 막고 있기 때문이거나, 지정학적 긴장이 생생히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민자를 환영하고, 일부에서는 이민자를 환영한다. - P18

다음으로는 ‘따돌리기‘가 있다. 이는 이민자들이 농업, 요양산업, 식품업 등 수많은 분야에서 그림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슈를 피하기 위해 국경을 이용하는 행태를 말한다. 정치적 좌파는 국경과 관련된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는 한편, 정치적 우파는 다른 곳에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국경이 필수라고 본다. 양쪽 다 국경과 통제 체제의 법적·도덕적 ·경제적 문제를 따진다. 미국을 비롯한 구미의 많은 나라에서 이민 노동자는 사회 각 분야의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 나라에서 이민자가 피난처를 찾기 훨씬 어렵게 만드는 여러 조치가 실행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지도자들은 이민자, 피난민, 난민을 굳이 엄격히 구분지으려 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앙아메리카 난민이 난민 인정을 받기 전까지 때로는 몇 달씩이나 멕시코에 남아 있도록 강제했다. 과테말라같은 다른 나라들은 ‘안전한 제3국‘을 선언하는데, 이민자가 그 나라로 들어가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와 새 이민 협정을 맺었는데(온두라스, 엘살바도르는 1969년의 ‘축구 전쟁‘에서 볼 수 있듯 국경분쟁과 이민자 문제로 서로 으르렁대기로 유명한데), 그들 나라에 미국이 무역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는 대가에 따른 것이었다. 멕시코 역시 북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더 잘 차단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 P20

마지막으로는 ‘내쫓기‘가 있다. 최근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토를 지키고, 내국인과 외국인을 감시하며,
국경지대에 배치 인력을 늘리는 조치를 해왔다. 이런 ‘국경‘을 둘러싼 연극에는 이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쟁 충동이 치밀 만큼의 직접적 ·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는 취하지 않으면서도 국내외에 자국 정부는 강경하고 의지가 뚜렷한 듯 보이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민자들이 원주민들을 압도한 나머지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깨질지 모른다고 이른바 ‘대체 불안‘을 자극하는 것도 그런 전법의 하나다. 전염력이 매우 높은 겨울철 독감, 또는 더 고약한 코로나19 전염병처럼, (자유민주주의 정부, 권위주의 정부) 세계 각국의 정부들도 국경을 둘러싼 열병을 이용해먹고 있다. - P21

접근이 어려운 오지라고 해서 국경 분쟁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다수 대중의 눈에서 멀어진다고 분쟁의 대상에서도 벗어나는 것은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 나라의 변방은 말썽이 일어나기 쉽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인구도 얼마 안 되는 혹한의 고산지대는 군사적 대치가 종종 일어나는 곳이다. 양쪽 모두 수천의 병사를 그 땅에 주둔시키고 있으며, 그들은 열악한 환경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다. - P27

일반적인 국경은 사람들을 일정 구역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와 그 너머 지역들에서의 국경 경험은 매우 다양하다.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흔히 국민국가 수립의 초석을 놓았다고들 한다. 이로써 일정한 국경을 경계로 하는 영토를 통치하는 공인된 체제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그 조약은 국경, 국가 주권, 국가 목표를 수립하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30년 전쟁의 산물이었으며, 일부 정치체들에게 평화와 자기 방위, 독립과 영토를 보장해 주었다. 스위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스웨덴 같은 다른 나라들은 영토를 확장했다. - P28

인류세는 국가 간 그리고 지역사회 간 분쟁을 심화시킬 공산이 크다. 그 여파로 하천, 삼각주, 늪, 산, 호수,
삼림, 섬, 해안, 평야 등이 쟁탈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배타적 주권이라는 신화와 고정된 국경이라는 신화는 위험하다. 우리는 국경에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도입해야 한다. 국경이란 살아 있는 것이며,
자연의 변화가 가져오는 복잡한 현실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기후변화와 국제갈등이 깊어지는 지역에서 일어나게 될 사람들의집단 이주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 P36

장래의 분쟁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세 가지 유형의 국경분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물리적 분쟁, 비정통적 분쟁, 새로운 분쟁을 그러나 먼저, 우리는 어째서 이 국경이라는 것이 그토록 뻔질나게 논쟁거리가 되고, 행동, 논란, 수익을창출하게 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 P38

