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소설의 요괴는 민간 전래 요괴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외양 묘사가 구체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저지르는 악행도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최후를 맞는 모습도 독특합니다. 주변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캐릭터로서 살아 숨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고전소설의 요괴는 인간과 같은 욕망을 가집니다. 식욕 같은 원초적 욕망에서부터, 재물을 갖고픈 욕망, 사랑받고 싶은욕망, 명예를 누리고 싶은 욕망,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고차원적 욕망까지 지닙니다. 또한 그 욕망에 오롯이 집중합니다.
- P4


이처럼 <전우치전>에 등장하는 여우 요괴 두 마리는 성욕에 사로잡혀 소중한 보물을 빼앗겨 버린 어리석은 존재다. 또 본의 아니게 인간에게 요술을 전수해 준 딱한 요괴이기도 하다. <전우치전>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여우 요괴는 성욕이 특히 강하다. 현대물에서 인간이나 가축의 간을 먹는 여우의 모습이 많이 부각되지만, 이러한 여우는 고전소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피와 살을 먹고 배를 채우는 여우보다는 구슬을 통해 남성 혹은 여성의 정기를 흡입하거나, 직접적인 성관계를 통해 정기를 얻는 여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요괴는 타고난 습성과 성품을 길들이기 매우 어렵다. - P25

여우 구슬과천서

한국의 구비설화에는 여우 구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대략적인내용은 여자로 변신한 여우 입속의 구슬을 남자가 삼킨 후에 특별한 능력을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볼 때, 여우 구슬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터득하게 하는 신묘한 물건이다. 그렇기에 전우치전>의 전우치도 여우 구슬을 삼킨 후 천리와 지리에 모두 등통하게 된 것이다.
중국 문헌에 나타난 여우 구슬은 그 효능이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에서는 여우 구슬이 온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만드는 물건으로 나타난다. 당나라 사람인 유중애는 그물로여우를 잡아 바둑알처럼 둥글고 맑은 여우 구슬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는데, 그 이후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매우 애지중지했다. 여우 구슬이 인간 사이의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여우의 천서는 어떠할까. 한국 구비설화에는 남자가 여자로 변신한 여우에게서 천서를 얻어 내용의 일부를 익히던 중, 여우가 천서를 되찾아가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 P27


이와 비슷하게 중국의 태평광기에도 여우의 천서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의 도사 손증생이 여우 소굴에서 천서를 빼앗아 왔는데, 여우 무리가 찾아와 한 부를 필사하도록 허락해 줄 테니 전서만은 돌려달라고 한다. 이에 손증생은 여우에게 천서를 읽는 비법을 전수받고, 사본 한 부만을 간직한다. 그리고 그 시대 최고의 술사(術士)가 되는데, 황제인 현종에게까지 끝내 천서를
보여주지 않다가 처형당하고 만다. 비슷한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여우의 천서를 익힌 주인공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여우에게 화를 당하는 비극적 결말이보인다.
인간이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적힌 천서에는 대체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었을까? 한국 설화에서는 주로 몸의 형체를 바꾸는 둔갑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천서의 마지막 장에 쓰인, 옷고름을 숨기는 방법까지 채 익히지 못해 완벽하게 둔갑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둔갑해서 몸을 숨겨도 옷고름만은 보여서 결국 들키고 마는 것이다. 또한 천서를 통해 재물을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편 중국 설화에서는 천서를 통해 음양의 이치를 통달하고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도술은 얼마든지 착한일에 쓰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설화 속 주인공들은 그 도술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다가 화를 당하곤 한다. 이는 천서가 애초부터 요괴인 여우의 책이고, 그 책에는 악한 일에 쓰는 삿된 요술이 기록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요괴의 책일지라도 인간의 것으로 승화시켜 선한 데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요괴의 강력한 요술에 빠지면 인간이 마음대로 절제하기 어려워서일 것이다. 
- P28

여우 꼬리의 개수

여우가 등장하는 고전소설 33편을 살펴보면 무려 18편의 작품에 꼬리아홉 달린 여우가 등장한다. 나머지 15편의 작품 속 여우는 꼬리가 1개, 3개,
5개, 7개로 다양하다. 이처럼 꼬리  아홉 달린 여우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신화 -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청구산(靑丘山) 혹은 청구국(靑)에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는 기록이 세 군데나 발견된다.
동쪽으로 3백 리를 가면 청구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아홉 개의 꼬리가 있으며, 그 소리는 마치 어린애 같고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
"청구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곳의 여우는  네 개의 발과 아홉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다."
"청구국이 있는데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
‘청구(靑丘)‘라는 지명은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동방, 곧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구미호가 산다고 언급한 실증적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예전부터 우리나라와 구미호 사이에 깊은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고전소설에서 여우 꼬리의 개수와 여우의 능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
우리는 숫자 9를 완성과 성취의 의미를 담은 최고의 수로 여기곤 한다. - P41

의외로 보기 드문 먹보 요괴

(삼문취록)의 멧돼지처럼 본체가 돼지인 요괴는 다른 작품에도나온다. (금방울) , 〈이수문전〉, (최고운전)에는 금돼지가 등장하고, (김윤전), 〈명주보월빙〉, 〈조씨삼대록)에는 멧돼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여섯 작품의 돼지 요괴는 (삼문취록)의 멧돼지처럼 잡식성이 아니다. 대부분 무언가 먹는 모습은 나오지 않고, 여인 납치나 인간을 괴롭히는 다른 악행을 벌이는 데 집중한다. 예외적으로 (김윤전)의 멧돼지가 머리 다섯 달린 귀신으로 변신해 행인을 잡아먹기는 하지만, <삼문취록>의 멧돼지처럼 인간의 음식까지 가리지않고 먹지는 않는다. 한편 돼지 이외의 다른 요괴에게도 잡식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흔하고 많을 것 같은 먹성 좋은 요괴가 삼문취록 단 한 작품에만 나오는 것이다.
흔히 요괴라면 당연히 인간의 장기나 혈육, 정기를 먹는다고만생각하기 쉽다. 물론 요괴가 가장 많이 먹는 것은 인간이다.  - P53

다만 몇몇 작품에서 인간에게 제사 음식을 풍성히 차리도록 요구하는 요괴를 발견할 수 있다. (보은기우록)의 백룡, (삼강명행록)의 교통, (명주보월빙)의 야차 등은 제사 음식을 바치지 않으면 괴롭히겠다고 백성들을 위협한다. 그런데 막상 제사 음식을 먹는 모습은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배를 채우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제사 음식을 차려 제를 올리고 공경하는 대접을 받고 싶었던 듯하다. 식욕보다 존중의 욕구를 더 중시한 요괴인 것이다. 그러한 다른 요괴들과 비교해 봤을 때, 〈삼문취록>의 멧돼지는그야말로 식욕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 P54

한편으로 올출비채는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요괴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인간 여성으로 변신하는 요괴들을 살펴보면 양반집의 처녀나 유부녀로 변신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렇기에 남성에게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인간 여성의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어찌 보면 틀에 박힌 여성 캐릭터인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올출비채는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을 때려눕히는 것도 모자라 지극히 어려워해야 했을 관계인 도련님들에게까지 호통을 치며 꾸짖으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여성 가장이다.
물론 올출비채와 같은 참신한 캐릭터는 ‘인간‘이라는 제약이 없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삼강명행록》은  중국 명나라의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정씨 가문의 주요 인물인 정흡, 사씨, 정철의 여정을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은 ‘유교의 세 가지 강령인 충·효·열이라는 밝은 행실에 대해 적은 기록‘이라는 뜻이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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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2-02-2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