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은 이몽룡과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저항했다. 이몽룡을 사랑했지만 이몽룡을 향한 사랑 때문에 저항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위해‘ 저항한 것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진정을 의미하지, 나를 사랑했던 남자나 나를 구해주러 올 남자 같은 외적상황으로 구현될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춘향은 정절을 지킨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적하고 의도한 것은 그런 어설픈 정절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자신다움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실 춘향은 정절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인 게 아니었다. 이몽룡은 정절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했다면 그것은 그냥 헤어지기 위한 하나의 회유책에 불과하다. 이몽룡이 남다른 인물이기에 돌아왔지.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고 그것이 일반적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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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결혼은 처가살이가 기본

시집살이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늘 듣다 보니 그것이 우리의 오랜 풍습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결혼은 남귀여가혼인 처가살이가 기본이었다. 이런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결혼과 동시에 처가로 몸만 쏙 들어가 살면 되니 남성 입장에서는 이 처가살이가 아주 괜찮은 풍습이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도 여성이 결혼하면 시집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19세기 즈음 시작된 풍습으로 이후 일제강점기를지나면서 공고화되었을 뿐, 조선시대에는 처가살이가 기본이었다.
처가에 들어가 살면 장인 장모가 사위를 먹이고 입히고공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관직까지 다 알아서 해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장인이 자신을 더 여러 면으로 돌봐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사위의 첩까지 장인이 골라주었다. 이런 제도가 가능했던 것은 남녀가 균등하게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아들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유산을 받을 수 없지만 처가에 들어가 살면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장인이 돌아가시면 딸이 처가 유산을 상속받으니 독립해 살 수도 있다. - P62

조선시대 초부터 신진사대부를 비롯한 양반 기득권자들이 어떻게든 시집살이를 정착시키려 애를 썼다. 남성의 가치와 가부장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시대가 막을 연 1392년부터 줄기차게 시집살이를 추진했다지만 성공하진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관련 기록을 보면 이에 대한 고민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세종은 온 백성이 처가살이를 해오던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풍습을 어떻게든시집살이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솔선수범해 자기의 딸인 옹주를 시집살이를 하도록 사위의 집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풍습과는 정반대로 한 것이다. 당대 지존인 왕이 몸소 이런 결정을 내렸음에도 대신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날 대통령의 권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왕조차도 이 풍습을 바꾸지 못했다. - P63

기본적으로 처가살이를 하다가『흥부전」이 탄생할 때쯤 비로소 장자 위주의 상속제로 바뛰기 시작했다.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바뀌는 시점은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시작은 대략 17세기중후반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자료를 보면17세기 후반쯤에 장자 위주로 재산을 상속했다는 몇몇 기록을 볼 수 있다. 아직 전면적 확산은 아니고 이런저런 타협적 양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차츰 확산되었다.
이때는 딸에게는 아예 상속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딸이 밉거나 차별해서가 아니라 혼인한 뒤 시집살이하게 된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사돈집에 재산을 내주는 격이니 더 이상 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게 된 것이다.
「홍부전』은 바로 이렇게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구조가바뀌던 시기를 그 배경으로 한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로 바뀌면서 늘어난 것은 사실 남성들의 부담이다. 가장이란 허울은 좋지만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여성이 자기 집에 들어와 살게 되니 경제적으로 자신이 먼저 독립해야 했다. 먹고 살려면마땅히 그래야 했다. 이런 시대인 만큼 흥부는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아주 똑바로 말이다. - P65

이런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먹고살아야 하니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손을 벌린다.
여유가 있는 양반집에서는 그렇게 찾아와 손을 벌리는 친족들을 내치지 못하고 거두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점점종법 제도가 갖춰지고 강화되었다.
종법 제도는 정실에게서 태어난 장자 위주로 가문 전체를 유지하는 일종의 사회 시스템이다. 이는 조선 후기가족 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가족 윤리를 기반으로 한 조선사회의 규범적 체제를 지탱시킨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되었다. 한마디로 상호부조와 사회복지 시스템이었다.
조선 후기에 종법 제도가 강화된 것은 양반 가부장의 힘을 강화해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이 시작은 아니다. 몰락하는 양반이 많아지는 시대에 한 가문의 장자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정리해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먹거리를 줌으로써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 문중, 종가, 적장자, 예법등의 관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먹고사는 지극히 현실적 이득에 동의해 종법제가 강화된 것이다.
- P69

「춘향전』의 본질은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이며,
기다림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 그것을 뚫고 나가려는 강한 열망이다. - P96