2019년 3월에 나온 보고서에서, 경영분석 그룹인 프로스트앤설리번(Frost and Sullivan)은 국경 안보 관련 시장이 2025년에 1,680억 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투자는 실시간 데이터 분석에 집중될 것이며, 국경 안보 기구는 이로써 사람과 물자의 비정규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고 예방하는 역량을 키울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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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합리성은 1579년 유유 사건의 재조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유연을 살해한 사법장치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유연을 대신할 새로운 악인을 찾아내어 사건을 덮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백을 확보해 그를 법적으로 완벽한 악인으로 공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법장치는 살인을 하고도 천연덕스러운 살인자처럼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백씨가 끝까지 조사를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일이다. ‘나의 아우를 죽였다‘(<유연전>)는 유유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백씨라는 생각은 사건 당시에도일정하게 공유된 견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씨는 결코 추궁을받지 않았고 그녀와 채용규의 공모관계도 밝혀지지 않았다. 백씨와 함께 춘수를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그의 아들 채경백을 조사했더라면,
춘수와 채용규를 잡아 넘기겠다고 유연의 아내 이씨에게 접근했던 영수와 김헌을 조사했더라면,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법장치는 그 조사를 회피하였다.
왜 조사를 회피했을까? 백씨에 대한 조사는 백씨와 채응규의 성관계는 물론 결국은 유유가 갖고 있었던 성적 문제를 드러낼 것이었다.
사족이 아니라면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경우, 괴물로 치부하면 간단하였다. 하지만 사족남성이라면, 그것도 한 집안의 적통을 이을 적장자가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한 ‘제3의 성‘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243

 예컨대 동성애자는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일뿐이듯, 유유와 같은 경우는 당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제3의 성‘을갖는 사족남성의 존재 같은 난감한 문제는 은폐되어야만 마땅하였다.
1579년 백씨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버린 것은 그 내부에 성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연전>은 유연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곧그것은 일차적으로 유연의 아내 이씨와 이원익을 비롯한 당시 사족들의 여론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또한 이 작품은 비합리성과 남형으로 점철된 사법장치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갖자는 의도를 표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서술은 이제의 ‘악인화‘를 향해 치달았다. 이제를 악인화하는 과정에서 백씨가 적장자권을 놓지 않기 위해 채용규과 공모해 사기극을 벌이고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은폐했다. 나아가 사족남성이 갖는 성적 문제가 야기할 일체의 문제도 아울러 덮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유연전>은 유교적 가부장제와 사족사회의 모순을 근저에서 은폐하는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64년(명종 19)과 1579년(선조 12) 사이에 조정에는 권력의 교체가있었다. 과거 네 차례의 사화로 진출과 패퇴를 반복하던 사람이 정치권력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와 남명, 율곡이 있었다.
그들은 도덕정치를 표방했고 주자학 텍스트를 철저히 읽으면서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 P244

표면적으로 매끈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 매끈한 시대의 이면에는 온갖 인간들의 온갖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로서의 괴로움으로 집을 떠난 자, 적장자에게서 후손을 보지 못해 절망하는 자, 사기극으로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자, 성불구의 남편을 대신할 가짜 남편을 만드는 자, 형수의 무고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16세기 후반 ‘매끈한 조선사회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었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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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응규는 민간을 찾아다니면서 굿과 연희를 해주고, 아울러 전복 따위로 재물을 편취하는자가 틀림없다. 한마디로 영락없는 무당이다.
채용규와 같은 인간은 당시 사회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채응규가 살던 조선 전기에는 무당(때로는 승려)이 점복이나 여타 술수로 민중을 속이고 재물을 편취했던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해를 돕기위해 유사한 사례 몇몇을 검토해보자.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당이 자신을 신적 존재라고 말하고 대중을 현혹하여 재물을 편취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382년 고성의 백성 이금과 사노 무적은 미륵불로 자칭하여 백성들에게 재물을 편취했고, 합주의 어떤 사노 역시 검대장군이라 자칭하다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자신에게 귀신이 내렸다고 하는 것도 흔한 수법이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황제의 신이 내렸다면서그 신의 능력으로 인간의 운명과 화복을 맞히거나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예외 없이 어설픈 사기극이었으나 민중은 그것을 믿었다. 예컨대 과거 참형을 당한 장수와 재상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그것을 나무 장대에 매달고 ‘두박신‘이라 일컫자, 동네마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것에 놀란 백성들이 다투어 종이와 포를 내어 제사를 지낸 사건도 있었다." 거울을 달아놓고 그 안에 신이 있다면서 사람을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국가는 무당과승려가 주동이 된 사기성이 짙은 종교행사를 금지하려 하였다.
- P48

무속은 민중에게 하나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 그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으로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사족체제 모두가 교체를 적극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사족사회 내에서는 유교(성리학)가 불교와 무속을 대체해 나갔지만, 민중과 여성은여전히 무속과 불교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여전히 무속을 신봉하는 남성-사족도 남아 있었다.
《실록> 등의 광범위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무풍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중과 여성은 물론 때로는 사족-남성들까지 재산을 헌납하는 등 샤머니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조선 정부는 무당과 사- 굿을 억제하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그것의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자료는 1431년(세종 13)의 것인데, 40년뒤인 1471년(성종 2) 대사헌 한치형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무풍의 성행을 비판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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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해
본명은 노르마 로사 가르시아 마이니에리
1940년 과테말라에서 태어나 과테말라 산카를로스 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역사학·인류학·고고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사회과학 분야의 자료에서 얻은 노동자, 농민, 민중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집단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표작으로는 「입 다문 마을」이 수록된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들』, 『행인의 시』, 『주변성, 여성과시」 등이 있다. - P51

작가의 말
글쓰기는 힘들고 끝이 없는 작업이다. 그것은 고독과 고통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갚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과테말라에서 ‘문학적‘ 현실 속에 침잠하여 살아가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작가들이 주제를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수많은 주제로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란 도구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고만있다면,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입 다문 마을」을 쓰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중심인물의 죽음이었다. 정확히 나는 그 대목을 열여덟 번에 걸쳐 다시 쓰면서. 가능한 한현실적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에, 언젠가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놀리기도 했다.
"얘야, 불쌍한 아벨 사령관을 죽일 때면, 거기에 관해 너무 많은 경험을 갖게 될 거야. 그래서 아마도 살인자의 입장에서도 쓸 수 있게 될거야."
난 중요한 목표가 있다. 난 우리나라의 대중들에게 읽히고 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 중 대부분은 문맹이다. - P52

......그 지역에는 아무도 살지 않소. 기껏해야 코요테와 같은 동물만 살 뿐이오. 그러니 이제부터 이 사실을 명심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로 고통을 받을지도 모르오."
그리고서 그 지역의 지도와 교통표지판, 그리고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친척들은 산타마리아 델라 벤디시온에살던 친척들을 잊어버렸고, 전에는 채소와 꽃으로 가득 찼던 소란스러운 일요일이 아침에는 교회를 가고 오후에는 술집으로 향하는 슬프고 우울한 일요일로 바뀌었다. 건망증이 심한 친척들은 사진과 선물들과 로사리오를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그 누구도 그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밤새에 망각의 전염병이 휩쓴 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기억을 상실한 산헤로니모 마을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우선 선생님들, 다음에는 우체국 직원들, 그러고는시장과 신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은 그것이망각에 저항했던 끈질긴 기억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자 모든 마을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 기억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문 사람들이사는 그 마을은 유령과 같은 마을이 되었던 것이다.
- P64


"아…… 벨사………… 령…………… 관!"
그는 혁명군이 해방시킨 새로운 영토의 첫 번째 방어선이었던 산타마리아 델라 벤디시온 마을의 혁명 사령관이었다.
불빛이 꺼졌다. 귀신 같은 사람들이 시체를 치웠다. 시체의 눈은 아직도 맑고 깨끗한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무기를 철수시켰다.
"여기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작전 지휘관이 명령조로 말했다.
마을의 집들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닫힌 창문에서 물러나 침대로 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잠을 이룰 수 없을것이다. 기억은 되돌아왔고・・・・・・ 한 명의 증인이 있었다. 방금전에 죽은 남자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보았던 단 한 명의 증인이 있었던 것이다.
산타마리아 델라 벤디시온과 그곳의 주민들, 그리고 아벨사령관은 역사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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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미얀마어가 공용어로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미얀마어를 이해하고 있다. 미얀마는 의무교육제(4년제)를 채택한 지가 오래지 않기 때문에 소수종족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미얀마어가 부분적으로 소통되지 않는다. 이들 소수종족이 구사하는 다양한 고유언어가 있고, 그 종류가 141종에 달한다는 조사통계가 있다. 미얀마어 이외에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영어가 폭 넓게 통용되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도어(Hindi)와꾸앙뚱(廣東)어가 부분적으로 소통된다.
주요 종족과 분포(도표2 참조) 상황은 다음과 같다.
주종족인 버마(Burma)족은 에야워 강을 중심으로 한 중부 평야지대와 태국과 국경을 이루는 동부 고원지대의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미작산지와 벵갈 만의 서쪽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서 역사를 통하여미얀마의 가장 중요한 종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산(Shan)은 미얀마 중부의 샨 주의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지대와계곡에 거주하는 종족이다. 샨족을 지칭하는 샨(Shan)은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태국과 라오스 및 중국의 국경과 마주하고 있어서 오래 전부터 국경무역이 성했다. 교역품 중 아편은 오랫동안 주요 교역품목 중의 하나였다. - P3