여전히 찜찜하다면 춘향의 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대개가 ‘성춘향‘으로 알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참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춘향‘은 지금의 전주 지방에서 판각되어 유통된 『열녀춘향수절가女守의 영향을 받은 작품에서만 그렇다. 서울 지역에서 유통된 『춘향전』에서는 춘향의 성이 ‘김‘이다. 즉, ‘김춘향‘
이다.
사실 『춘향전』 이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이본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南原古詞』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던 텍스트였다. 그「남원고사에 등장하는 춘향의 성이 ‘김‘이다. 그러니 광복이전까지 서울 사람 대부분은 춘향을 김춘향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춘향전』의 성춘향 어쩌고 하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했을 가능성이 크다. 광복 이후 영화, 드라마 등에서 춘향을 ‘성춘향‘으로 고정시켜 만들면서 성춘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진짜 춘향의 성은 없다. 이른 시기의 대다수 『춘향전』 이본은 다 그렇다. 당연한 소리다. 낳아준 어머니는 확실하나 아버지를 모르기에 그렇고, 혹시 안다해도 성을 붙이기도 쉽지 않다. - P106

관기는 지방에 출장 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필수요원으로 남원은 물론 어느 관청이든 법률로 그 숫자를 정해놓았다. 그런데 보통 지방관이 내려와 한 기녀와 지내다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곳을 떠날 때 그기녀를 데려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국법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다른 기생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관기를 빼돌리는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법으로 이를 금했고, 신임 사또는 필수적으로 그 인원을 확인했다. 그것이 기생점고다. 변학도가 특별히 음탕해서 기생점고부터 한 게 아니라 국가 재산인 관기를 점검했을 뿐이다.
그렇다. 독자들의 눈에 이게 불편했던 것이다.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으로 여기는 시각이 마뜩잖았고, 그래서 자꾸본질을 어그러지게 보았던 것이다. 기녀는 천민으로 그냥 막 대하는 존재였다. - P111

이런 상황이니 ‘춘향전을 앞에 두고는 늘 고심이다. 진짜 춘향은 정점의 화신이 아니라 섹스의 화신이라고 말하면 천하의 몹쓸 놈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밝히는 놈에서부터 음란을 부채질하는 반동분자까지 뭐든 될 수 있다.
민족의 고전을 도색잡지로 만드는 못된 놈이 되지 않으려면 하는 수 없다. 타협해 같이 입을 모아 춘향을 욕하든지,
춘향의 절개를 찬양해야 한다. 아니면 그냥 보고도 못 본책 입을 꾹 다물든지,
결국 이렇게 현대의 춘향이는 혁명성을 빼앗겼고 《춘향전 》은 고루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춘향은 지고지순한 사랑과 정절로 남성을 기다리는 멋진(?) 여자가 되었고, 평생 미치도록 이몽룡을 따라다니는 질긴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춘향은 질긴 여자도 아니고 잡년도 아니며 열녀도 아니다. 춘향은 ‘봄의 향기‘이고 ‘혁명가‘였으며, 《춘향전》은 민중의 열망을 담아낸 민족의 고전이었다. 이제 그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 P131

 그야말로아무것도 아닌 천대받는 일개 기녀였지만 그녀는 진정한 여성다움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당대 문제에 도전했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강렬한 웅변을 뿜어냈다.
그것을 알아본 민중들이 『춘향전』에 열광했다. 그리고이몽룡도 아니고 당연히 변학도도 아닌 ‘춘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춘향전‘으로 만들었다. 당대에 가장 천하고 한심하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 일 없는 그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야말로 「춘향전』이 가지고 있는 혁명성의 한 모습이다.
게다가 이런 열망은 앞서 본 것처럼 성이 없을 수밖에없는 춘향이를 ‘김춘향‘, ‘성춘향‘, ‘안춘향‘ 등 지역마다 자신들의 고장을 상징하는 성을 붙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히 「춘향전』이 인기가 높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열망과 희망을 춘향에게 모두 투영했다는 의미이고, 자기들만의 춘향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의미다. 어떻게든 ‘우리 춘향‘이고 싶었던당대 민중들의 마음에서 「춘향전』 혁명성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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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은 욕심에 대한 이야기다. 과도해서 자신을 망각하고 남을 해코지하는 놀부의 욕심만이 아니라, 과도해서 자신을 해치고 급기야 주변까지 망쳐놓는 흥부의 욕심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야기다. 비록 놀부의 욕심은 쉽게눈에 띄고 흥부의 욕심은 판별하기 쉽지 않지만 똑같은 문제다. 그 욕심의 본질은 같다. 양상만 반대일 뿐 서로 닮은꼴이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말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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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야 듣거라. 사람이라 하는 것이 믿는 데가 있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법이다. 너도 나이를 먹었고,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는 놈이면서 사람 사는 것이 어려운 줄은 조금도 모르고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놀고먹으니, 내 이제 그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 부모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장손의 차지인데, 하물며 이 세간은 나 혼자 장만했으니 네 것이 아니다. 이제 네 처자를 데리고 어서 멀리 떠나거라. 만일 지체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썩꺼져라."
-『박타령』 신재효본 - P26