까렌(Karen)족으로 오랫동안 널리 알려져 온 꺼잉(Kayin)은 3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서부 고원지대의 샨족의 거주지역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밀수품에 대한 통행세를 받아왔으나, 현재는 정부군에 의해 태국으로 내몰려 있는 상태이다. 정치적 활동에 간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꺼인족들은화전방식으로 농사를 짓거나, 코끼리 사육과 길들이기, 코끼리를 이용한벌목, 광산에서 주석 등의 광물을 캐서 생활하고 있다. - P4

친(Chin)은 미얀마의 소수종족들 중 외부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종족이다. 친족은 총 인구가 100만 명 정도인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이들 친족들은 네팔(Nepal)의 구르카(Gurka) 종족과 마찬가지로 영국식민 통치시기에 식민지 군대에서 강인함으로 용맹을 떨쳤다.
까친(Kachin)족들은 미얀마 최북단에 위치한 까친 주에 근거한다. 미얀마의 산악지대에 분포되어 있는 많은 고산(高山族)들은 대개까친족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들은 애니미즘(animism)에 가까운 종교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막내가 상속하는 특이한 가족제도를 가지고 있다.
몽(Mon)의 인구는 130만 명가량이며 미얀마의 중남부 해안지역에군거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버마족에 동화된 것으로 보이나, 미얀마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주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소수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으로 확인한 종족 수는 135 종족으로 발표된 적이 있다. 아직도 외국인으로 등록되어있는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지난 1993년 군사정부에 의해서 각각 5만8천 명과 3만4천 명으로 조사되었다. - P5

III. 국토와 지형
미얀마는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동쪽으로 중국, 동쪽으로는 라오스 남동쪽으로 태국의 5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 국토면적은 약 68만㎢로 대륙부 동남아 국가들 중 가장 크며 한반도 전체의 3배정도이다.
미얀마의 지형은 그 성격에 따라 동부 고원지대, 중부 평야지대, 서부산악지대, 그리고 벵갈(Bengal) 만 연안의 라카인(Rakhine) 연안 지역으로 구분한다. - P5

IV. 기후
미얀마는 국토가 남북으로 2,040km에 달하며 북으로 중국대륙 운남성(雲南省)의 남서부와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태국 및 인도와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나라는 전체적으로 열대와 아열대에 속하여 고온다습한 열대몬순기후대이다. 건기와 우기는 대체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우기는 벵갈(Bengal) 만(灣)에서 남서 계절풍(Monsoon)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5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5개월간이다. 이기간 중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5,000㎜ 가량의 비가 내린다. 건기 중 기온이 가장 낮은 기간은 11월부터 2월까지 4개월간이고 이 기간 중 평균 최저기온은 17℃이다. - P7

2. 주요 도시
1) 양공(Yangon)에야워디강 하구의 델타평원에 위치한 양공은 양공행정주의 명칭이자 미얀마의 수도이다. 양공은 ‘적을 무찌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755년 몽(Mon)과의 전쟁에서 알라웅퍼야(Alaungpaya) 왕이 승리하여 더공(Dagon)을 점령한 후, 더공을 양공으로 개칭한 사실(史實)에서 연유한 것이다. 1824년 영국과의 제1차 전쟁에서 미얀마가 패한 후 양공 지역은 영국 식민통치의 필요에 의해서 조선소를 비롯한 각종 공장시설이 건립되면서 번창하게 되었다. 2005년 현재 양공시청이 추정한 양공의 인구는 6백만 명에 달한다.
2) 만들래(Mandalay)
양공으로부터 에워디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620km 떨어진 만들래는 양공 시 다음으로 큰 미얀마 제2의 도시이다. 꽁바웅 왕조의 민돈(Mindon) 왕에 의해서 건설된 왕궁이 이곳에 있다. 1857년부터 민돈 왕이 건설했다는 이 도시는 불교전설에 따라 이룩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얀마문화와 불교의 중심도시라 일컬어지고 있다. 인구 60만(1996년 추정치)의이 도시는 68만㎢ 면적 미얀마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버마족 이외의 다른 소수종족들과의 접촉이 용이하다. 또한 만들래는 중국의 꾸밍시와 연결되는 미얀마 국경무역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중국 민항기가 주2회 운항하고 있다. - P12

3) 버고(Bago)
양공과 만들래를 잇는 도로와 철도망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버고 행정주의 수도로 인구는 32만 명(1996년 추정치) 수준이다. 중부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쌀과 목재의 중간 집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1월과 2월의쌀 수확기에는 미작문화(文化)의 장관을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2만 7천 명의 연합군 희생을 기리는 영국군 전몰장병 유적지가 이곳에 있다.
4) 몰먀잉(Mawlamyine)
땅르윈(Thanlwin) 강과 안다만(Andaman) 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있는 항구도시로 22만의 인구(1996년 추정치)가 거주하고 있다. 이 도시는 몽(Mon) 주의 중심도시이며, 양공과 만들래, 그리고 버고에 이어 미얀마 제4의 도시이다. - P12

1. 중국
네윈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정책을 추구하면서 화교(華橋)의 경제활동을 봉쇄하여 미얀마-중국 관계가 소원했으나, 1971년에 이르러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었다. 이 때부터 1985년까지 양국의 최고 지도자들의 교차방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 기간 중 네윈은 총 다섯 차례(1971년,
1975년, 1977년, 1980년, 1985년) 베이징을 방문하였고, 덩샤오핑(1978년)등 중국 지도자들도 양공을 답방하였다.
베이징 정부는 중국 대륙의 서남부 개발과 관련하여 미얀마를 통한 인도양 진출의 교두보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중국-인도 간의 국경분쟁이 해소된 이후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중국은 대 인도 협력관계 강화에도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 땅쉐(1996년 1월) SPDC 의장을 비롯하여 마웅에(1996년 10월 2000년 6월)SPDC 부의장 등 대부분의 SPDC 위원들이 베이징을 방문하였으며, 리펑(1994년 12월) 총리를 비롯하여, 장쩌민(2002년 12월) 국가주석 등 많은 베이징 지도자들도 양공을 방문하여 관심사를 논의하고 양국 간의 협조관계 증진에 노력하였다.
미얀마는 소수종족의 반정부활동에 중국측의 긴밀한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미얀마는 중국산 재래식 무기와 탄약 수입에 중국측의 협력을 요청하고 있으며, 중국도 미얀마의 양공만 인근에 해군 기지를 임차하려는 협상을 전개하고 있다. - P16

2. 태국
미얀마와 태국은 역사적으로 가깝고도 먼 ‘애증(愛)관계‘의 이웃나라이다. 총 연장 1,800km의 국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만큼 국경분쟁의 요인도 많다. 특히 마약재배와 밀매에 태국의 고산(高山族)들과 미얀마 북동부 산악지대의 소수종족들 간의 협조가 양국 정부를 어렵게만들고 있다. 미얀마-태국 양국은 양국의 협조관계 증진으로 보다 많은실질적인 이익을 제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1979년 당시 미얀마의 최고 실력자 네윈이 태국을 방문하였고, 1980년태국의 쁘렘 수상이 답방하였다. 1980년 쁘렘 수상 양공 방문시 양국 간의 영해(海) 확정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진 바 있다. 미얀마 군사정부에 대한 외부의 비협조 관계로 양공 정부는 태국을 통하여 국제적 고립을 탈피(脫皮)하려고 유화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태국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있는 미얀마를 지지. 지원함으로써 투자와 경제 진출을 선점(先占)할 수있다는 양국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서 상생(相生)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태국이 더 적극적이다. 2001년 6월 딱신 태국 수상의 미얀마 방문으로양국 외무장관의 정기 교환 방문을 제안하였으며, 이 때부터 양국의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이 긴밀한 교차 방문을 통해서 미얀마-태국 양국의 주요현안인 군사분야의 협력 문제를 비롯해서 경제협력 문제, 마약퇴치 문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 P16