굶주려 죽게 된 사람에게는 먹던 밥을 덜어주고, 추위에 얼고 병든 사람에게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노인이 짐을 지고 가면 자청해서 대신 짊어지고, 장마통에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삯도 안 받고 강을 건네주고, 남의 집에 불이 나면 달려가 그 집 세간살이를 대신지켜주고, 길에 돈이나 패물이 떨어져 있으면 옆에 지키고 섰다가 임자가 찾아오면 돌려주고, 깊은 산속에서 시신의 백골을 보면 땅을 깊이 파서 대신 묻어주고, 수절하는 과부를 보쌈하는 자들이 있으면 쫓아가서 뺏어오고, 어진 사람을 누군가 모함하면 대신 나서서 변명해주고, 딱한 사정의 사람이 횡액을 만나서 고생하면 달려가 도와주고, 길 잃은 어린아이가 있으면 그 부모를 찾아주고, 주막에서 병든 여행객을 보면 그 사람 본가에 소식을 기별하는 등•••••• 이렇게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못 버니, 놀부가 오죽 미워하겠는가.

----- 《 박타령》 신재효본 - P29

그 많은 흥부의 아이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정답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이다. 홍부의 그 많은 아이들은 그냥 있었다. 글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품을 팔아 돈을 벌지도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냥 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버지 흥부를 상대로 밥 타령, 먹을 것 타령이나 하며 괴롭히는 게 전부였다. 한두 살짜리는 그럴 수 있지만 열댓 살먹은 자식들까지 그랬다는 게 문제다. 그때는 열여섯이 결혼 적령기여서 열댓 살만 되면 시집가고 장가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몸뚱이 다 큰 아이들이 집에 들어앉아 밥 타령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먹을게 없어 굶주리면서도 그러고만 있었다.
뭔가 많이 이상하고 뭔가 많이 비뚤어져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대체 왜 일을 하지 않았을까? 가난과 굶주림의 엄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단지 징징대며 보채는 것으로 일관했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분명한 하나는 그들이 보고 배운 게 단지 그뿐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란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보고 듣고자란 게 아버지가 비루먹은 말처럼 비실비실 다니며 빌어먹고 매품이나 파는 게 전부라면 그 자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성장했을까? 잘은 몰라도 뭔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만은 분명하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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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에서 나와 발끝으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개들이 저희를 두고 간 걸 알면 실망할 것이다. 그래도 예배 보는 곳에 개들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층 홀에서는 남두라는 한국인 하인이 우리가 외출하기 전 마지막 지시 사항을 듣고 우리를 배웅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 마시는 시간에는 돌아올 거예요." 남두 곁을 지나며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한국의 가을이 펼쳐내는 황금빛 장관 속으로 들어섰다. 진입로와 양쪽 잔디밭에는 노란 낙엽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화단에서는 암녹색의 회양목과 삼나무를 배경으로 스러져가기 직전의 백일홍들이 가지각색의 보석들처럼 마지막 찬란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감들은 첫 서리가 내려 빛을 밝혀줄 때를 기다리는 작은 램프들 같았고, 높게 자란 포플러 나무들은 보초를 서듯이 우리 정원의 경계에 빙 둘러서 있었다. 잠이라도 자고 있었는지 문지기가 자기 방에서 뛰쳐나와 대문을 열어젖히자, 마치 구름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서울 시내 전경이 대문이라는 액자속에 담긴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 눈 아래로 펼쳐졌다. 아침밥을 짓느라 불을 지핀소나무 장작 내음이 사방에 번지며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어느 계절보다 가을을 좋아한다. 가을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아무튼 가을만 되면 늘 치맛단을 질끈 올려 잡고 계절을 한껏 만끽하며 뛰어다니고 싶어진다. 이런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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