3. 아세안
미얀마 군사정부는 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첫 번째 조처로 아세안 가입을 시도하였다. ‘아세안 10‘ 혹은 동남아의 아세안화(ASEANizationof Southeast Asia)를 추진해 온 주요 아세안 국가들도 1995년 4월 아세안-미얀마 간의 ‘건설적 개입(Constructive Engagement)‘을 추진해 왔다. 태국이 주도한 이 연계정책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 싱가포르가 동참하였고, 미얀마 군사정부에 부정적인 대미(對美) 관계를 고려한 필리핀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미얀마는 1997년 7월 제30차 아세안 외무장관회담을 통하여 아세안 가입이 확정되었다. 이 때 이후로 미얀마 군사정부의 최고 지도자 땅쉐는 아세안 무대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1997년 12월에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였고, 1998년 12월에는 베트남 (제6차 아세안 정상회담)을 방문하였다. 1999년 11월에는 필리핀을, 2000년 월에는 싱가포르(제7차 아세안 정상회담)를, 2001년 9월에는 다시 말레이사아, 같은 해 11월에는 브루나이의 아세안+3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2년 10월에도 캄보디아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 P17

4. 미국
미얀마와 미국은 네윈 정부 이래로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73년 네윈 정부는 AID 원조를 거부하고 일체의 간섭을 거절하였다.그러나 마약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하고 미얀마도 북동부 국경의 소수종족 문제로 골치를 썩이면서 1975년부터 1976년 사이에 미얀마 정부는마약 단속을 위한 헬기 지원(18대)을 수용하였다. 미얀마-미국 관계는1980년 이후 다소 개선되었는데, 1981년에 미국은 총 3,500만 달러 규모의 무상원조를 미얀마에 지원하였다.
미얀마-미국 관계는 1988년 9월 SLORC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미국은 1991년 7월 대 미얀마 경제제재조치를 취하였으며, 1997년 4월에는 대 미얀마 투자금지 결정과함께 국제금융기구의 대 미얀마 금융지원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5월에는 미국의 대 미얀마 제재조치를 매년 연장하는 조처를 취했다. 미국은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SPDC 출범 이후에도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 P18

5. 일본
일본은 미얀마 최대의 원조공여국이며 역사적으로 매우 돈독한 양자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8년 9월 SLORC 정부 출범 후 원조 중단 등 양국관계가 일시 정지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역사적 관계와 최대의 원조공여국임을 내세워 서방세계를 대표하여 미얀마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야권(野圈)과의 대화도 시도하고 있다. to folo일본은 미얀마에 다양한 형태의 유무상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무상원조도 점증(漸增)하고 있는데, 1990년에 3,000만 달러 규모가 1994년에는 1억 달러로 증액되었다. 1995년에는 1억 4,000만 달러, 1996년에는 다시 1억 5,000만 달러로 늘어났다. 일본의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 수출입은행, 상공회의소(JCCI) 등이 대 미얀마 원조를 대행하고 있다. 2001년 5월에는 일본 정부 차원의 원조로 2,800만 달러 규모의 수력발전소 건립에 필요한 무상원조를 실시한 바 있다. 일본측에서는 각료급 인사들이 자주 미얀마를 방문하고 있다. - P18

남·북한관계에 원칙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1977년 당시 네윈대통령의 북한 공식방문 등으로 정치적으로 북한에 편향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1983년 10월 아웅산 폭발사건이 북한의 소행으로 확인되자, 1983년 11월 버마 정부는 대 북한 정부승인을 취소하고 외교관계를단절하였으며, 버마 주재 북한대사관 전 직원을 추방하는 등의 외교조치를 단행하였다.
최근 들어 북한은 외교적 고립탈피 정책의 일환으로 유엔 등의 국제무대나 중국·태국·인도네시아 등 제3국에서 미얀마의 외교관이나 무관등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관계재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0년 7월 미얀마 외무장관은 대한민국의 입장과 전체 아세안 회원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북한의 아세안지역포럼(ARF)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태국 외무성을 통하여 공식화한 바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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